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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영어 | 리멤버런스데이에 생각하는 한국전 캐나다 베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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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재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1-11 16:38 조회1,8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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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에 일어난지 벌써 69년이다. 더불어 한국전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은 이민 많은 수가 이미 타계한 경우가 많다. 한국전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목숨을 바친 캐나다군은 어떤 마음으로 이억만리 머나먼 나라에서 피를 흘리며 희생했기때문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이민한지도 벌써 25년이 넘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지금도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노스코리아냐 사우스 코리아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에 더욱 몰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상황이라 캐나다의 경제적상황 또한 그리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한국전에 참가하게 된다. 

 

리멤버런스 데이/전재민


세상은 온통 천연색인데
비오는 날처럼
꿈속은 흑백이었어
흑백영화 상영하는
가설극장도 없는데
당신은
드라마 라시찬주연
전우처럼
칼빈 총 한 자루 들고
내게 다가왔지
어느 순간 내손에도
들려진 총을 들고 서면
각잡힌 국방백 바지위
내시선이 멈추고
자동반사로 들어 간
십육개 동작
아 캐나다 들녁에 핀
양귀비처럼
그날이 왔네.

 

Rememberance Day/Terry Jeon

The world is all natural color.
Like a rainy day
The dream was black and white.
black-and-white movies
We don't even have a theater of hypotheses.
You're.
Actor Ra Shchan
like one's comrades
Take a Calvin gun.
He came up to me.
at any moment in my life
He's holding a gun.
corrugated defense bag trouser
The endocrine glances stop.
automatic reflection
a dozen movements
Ah, open in the Canadian evening.
like a poppy
That's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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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군은 1950-1953년 한국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2만6천명의 캐나다인들이 유엔군으로 참가했고, 캐나다는 8척의 구축함을 보냈다. 또한 캐나다 공군의 항공기는 수송, 보급, 물류를 제공했다. 516명의 캐나다군인이 사망했고, 이 중 312명이 전투로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후, 캐나다 군대는 군사 참관인으로 3년 동안 한국에 머물게 된다.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배는 한반도의 일제 강점기의 35년의 종결을 가져오게된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했고, 남한은 38선 이하이며, 남한은 미국의 군대가 점령하게 된다.1945년 8월 10일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입했고, 몇 주 후에 인천을 통해 들어온 미군에 의해 남한은 미국이 접수한다. 비록 두 경쟁파들이 처음에 분단된 국가를 외교적으로 통일하려고 시도했지만, 북한은 결국 군사력으로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북한은 그들이 폭동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남한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북한이 군사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대를 증원했고, 중국 남북전쟁 때 만주 지역에서 싸우는 한국인 자원 봉사자들은 그들의 군대에게 전투 경험을 제공했다.북한은 며칠 안에 전쟁으로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조선인민군 부대가 38선을 넘어 내전이 시작됐다.

북한의 한국 침략은 유엔에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전쟁이 시작된 날, 유엔은 즉각 유엔 안보리 결의 82호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결의안 초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적대 행위금지와 북한이 38선까지 철수할 것.
유엔 한국 위원회는 상황을 감시하고 안보리에 보고하기 위해 설립될 예정이다.
유엔이 이를 달성하도록 지원하고, 북한 당국에 대한 지원을 자제할 것.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남한으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남한의 수도 서울은 일주일도 안되어 함락되었다.

 북한군은 전략적 목표이자 남한정부의 임시수도인 부산항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조선인민군은 한반도 끝에 있는 이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국 모두 정복했다. 전쟁은 북한이 거의 승리하는듯 했다. 이틀 만에 미국은 지원을 제안했고 유엔 안보리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캐나다, 미국, 호주, 영국,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필리핀, 에티오피아, 프랑스 등 16 나라가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군대를 파병했다.그리고 캐나다 육군이 개입했다.특수부대이다.당시 총참모장이었던 찰스 폴크스 중장은 캐나다가 제1연방사단에 보병여단을 제공하는 것에 찬성했다. 폴크스는 북아메리카 방어를 위해 캐나다 육군의 기동타격대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는 한국전쟁을 위해 별도의 특수부대를 모집할 것을 권고했다.

특전사 모집은 18개월 동안 현역,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그리고 청년들을 찾는 모험에서 온 신병들과 함께 지원되었다. 실제 싸울수 있는 특전사를 모집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채용 기준이 낮아졌습니다. 특수부대의 단위는 기존의 3개 영구군 연대 중 2개 대대가 되었다.1950년 8월 15일, 제2대대는 캐나다 라이트 보병(PPCLI) 내에 북한의 한국 침략에 대응하여 캐나다 육군 특수부대의 구성원으로 창설되었다. 새로운 대대는 한국전으로 떠나는 수송기에 탑승하기 전에 캘거리와 웨인라이트에서 훈련했다. 1950년 11월 25일 마르티네즈는 대한민국의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이 대대는 12월에 한국에 상륙하여 8주 동안 산악지대에서 훈련을 한 후 마침내 2월 6일 전쟁에 직접참가하여 미 8군 IX군단의 27대 영국 영연방 여단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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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찾을것 같았던 전선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에서부터 밀리고 밀려 거침없이 전선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 오게 되고 휴전회의를 할때쯤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찾기위해 밀고 밀리던 전선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평전투는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의 영연방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중공군과 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중공군의 춘계 총공세 때 발생했으며 제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중 하나인 가평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와 프린세스 페트리샤 캐나다 경보병 연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왕립포병여단이 이들을 지원했다.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지게 된다.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제2 보병여단은 호주군이 여단의 측면으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67고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공세의 주요 목표로 변경한다.하지만 격렬한 야간 전투에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가평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캐나다군과 호주군이 가평에서 보여준 전투는 중부 전선의 유엔사령부가 돌파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되었다.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격렬한 전투를 통해 막아 내는데 성공한다.중공군은 4월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 가평전투는 한국전쟁당시 캐나다군과 호주군이 가장 큰 공을 세운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캐나다 랭리에 이전쟁을 기념하는 가평석이 세워져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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