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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전재민의 밴쿠버 편지>새해 첫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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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재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1-01 19:53 조회1,3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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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마다 비가 오더니 새해라고 비도 그치고 화창한 날씨가 짠하고 나타났다. 아침에 해돋이를 찍으려고 높은 주차장 옥상에 올라갔더니 해가 구름에 가려 해를 볼 수가 없었다. 뭐 전에도 신정은 그냥 노는 날뿐이었지만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하면서 사실 구정이나 신정이나 별로 차이도 없다.차례를 지내면 차례라도 지내야 하니 명절기분이 났지만 구정에도 스케줄에 새벽부터 일하러 가는 일이 많다보니 그냥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성장한 아들이 차례에 대해서 이해하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차례를 이어줄것 같지도 않으니 아예 형편에 맞게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물론 차례만 없어진 것이 아니다. 새해가 되면 새옷을 사입지 못하면 새 양말이라도사서 신고 차례를 지내고 나면 부모님께 큰 절을 하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다니던 그 아주 아득한 추억은 이미 한국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는 듯 하다. 그저 아는 지인 몇분 찾아 가서 세배를 올리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이웃에 누가 사는 줄도 모르는 신세대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점점 우리의 풍속도 사라져 간다.명절 한참 전부터 쌀을 불려서 떡방앗간에 그릇을 죽 늘어 놓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가래떡을 뽑아 오면 그 말랑한 떡가래 하나를 잡고 명절을 입으로 먼저 들이 밀었던 추억. 전도 부처야지 나물도 해야지 탕거리도 준비해야지 명절이면 늘 바빴던 어머니는 불때서 가마솥에 밥하던 그 많은 날에도 석유곤로에 찌개를 끓이던 때도 바빠서 늘 준비하다 늦게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또 준비하고... 저걸 어떤 며느리가 들어와서 저리 할까?하는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절에도 일하는 직업을 가진 남편 탓에 쌍둥이 엄마라는 탓에 결혼하고도 명절에 못내려 가는 경우가 다반서였다. 그러다 이민을 왔으니 아내는 우리집에서 제사나 차례지내는 형식이 친정과 틀리다고 형식에 안맞는다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지방도 안쓰고 하는 제사도 있냐고 그러고 보면 드라마에서도 지방을 다 쓰던데 우리집은 지방도 쓰지 않았다. 지금와서 돌아 가신 부모님들께 물어 볼 수도 없고 차례조차 지내지 않기로 한 마당에 생각하면 뭣하나 하는 생각만 든다.

 

 그래도 그때와 비교하면 풍족한 편인 지금이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그때보다 더 심한 것같다. 요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흙수저를 불가촉천민으로 부르는 것같다. 드라마에서 얼핏보니 그렇게 나온다. 대부분이 흙수저인 세상에서 점점 스스로가 땅으로 꺼지려고만 하는 것같다. 난 고시준비를 해보진 않았지만 옛날엔 가정형편이 불우한 가정에서도 머리가 좋아서 공부해서 판 검사의 길로 가는 것은 고시밖에 없었다.법학전문대학원제도를 만들면서 그만큼 서민들에겐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과외를 하는 애들이 성적이 좋은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지만 우리때만 해도 지방고등학교에서도 서울대를 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실태는 지방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방고나와서 지방대 나오면 스팩이 아주 밀려서 취업 서류조차 내지 못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 한국의 사정을 모르는 아들은 때로 왜 이민왔냐고 한다. 능력이 없으면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고도 한다.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린다.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더 잘해주고 싶은게 부모 마음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이라도 이해해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때가 있었다. 그길로 집을 나가서 객지생활이 시작되긴했지만 집을 떠나자 마자 부모님의 고마움은 더욱 사무쳤었다. 

 

 이민와서 한국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때도 고국에 돌아 가지 못하면 게리포인트 공원에 명절이면 성묘를 하듯이 들리곤 했었다. 조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리치몬드 앞바다를 보면서 부모님을 두고 온 죄스러움과 고향친구를 그리는 마음 어릴적 명절의 추억들을 곱씹어 보곤했다. 달력조차 흙벽돌을 쌓아서 만든 벽에 몇겹의 벽지를 바른 벽에 국회의원 아무개의 사진이 가운데 대문짝만하게 박힌 12달이 조그만 글씨로 새겨진 달려을 붙여 놓고 그나마 달력이 있다고 흐믓이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술집에 걸린 반 나의 여자 모델 사진과 맥주나 소주광고가 휘날리던 그때는 막걸리 항아리에 물을 두어바가지 타서 주전자에 담아 주던 시절이었지만 그런 막걸리에 취해 행복을 먹던 시절이었다. 비록 냉장고조차 없고 가스렌지도 없어서 된장과 고추장, 김치가 늘 반찬으로 올라 오고 명절이나 생일 제사나 되어야 특별한 반찬이 올라 오던 그시절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다른 집은 냉동고가 몇개야... 다른 집엔 몇백불하는 밥솥도 있는데 우린 없다. 뭐 이렇게 비교를 하다보면 금새 불행이 밀려온다. 난 비교하기 싫어도 주변상황이 비교를 하는 경우도 많다. 모두가 가스렌지가 없으니 산에 나무하러 가고 소꼴을 베고 해도 행복했다.어머니와 산에서 나무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해 놓은 나무조차 아버지가 지고 오지 않아 끌고 내려 오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초 겨울에 배추싣고 배추팔러 가면서도 엄마가 힘이 달려 밀리 못해 리어커가 뒤로 밀리면 아버지를 원망하긴 했다. 함께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왜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 보다 돈을 못벌어 오냐고 불평한 적은 없다. 철도공무원인 친구아버지나 대한통운에 다니던 친구아버지나 아버지보다 돈을 더 벌었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내가 커서 돈을 벌면 된다고 다짐하고는 했었다. 명절에 돌아 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가슴에서 꺼내서 대화를 한다. 고향을 꺼내서 대화를 한다. 망향동산같은 게리포인트 파크에 밀려드는 사람들 틈에 서서 그 사람들도 고향을 그리워 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혼자 생각해 본다. 저쪽에 보이는 섬은 밴쿠버 아일랜드와 사이에 있는 섬들인데 왠지 손에 닿을 것만 같은 조국에 두고 온 친구들이 명절인데 뭐하냐고 막걸리 한 잔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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