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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5번째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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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 성 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21 09:06 조회1,4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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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dafe5463e870ef375ab6a41625d7d_1561133154_4696.jpg박 성 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순진함만 믿고 쫄래쫄래 따라갔다. 

   겨우 5번째 만나는 사람이지만 신뢰와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실은, 여름 한낮 서른 살 된 처녀로 오도카니 방구석에 앉아 부채질하는 내 모습이 처량해 냉큼 이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나 시원한 계곡이 있는 숲속으로 데려가길 기다렸다. 폭발하는 태양 때문에 짜증이 물 밀 듯 밀려와서 ‘그저 그런 남자’라도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일 참이었다.

   “그럼, 빨랑 와요.”

   그 남자는 전화기를 내려놓자 마자 곧장 달려왔는지 땀을 찔찔 흘리며 나타났는데, 들고 온 까만 봉지엔 캔 맥주, 오징어, 과일, 부채, 책, 돗자리와 카메라까지 준비를 단단히 해 갖고 왔다.

   근처 남한산성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매미는 맴맴맴, 계곡물은 졸졸졸, 산 내음은 폴폴폴, 야단스레 수선을 떤다. 한참을 들어가니 큰 바위 하나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떡하니 버티고 있다.

   “여기가 명당 자리네요.”

   그 남자는 부리나케 바위 위에 돗자리를 깔고 나를 앉히더니, 기념 촬영을 하겠다고 하나 둘 셋 하며 사진을 박느라 정신이 없다.

   주변 숲과 계곡에 사람들이 야단이었지만 단 둘이 오롯이 앉아 있으니 서먹서먹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내 딴엔 긴장이 됐는지 통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계곡 물에 담가 놓은 캔 맥주가 시원해질 무렵, 과일을 안주삼아 한 잔 마시고 나니 속에서 열기가 느껴지는지 빨개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아, 그의 온몸에서 진한 땀 내음이 풀풀풀... .

   속으로는 ‘아니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웃겨.’ 하면서도 이상하게 그의 땀내가 달콤하고, 고소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난 그만 그 냄새와 더위와 졸음이 한 범벅이 되어, 그의 팔베개를 베고 나란히 눕게 되었다.

   사실은 어젯밤 이 남자가 준 ‘진주목걸이’를 받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를 신부감으로 점찍고 있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딴엔, 그 마음 애써 모른 척하고 목걸이가 예쁘고 탐이 나서 날름 받았지만, 자기 딴엔 감추어진 마음을 받아준 것으로 알고 그도 어쩜 밤새 잠을 설쳤을 것이며 그런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났으리라.

   지난 밤 12시에 성남에서 916번 막차를 타고, 서울 대림동 자신의 자취방에 가서도 뭐가 또 아쉬워, 새벽 2시까지 전화통을 붙들고, 이메일까지 남겨두고도, 그리워 찾아온 것이다.

   햇볕이 얼마나 잔인하게 나뭇가지를 뚫고 오는지 눈을 뜰 수가 없다. 

   그 남자가 곁에서 책을 읽어주고, 부채질을 해 줄 때마다 확확 풍겨오는 그의 땀내가 그토록 좋을 수가 없다. 점점 달콤해 지고 고소해지는 체취가 온몸에서 퍼져 나도 몰래 야릇한 눈망울로 그의 모습을 살펴보니, 그렇게 귀엽고 다정하고 멋지게 보일 수가 없다.

   눈꺼풀에 콩깍지가 낀 걸까. 순간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노총각, 노처녀 신세 좀 면하고 싶은 생각이 훅 들었다. 이상하게 그를 전혀 모른 채, 사이버 공간에서 1달간 사귀었을 때부터 잘 통하고 느낌이 좋은 사람이어서 이 사람과 결혼을 작정했던 일이었지만, 새삼스레 그의 팔베개를 베고 그의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으며 파란하늘을 천장삼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참 행복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자연과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이긴 처음이다.

   “오메, 가까이서 보니 훨씬 곱네요.” 주변엔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는데 이상하게 창피하지도 도망치고 싶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저요, 강원도 순둥이 님 처음 보고 내 배필이란 거 알았어요.”

   “픽, 웃기지마요.”

   속내를 숨기고 눈을 맞춰본다. 따뜻한 눈, 살포시 내려앉은 착한 속눈썹, 오뚝한 콧날, 어렸을 때 물인 줄 알고 마셨던 양잿물에 보글보글 탄 윗입술이 사무치게 좋다. 구멍 숭숭 뚫려 기름기 잘잘 흐르는 까맣고 두꺼운 얼굴도 좋고, 넓은 가슴은 한 겨울에 훈훈한 열기를 뿜어 줄 것 같아 좋고, 당당하게 뻗은 팔과 다리도 좋다.

   8월의 푸른 녹음 앞에서 나무와 풀에게, 벌과 나비에게, 청솔모와 흐르는 물, 돌멩이와 이 커다란 바위에게 속삭여 본다.

   이 ‘행복한 그림’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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