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정원] 다크 서클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LIFE

문학 | [문예정원] 다크 서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성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0-11 08:31 조회2,314회 댓글0건

본문

 

                                                                                                                  d1c95b58f15f3ddc86ace24b7d49f1bb_1570807843_1694.jpg정 성 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며칠 전부터 형광등을 켤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스위치를 올리면 한두 번 끔뻑거린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그러던 게 오늘은 아예 반응이 없다. 의자를 놓고 형광등을 떼어 보니 양쪽 끝이 거무스름하다. 백열등보다 느린 녀석이 제 긴 몸에 불을 당겨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크 서클’이 짙다.

  이젠 불을 끌어오지 못하지만, 일하는 내내 뜨거웠을 형광등의 몸체를 잠시라도 선선한 곳에 눕혀준다. 내가 형광등의 다크 서클을 예사로 봐 넘기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십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남편이 두어 달 걸리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그의 눈 밑부터 살폈다. 눈 밑이 맑고 깨끗할 때가 별로 없었다. 거무스름하거나 심할 때는 푸르죽죽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이만하면 미남이지.”라고 그는 얼버무렸다. 컨테이너이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배를 타고 있는 선원들은 일주일 만에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게 된다. 항해하는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시간을 전진시키거나 후진 시켜야 하니, 수면 시간과 식사 시간이 매일 바뀌어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배라는 것은 화물을 싣고 바다를 오갈 때만 운임이 산출되기에 바쁘게 움직인다. 아무리 기상 조건이 나빠도 정해진 날짜에 입항하고 출항해야 한다. 언젠가는 입항하자 마자 ‘선박 검사’를 받는 바람에 두 달 만에 보는 남편을 부산역 앞의 아리랑호텔 커피숍에서 겨우 한 시간 만나고 헤어진 적도 있다. 서로 얼굴 한 번 보고 시계 한 번 들여다보고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것은 그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다크 서클 뿐이었다. 

  땅을 디디며 살게 되면서 그의 다크 서클도 차츰 옅어져 갔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잠을 자고 제 때 집 밥을 먹은 덕택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다크 서클이 있었다.

  그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배에는 없었던 마누라도 옆에 누워있겠다 그가 편히 못 잘 이유가 없는데도 그랬다. 자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혹시 마누라 몰래 사채업자의 돈을 끌어다 쓰고 그들 로부터 갚으라는 협박을 받는 중이냐고 물었다. 아니면 우연히 지난날의 첫사랑을 만났는데 지지리도 고생하고 있어서 괴로워하는 중이냐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젠 수필 대신 소설을 쓰는 거요?”라고 했다. 

  그는 잠이 들면 다시 선장 업무를 보게 되는데, 승선 중에 일어났던 사고들이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항해 중에 선원 한 사람이 사라져 배 곳곳을 수색하며 억장이 무너졌던 일, 갓 입사한 갑판부 선원이 선체에 도색작업을 같이 하던 중 선창에 떨어져 죽은 일, 배에 적재되어 있던 컨테이너 박스에서 불이 나 일박 이일 동안 불을 껐던 일 등. 모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절체절명의 사고였다. 

  꿈이란 자신의 심리적 체험이 상영되는 내적 공간이다. 그 무렵에 놀란 신경 조직이 아직 아물지 못한 데다, 그 흔적에 잠재의식의 빛이 들어가 당시 상황이 재현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배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스무 명 남짓한 선원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그가 받은 고통과 자책감이 얼마나 컸을까. 

  소리와 진동에 예민한 것도 여전하다. 그가 잠들었다 싶어서 살며시 선풍기를 끄면 바로 깬다. 배의 엔진이 멈춘 줄 알았다면서 발칵 화를 낸다. 그도 힘들겠지만 그를 지켜보는 우리 집 선풍기와 나도 힘들다. 자다가 그가 지르는 고함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쇄시키기 위해 그의 몸이 터트리는 ‘에어백’이라고 생각하면 반갑게 들리려나. 

  평생 순탄하고 평온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마음속에 한 두 개의 다크 서클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짙고 옅음의 차이가 있을 뿐. 어쩌면 ‘다크 서클’이란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 받는 ‘확인 도장’ 같은 게 아닐지. 

 웬만해선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가끔 철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는 봐 주기로 했다. 그가 이전에 내 마음에 새겨 놓은 여러 개의 다크 서클들이 지금은 그를 지키는 ‘마패’가 되고 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5,754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