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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스물 몇 즈음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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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병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07 09:36 조회1,2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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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54bf94d05e141e0b0be41c695bdfb_1559925372_5422.jpg유병수/시인. 소설가

 

 

 

스무 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던 미당은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라고 <자화상>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 바람같이 산 청년에게 무슨 뉘우침이 있을 것인가. 피의 이슬을 막 마시고 온 청춘이다.

 

스무 살.

 

그래 이 어감에는 그러하도록 뭔가 가슴 뛰게 하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배움에 대한 열정과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시기다. 미래를 예감하면서...

 

아무 데나 버려진 휴지쪽을 아시는지. 다시 줍기가 어려운 휴지쪽의 성명을  아는지. 그의 죽을 수 있음을 아는지.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가슴에 남은 몇 마디 차마 하지 못한 채 굴러가는 그는, 사람이었던가. 샛길을 걸어본다. 비둘기가 날아와 앉는다. 비둘기와 함께 걸어본다. 스무 살이다. 무리를 지은 아이들이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벤치에 앉아 있다. 무엇을 배우는가. 키가 건장한 교수 한 분이 걸어간다.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인지. '교수님, 스무 살이에요. '

 

가만히 입술을 깨물어 본다.

 

"때마침 휴지쪽 하나가 굴러 가는 걸 봤어요. 비둘기도 날았지만요."

 

가만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열아홉까지의 습성이었다.

 

교수님은 교수실로 사라져버렸다. 하늘을 본다. 새삼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손에 잡힐 듯 하늘이 손에 잡힐 듯 이곳은 산이다. 산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길을 헤매었을까. 휴지쪽의 의미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비둘기가 날아왔던가. 산에 오르고 보니 하늘 잡기가 이토록 쉬운 것을.

 

"교수님 , 무엇을 가르칩니까"

 

"얼마쯤 가르치십니까, 하늘만큼?"

 

"스무 살입니다. 무엇을 배우죠, 전?"

 

"노을과 운명? 내가 가졌던 열아홉의 어둠? 사랑의 파장 거리? 날고 가라앉기를 거듭하는 새(시)의 변용? 막이 올려져 버렸을 때의 배우의 쓸쓸함? 비상을 끝내고 뒤집힌 무당벌레의 극화(극화)? 그리고 여명과 비로소 삶?"

 

푸드득 큰소리가 아니게 웃어본다. 푸드득푸드득. 자꾸만 우습다. 가슴에 손을 댄다. 희망감이 너무 가빠져 있다. 저만치서 학생 하나가 오고 있다. 

 

"배움 절차를 마쳤습니까 당신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배움 절차를 모두 마쳤나 보군요? 그래서 지금 배움 만을 기다립니까? 내 말이 맞죠? 저도 막 끝냈습니다.  그럼 들어 가시죠, 배우러."

 

대꾸를 않기로 한다. 벙어리가 되기로 한다. 아름다운 여학생 앞에선 말 벙어리가 되기로 한다. 난 스무 살이기 때문이다. 여학생의 앞을 재빨리 돌아선다. 푸득푸득 소리가 나지 않게 웃는다.

 

생각하기로 했다. 스무 살부터는 생각하기로 했다. 카페의 시끄러운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고 배움과 더불어 생각하기로 했다. 카페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귀 기울여 노래를 듣는다. 카페의 사람들 한층 더 시끄러이 소리를 낼 즈음 여학생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여학생이다.

 

"여기는 남산이에요. 도시에는 산이 흔치 않죠. 비둘기가 산 숲으로 이 날아가는 걸 봤어요."

 

여학생도 비둘기를 보았다고 한다. 공감대를 가질 수 있음은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다.

 

"비둘기 한 마리를 또 보았어요. 그 비둘기는 먼저 간 비둘기를 쫓아 역시 산 숲 우거진 곳으로 갔어요."

 

푸드득푸드득, 웃지 않을 수 없다.

 

"웃지 마세요. 그것은 배움의 의미에요. 산에 산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과 같아요."

 

아름다운 여학생의 팔을 슬며시 잡는다. 둘은 일어선다.

 

교수님이 강의실로 간다. 

 

둘은 강의실로 간다. 둘은 소리 모아 말한다.

 

"가르치세요, 교수님.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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