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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첫 눈 오면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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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2-19 16:26 조회1,7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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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f3239198951ab3afb50651acd58d0d_1576801586_0917.jpg정숙인/수필가.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회원


 

 

처음이라는 낱말이 갖는 매력은 신기하리만치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거기에 빠져드는 사람은 헤어날 줄 모르고 그 처음인 것과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밀회를 즐긴다. 그 상대가 무엇이건간에 무조건 매달리며 그와의 인연이 끝날 때까지 끝까지 가보게 된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어느 깊은 가을 날, 나는 넓은 창이 커다랗게 한 쪽 벽면 전부를 차지한 카페에서 지인들과 차를 나누고 있었다. 거리 풍경과 하늘까지 훤히 보이는 카페의 통유리 안에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게 된다면 각 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해서 갑자기 제안한 거였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에도 그들은 오롯이 개인의 자유를 다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학생으로 돌아간 듯 싶었던 그들은 제각각 엄마이자 아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분주히 보내져오는 문자와 벨소리에 충실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한때는 소녀시절을 거쳐 맨얼굴 만으로도 충분히 고왔던 여학생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아직도 충분히 창 밖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시몬, 너는 아는가 낙엽밟는 소리를’ 하며 싯구를 읊는다하여도 꽤나 어울릴 만한 고상한 연륜들이 묻어 있었다.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만 보아도 깔깔거리며 웃던 여리고 순수했던 여학생들이 인고와 풍상의 세월을 거쳐 아름답게 한 줄 두 줄 피어난 주름과 동무가 되어 이제는 넉넉한 삶의 부피를 담아 배려있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 첫 눈 오는 날, 여기서 무조건 만나기로 해요.” 느닷없는 나의 제안에 감성깊은 4050 세대는 탄성을 지르며 다들 좋아하였다. 첫 눈 오는 날에 갈 수 있는 곳이 생겨서 너무나 좋다고 했다. 이제까지 결혼하고 살아오며 해마다 첫 눈을 보고 맞이했을텐데 뜻밖에도 첫 눈 오는 날의 데이트가 처음인 사람들이 많았다. 이 안타까운 여인들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반성할지어다. 아들이든 남편이든 딸이든 간에 엄마를 위하여 아내를 위하여 누구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쯤 첫 눈이 오는 날에는 밖으로 불러내 데이트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드디어 약속한 첫 눈이 점심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펑펑내리는 굵은 함박눈은 아니어도 그래도 첫 눈이라 이름붙일만한 눈이었다. 간밤에 내린 눈까지 합쳐 족히 오 센티미터는 넘게 쌓였다. 그렇게해서 만나기로 한 그 장소에 가보니 뜻밖에도 절반의 인원만 와있었다. 애완동물의 먹이를 챙겨야해서 어떤 이는 일하느라 다른 이는 집안 행사가 있어서 또 다른 이는 아이들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했다. 첫 눈 오는 날의 데이트를 제안했던 나는 약속을 지킨 그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워 맛있는 차를 사주었다.

 

런던포그라는 적당히 달고 적당히 향기로운 뜨거운 차를 천천히 들이키며 넓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첫 눈은 딱 그쳐 있었고 더이상 오지 않았다. ‘그렇겠지. 삶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절대로 딱딱 들어 맞는것이 아니야.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계획대로 삶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고루하겠어.’

 

조용한 겨울의 밤거리를 내다보며 나쁘지 않은 생각들이 일렁였다. 앙증맞은 크리스마스 꼬마 전구들이 가로수마다 장식되어 별처럼 반짝이고 거기서 흘러나온 따뜻한 불빛이 내게 다가와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주었다. 비록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어둠이 내린 시간에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거리 풍경을 감상하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그저 앉아만 있어도 좋았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창 밖을 응시한 채 전구 불빛에 비친 거리에 쌓인 눈의 반짝임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첫 눈 오는 날에는 첫사랑을 얘기하는 거래요.” 피부가 하얘서 달님을 닮은 지인이 예쁘게 웃으며 제안을 했다. ‘그래,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내게 무엇을 남겨놓았나.’ 첫 눈이 오는 날 까맣게 지워진 첫사랑을 떠올리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의 기억처럼 온통 까만 하늘은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후, 괜찮네!’ 첫 눈 내린 날이 썩 괜찮게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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