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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새벽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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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종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2-12 09:01 조회1,5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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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b71ba108dc3d78bcec103c08843e6_1576170127_7049.jpg전종하

  (사)한국문협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지난 5월에 외국인 직장 동료 두 명이 내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나와 함께 한국에 왔다. 나는 첫 3일을 서울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우리가 지내던 숙소는 명동역 뒤편 남산 아래에 있었다. 오후에 한국에 도착하여 첫날 저녁 식사를 명동 시내에서 하기 위해 거리에 나왔는데, 명동에 몰린 수많은 인파와 노점상들에 동료들은 많이 들떠 있었다.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명동에 종종 놀러 가곤 했지만, 저녁 시간에 돌아다녀 본 것은 나에게도 오랜만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도 명동의 거리는 화려한 조명 불빛 아래에서 흥겹게 춤추고 있었다.

한국에 방문 할 때마다 시차가 적응이 잘 안 되어 다음 날 아침은 새벽 4시면 눈이 떠진다. 새벽 시간에 주로 할 일이 없기에 동네에 있는 사우나를 찾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주변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먹는다. 명동에서 맞이했던 첫날 아침도 새벽에 눈이 떠졌다.

목욕탕에 가기 위해 이제 막 동이 튼 명동의 새벽 거리를 걷는데, 어제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명동 시내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길거리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전단들과 간간히 귀퉁이에 보이는 구토물들 그리고 그것들을 조용히 정리하고 계시는 환경미화원 어르신들과 상점의 유리창을 닦고 계시는 어머님들이 보였다. 한쪽에서는 상점의 간판을 교체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 정장을 입은 젊은 청년이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에너지는 사라지고, 고요함 속에 빗자루 소리만 쓸쓸하게 들려왔다. 그날 새벽 명동의 냄새는 밤새 술 마시고 들어 온 철없는 아들의 아침상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사랑의 냄새와 같았다.

난 새벽을 좋아한다. 특히 새벽이 좋은 이유는 그 시간에만 맡을 수 있는 특별한 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새벽은 각기 다른 냄새로 우리의 하루를 시작해준다.

시장에서 도매업을 하시던 우리 부모님은 5일 장이 열리던 날이면 새벽 4시에 시장에 나가서 가게 문을 여셨다. 오일장이 있던 날이면 나와 내 동생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시장 한 쪽에 있는 백반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어릴 적 나에게 새벽은 구수한 된장 냄새였고, 옆 테이블에서 새벽 장을 마치시고 모여 앉아 아침상에 대포 한잔을 걸치는 상인들의 막걸리 냄새였다.

나는 충남 공주에 있는 육군 향토사단의 본부에서 군 생활을 하였다. 내가 있던 부대는 17개의 직할대가 모여있는 사단 사령부였는데, 그 안에 종교 활동을 위한 교회가 있었다. 군 교회에서는 매일 아침 새벽 예배가 있었는데, 주로 군 간부들과 가족들이 참여하였다. 내가 병장으로 진급하던 해에 우리 부대에 새로 오신 본부 대장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병사들도 새벽 예배에 갈 수 있게 해달라는 나의 건의에 본부 대장님은 부대 기상 시간인 새벽 6시 이전에 부대에 돌아오는 조건으로 허락해주셨다.

그 이후 부대 내 기독교인 병사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5시 50분까지 부대에 복귀하였다. 나의 가장 건강했던 20대 초반 청춘의 새벽은, 다시 사회에 나가 복학을 하고 캐나다로 돌아오게 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힘든 군 생활이었지만, 그 시절 나의 새벽은 땀 냄새가 아닌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냄새였다.

군 제대 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다시 학교에 복학 했을 때, 나는 학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통학하였다. 아침 시간 지하철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붐비는 사람들을 피하고자 나는 항상 5시에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등교를 하였다. 비교적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의 캠퍼스의 도서관은 밤새워 공부하던 학생들이 피곤함에 지쳐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하루에 한 편씩 짧은 글을 쓰면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나의 학창 시절의 새벽은 감성의 냄새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난 새벽이 좋다. 새벽은 매일 매일 다른 냄새로 내게 찾아왔다. 때론 고국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의 상쾌함의 향기였고, 때론 새벽을 깨워 기도하던 절실함이었다. 때론 달콤한 숙면의 시간이었고, 때론 좌절의 술에 절어 있던 어제의 연장이었지만, 나의 새벽은 대부분 뜨거운 열정이었고, 하루를 위한 기대였으며, 어제의 땀을 닦아주던 시원한 바람이었다.

10년 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인생 시계”라는 개념이 나온다. 지금 자신의 나이를 하루의 24시간에 비교하여 지금 내 나이가 몇 시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인생을 80년으로 잡고 시간을 계산하였을 때 1년은 18분과 같아서 스무 살은 오전 6시 그리고 서른 살은 오전 9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은 이 계산법이 조금 바뀌어 스물다섯이 오전 9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의 인생 시계의 새벽 시간에 나는 어떠한 새벽을 살아왔을까 생각해본다. 가장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가던 20대 초반의 나는, 홀로 유학을 하면서 지독하게 외로웠지만, 그래도 뭐든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새벽을 깨우던 청년이었다.

이제 새벽을 깨워 아침을 맞이한 나는 지금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오후에는 어떤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본다. 뜨거운 열정에 잘 익어 구수한 냄새를 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매일 매일 새벽을 깨워 상쾌한 새벽이슬에 어제의 피로를 씻어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의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는 새벽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있어 주는 그럼, 사람이 되고 싶다. 새벽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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