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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구월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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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0-18 09:20 조회1,8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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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92c73c0f20026d8f9199a425f8946d9_1571415604_2305.jpg정숙인 / 수필가(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일 년 동안 주어지는 삼백 육십 오일의 날들 가운데 손꼽힐 만한 중요한 날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커다란 활력과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는 저무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목놓아 부르며 애절해했지만 나는 구월의 마지막 날을 반드시 자축하며 기념하고 있다. 예쁘고 맛나 보이는 작은 케이크를 미리 봐두고 과일과 함께 포도주를 준비한다.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조용한 파티이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감사의 시간이다. 초에 불을 켜고 잔잔히 일렁이는 촛불을 보며 처음 맞이했던 그 쓸쓸하고도 외로웠던 구월의 마지막 날을 떠올려본다. 이십 오 년 전에 낯선 이국 밴쿠버 땅에 도착하여 귀에 들리는 알아들을 수 없던 언어들보다도 질적으로 확연히 다르던 대기의 공기는 나를 더욱 당황하게 하였다. 뺨에 생경하게 달라붙던 청량한 공기는 혼탁한 서울의 대기오염에 찌든채로 살아온 나를 무의식적으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훅하며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였다, 마치 깊은 물에 빠져 숨을 쉴 수 없는 사람처럼. 정말로 어느 지구 모퉁이 낯선 곳에 와버렸구나 싶어 호흡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빠져나가지 못할 바에는 이 곳에서 살아내야겠구나. 부옇게 동터오는 새벽을 마주하며 웅크리며 잠에 빠져들었었다. 이 곳에서 살아온 세월들이 어느 덧 모국에서 살았던 세월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어느 사이 시간은 흘러버려 간 곳이 없다. 걷다가 잠깐 뒤돌아본 것과 같다.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언제나처럼 은팔찌를 정성스레 닦았다. 캐나다행 비행기표가 결정되었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은붙이들을 한데 모아 어머니께 부탁드렸다. 한데 모아 은팔찌로 만들어달라면서. 한국을 떠나며 아끼던 것들이 추억의 팔찌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나와 희노애락을 함께 하고 있다. 어머니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적당히 두툼하면서 묵직한 무게가 나가는 은팔찌를 내게 건네주셨다. 나와 함께 이십 오 년의 세월을 부대낀 팔찌는 나의 분신과도 같다. 외출할 때는 늘 오른손목에 그것을 채우고 일을 보러 나간다. 깜박 잊고 그냥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렀다 나온 적도 여러 번 팔찌는 늘 나와 함께 다녔다. 팔찌가 손목에 있으면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게 엮임을 느낀다. 아무래도 아끼고 좋아하는 애장품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리라. 구월의 마지막 날은 생일보다도 더욱 뜻깊은 날이다. 사람은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는데 캐나다에 온 것이 두 번째 기회인 것 같다. 십 칠 년 후에 나는 세 번째 기회를 붙잡고 이렇게 매 주 혹은 이 주에 한 번씩 글을 쓰는 글쟁이로 살고 있다. 생에 찾아오는 좋은 기회는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물질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물질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해서 그것이 결코 좋은 기회는 아니라는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 기회라는 것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기회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뿐이며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한다. 구월의 마지막 날에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문득 내 인생의 기회가 세 번으로 끝났을지 더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요즘은 백세 시대라고 하니 세 번이 아니라 다섯쯤은 되지 않을까. 인생은 길고 할 일은 많으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많을 것이리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에 내가 만족하며 스스로 행복한 것을 찾아 느끼며 즐겁게 사는 것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나에게 걸맞는 좋은 기회를 거머쥔 행복한 사람임에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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