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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까치 설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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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영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1-24 10:14 조회2,1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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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7fb17f304f08b80f39696f6d57c14e_1579889642_1152.jpg윤영인(화가,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회원) 

 

누가 나에게 빨간 스웨터에 모직 체크바지 누비 오바를 입혀 이 새벽길을 걷게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흔들리는 내몸을 그대로 두었을 뿐인데 새벽길을 한 손은 할머니 한 손은 큰 언니에게 꼬옥 쥐게 내주었다. 털모자와 목도리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눈만 보이게 했지만 그 눈도 감은 채 골목을 지나 조금 넓은 길 다시 골목길을 반복하다 보니 낯이 익은 곳에 서 있었다. 아직도 게슴츠레한 나는 손에 이끌려 문을 바로 밀고 들어가 몇 장의 표를 사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초시계를 재고 있는 듯 빠르게 옷을 나무옷장 위칸에 넣었다. 그리고 열쇠에 달린 번호를 확인하고 서둘러 여탕의 문을 열면 하얀 김들이 나를 반긴다. 

 

비누칠을 하고는 물로 한번 끼얹고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왜 이렇게 따뜻함을 넘어 뜨겁게 했는지...... 그 물이 뜨거워도 모두 설날 아침이 되기 전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분주했다. 그때 찬물을 틀었다가 어른들의 흘깃 보는 눈빛과 한 할머니의 미소를 보고 난 후엔 뜨거워도 참고 조금 식을라치면 뜨거운 물을 틀며 흡족해 하는 지금 내 또래의 아줌마들을 그대로 바라보고 나는 발만 담구고 나오곤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탕에 안 들어가도 손과 발이 따끈하다. 그때 할머니와 큰 언니 중의 한사람이 나를 앞에 앉히고 갈색피부를 하얗게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로 연두색 때수건을 잡는다. 한번 그 수건이 내팔에 닿으면 난 몸을 비틀고 다시 반대로 돌린다. 눈으로 으름짱을 놓아도 회유의 말로 달달한 요구르트를 연상해봐도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은 계속된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당연하게 해 주셨겠지만 언니라면 아마 막내로 태어났으면 했을 것 같다. 나와는 6살의 나이차이는 있었지만 언니도 많지 않은 나이에 나를 보송하게 만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언니와 나는 비누를 풀어 거품놀이를 하는등 장난치기에 바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다 끝났네. 머리를 곱게 빗고 거울을 보며 로션을 바르니 어이 이리 예쁜지 그 뜨거움을 받은 볼은 온통 빨갛게 여물어서 사과 빛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사과를 달고 목욕탕 문을 나서는데 어느새 밖은 아침이 되고 있었다.       

 

언니는 작은 대야를 옆구리에 끼고도 잘도 걸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컸을 때는 알록달록하고 멋진 가방이 많아 그곳에 넣고 다녀서 지금까지 해 본적은 없다. 

 

젖은 머리를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온통 싸준 덕분에 나는 무사히 집으로 와 따뜻한 할머니의 아랫목을 차지하고 몸을 녹였다. 얼었던 몸이 따뜻해질때면 며칠전 방앗간에서 길게 뽑아서 썰어두었던 떡을 귀한 소고기 국물에 넣는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건너방으로 구수하고 맛있는 국물의 내음을 타고 나에게 전해진다. 그때쯤 나는 일 년에 한번 입는 새옷을 서둘러 입어야 했다. 떡국이 불기 전에 그렇게 새벽공기를 받아 설날 아침을 맞았다. 

 

계속 내 옆에 있어 주실 것만 같았던 할머니, 우리 남매들도 혼인을 해서 멀리들 사니 그 때 넓은 교자상에 둘러 앉아 떡국을 먹던 생각이 쌀쌀한 날씨에 더욱 더 가족들이 보고 싶어진다. 그대로 모두 앉아 따뜻하고 귀했던 소고기 떡국을 먹어 보고 싶다. 그 순간이 흑백 사진처럼 설날 한쪽 벽면에 남아있다. 

 

이제는 우리들 집에도 몇 개씩 있는 여러 모양의 욕조들 얼마든지 식사는 물론 편리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막 걸음마를 뗀 아장아장 아이부터 나이드신 분들의 취향도 고려하여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 많지만 그 때의 소란스럽게까지 느껴졌던 북적거림은 아직 저 멀리 산 뒤의 마을에라도 남아 있을런지...... 

 

오고 감도 먼 옛이야기인 듯하다. 어릴적 설날의 새벽에 설날 아침을 위한 그 뜨거운 의식이 이맘때가 되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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