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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뽕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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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8-15 16:47 조회1,6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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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16f97d59cdd00d99b9c9672de88001_1565912805_9747.jpg 박성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밤느정이가 배설한 알키한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다.

   기다란 꽃 이삭에 화분만 잔뜩 묻은 꽃 같잖은 꽃 내가 지독하다.

   빨간 걸 만지면 빨간 물, 까만 걸 만지면 까만 물, 손이든 입술이든 닿기만 하면 오디 물이 들었다.

알알이 박힌 게 포도랑 똑 닮았는데 오종종한 알맹이는 산딸기 같다. 찍 씹어 터뜨리면 오래된

와인을 마신 기억이 슬며시 떠오른다.

   어찌할 바 몰랐던 사춘기 때, 여기로 남몰래 산책을 나왔다. 온통 산으로 꽉 차있고 골이 깊어

아무도 이곳을 모르는 듯 했다.

   산모롱이와 논둑 사이엔 옹달샘이 있었다. 언제나 맑고 시원한 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손으로 퍼

먹으면 가슴속까지 서늘했던 달디 단 샘물. 그 샘물이 빠져나가는 아래로는 까만 깨알 같은 개구리

알이 소복했는데, 가지고 놀면 울쿵울쿵한 덩어리였다.

   나는 뽕나무가 싫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뽕나무 밭이 세 뙈기나 되었다. 그만큼 누에치기를

해야 했고, 많은 뽕잎을 따야 했다. 점 만한 알에서 부화해 애벌레, 누에고치, 번데기를 거쳐 나방으로

부화하는 누에는 우리 집에서 만큼은 느리게 자랐다.

 

   어린 동생은 뽕나무 밭에서 도담도담 자라고, 일곱 살 나는 뽕 한 가마니 씩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냅다 날랐다. 낮에는 온 식구가 뽕나무 밭에 들어가 딱, 딱, 뽕 따는 일에 매달리고, 밤이면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 들으며 잠자고, 아침이면 온 몸에 까만 누에똥이 들러붙었다.

   엄마 아버지는 누에고치 바치는 날만 꺼억꺼억 기다렸고, 우리는 뽕나무에 오디가 열리기만

기다렸다.

   입술과 손이 새까맣게 돼도 자꾸 따먹게 되는 오디. 뽕나무에서 떨어지면 똥물을 먹어야 낫는다고

야단을 맞으면서도 따먹었다. 방귀가 뽕뽕, 뿡뿡 나와도, 뽕 내 맡은 누에가 되어도 좋았다.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 한복을 입으면 잠자리 날개처럼 날아갈 듯 사뿐해, 레드카펫 걷는

주인공이라도 된 양 기분이 붕 뜬다.

   오랜만에 수풀을 헤치고 들어온 산에서 만난 뽕나무 한 그루는 지붕처럼 가지를 뻗었다. 가지마다

뽕잎 사이사이로 빨갛고 까만 오디가 다닥다닥 달렸다. 금방 두 바가지나 땄다.

   이곳에서 바라본 코발트 빛 하늘과 무성한 밀림과 강렬한 태양은 아프리카다. 폭염과 신비로운

생태계가 존재하는 곳. 양서류 파충류 조류도 이 산 덤불 어디에서 거친 호흡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코코넛과 바오밥나무, 사랑의 나무라 불리는 요힘베나무가 뿌리를 박고, 사자와 기린과 코뿔소와

얼룩말과 원시인도 바삐 뛰어다닐 듯하다.

   나는 여기서 야생인이다. 태초로 돌아간 이브다. 세간의 물질 돈 자존심, 그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은

시간. 배고프면 열매 따먹고 졸리면 자고 무한한 자유인이다.

   밤이면 온갖 짐승과 새, 벌레, 나무와 풀과 꽃들의 속살거림이 나를 감전 시키고 별똥별은 더 많이

떨어지고 달빛도 휘영청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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