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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구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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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민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1-03 09:18 조회1,4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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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d51cf79221d72e831cc89553c031a89_1578071919_6028.jpg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동장군이 때려눕힌 강 한 마리가 뻣뻣하게 기절한 채 뉴스화면 가득 널브러져 있다.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는 위력만으로도 장군의 작위가 무색치 않겠다. 쇄빙선에 올라탄 포클레인이 사마귀 같은 턱을 주억거리며 희푸른 살점을 물어뜯어 보지만 군데군데 생채기나 낼 뿐 의식 잃은 강을 핥아줄 때까지, 강은 죽은 척,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골목 어귀마다 한뎃잠을 자다 얼어 죽은 물들이 자주 눈에 띈다. 웅덩이 같은 데서 대책 없이 미적거리던 물도 기습적 한파에 얻어맞았는지 갈비뼈가 와장창 부서져나가 있다. 세상만물 중 가장 추위를 타는 게 물이라는 사실을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알았다. 영하로 떨어지면 가장 먼저 얼어 죽는 게 물이다. 지표에 닿은 빗물이 서둘러 땅속으로 스미는 것도,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바다로 도망치는 것도 겨울의 소리 없는 은빛 테러를 피하고 싶어서 일지 모른다.

 

 텔레비전을 끄고 구석진 내 방에 들어와 앉는다. 찻상을 마주하고 책장 기둥에 등을 기대면 하루가 편안하게 부려진다.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넣고 반가부좌 자세로 눈을 감는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피신해온 포트 안의 물이 씨울씨울 다급한 소리를 낸다. 불꽃도 없는 불이 물의 방둥이를 후려치는지 와글와글 소리가 장대처럼 높아진다. 천정을 뚫을 듯 요란하던 물소리가 어느 순간 뚝, 거짓말처럼 그친다.

 

 간택을 기다리는 규수들 모양 도열해 있는 다완들을 둘러본다. 지난해 차실을 없앤 뒤 오갈 데 없어진 차 살림들을 서재 한 귀퉁이에 모아들였는데 서재 아래쪽 두 칸을 옹색하게 차지한 게 찻사발들이다. 말차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차보다는 찻그릇이 좋아서였지만 보이차나 황차를 주로 마시던 요즘엔 이천댁도 문경댁도 뒷방아씨 신세다. 허허실실 총애를 다투던 것도 한 때, 시간의 뒷발질에 수굿해진 탓인지 사이 좋게 물러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고들 있다.

 

 맞은편 반다지 위, 다완 하나가 놓여 있는 풍경은 언제 봐도 고즈넉하다. 그릇 하나가 놓임으로써 벽의 표정이 그윽해지는 것은 정물 자체의 형태보다는 그것이 풍겨내는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마이센 차 주전자나 르크루제 냄비를 놓아둔다 해서 그런 맛이 날 리 없지 않은가. 미색이 출중하거나 교태를 부리지 않아도 분위기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미적 충만감을 주는, 섹시하다는 말도 그런 뜻 아닐까. 멀찌가니 물러놓고 바라보다가 가까이서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싶어서, 밥그릇이나 국대접이 되지 못해도 함께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 사랑도 그렇게 시작되지 않던가. 불용不用의 미학, 불가해한 공간의 현상학이다.

 

 입술이 얇고 살빛이 은은한, ㅎ선생의 평다완을 찻상 위에 데려와 앉혔다. 구충암 황차나 마셔볼까 했는데 찻사발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다. 가마를 열 때 선생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던, 아끼는 기물을 빼앗다시피 들고 와 너무 오래 홀대하기도 했다. 뜨거운 물로 예열을 하고 차건으로 가만가만 물기를 닦는다. 새로 개봉한 가루 녹차를 대나무 차시로 두 번 덜어 담고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 넣는다. 차선을 재빨리 휘저으며 가벼운 손놀림으로 격불擊拂을 하면 물과 차가 한 몸으로 휘돌며 미세한 거품으로 어우러진다. 코끝으로 훅, 끼쳐 드는 연둣빛 향기를 눈과 코가 먼저 흠향하면 말차는 거지 반 마신 셈이다. 두 손으로 찻사발을 받쳐 들고 부드럽고 폭신한 거품차 한 잔을 세 번쯤 에 나누어 천천히 마신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뜨겁고 향기로운 초록구름 한 채를 내 안으로 정중히 모셔 들이는, 이 정신의 사치가 좋다.

 

 서재 한 귀퉁이, 한 평도 안 되는 찻자리지만 이곳에 내겐 우주의 배꼽이다. 일상의 정좌처靜坐處다. 핑핑 도는 세상의 한가운데 태풍의 눈 같은 고요의 터에 앉아 찻물을 끓이고 음악을 듣는다. 정신과 육신이, 안과 밖이 포개진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오롯한 실존, 시간은 공간으로 스며들고 나는 내게로 돌아간다.

 

 다 마신 첫 사발을 열탕으로 헹구고 차건으로 닦아 제자리에 넣는다. 뜨거운 회오리를 품었다 비워낸 사발의 안색이 간밤, 사내 다녀간 과수댁 낯꽃처럼 화사하게 빛이 난다. 사랑받는 것들은 때깔이 다른 법, 자주 눈 맞추고 온기를 불어주어야 살갗에도 광채가 살아 보인다. 후미진 응달에 더 퍼 질러 있다 가는 영혼에도 검버섯이 돋고 말 거라고, 바람이 덜컹, 으름장을 놓으며 간다. 구석에 돌아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쓸쓸하고 시무룩한 준재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끄덕끄덕 졸고 있는 내 안의 비만고양이에게, 객쩍은 말이라도 붙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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