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건너 글동네] 천년 전의 삶의 무게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LIFE

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천년 전의 삶의 무게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 완 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2-06 09:09 조회2,150회 댓글0건

본문

 

3232c6cc1adb7af39fcd7db6ae045816_1581008941_9803.jpg민 완 기 

(사)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1연)

 

천 년 전, 이름 없이 살아가는 무지랭이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시름에 잠겨 살아갔을까? 상황을 구체적으로 한번 설정해 보자. 때는 고려 후기, 내부적으로 권문세가와 신흥 사대부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밖으로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쿠빌라이 칸이 세운 원나라가 쇠하며 주원장이 남경에서 세운 명이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가고 있을 때다. 극심한 나라 안팎의 정치적 혼란과 날로 더해가는 외적의 약탈, 거기에 더해 가뭄까지 겹쳐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식솔을 책임지고 있는 한 ‘가장’의 심사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그는  그저 훌쩍 이 현실을 떠나고 싶었을 게다. 집도 밭떼기도 다 버리고 청산에 들어가 그저 산머루, 산다래 따 먹으며 세상과 등지고 살고 싶었을 게다. 어쩌면 가족과도 뿔뿔이 헤어져 살아야하는 최악의 상황이 더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슴 찢기는 슬픔과 삶의 절망 가운데에서 그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

 

 

그러면 매연 마지막 행에 등장하는 듣기 요상한 후렴구는 무엇일까? 슬픈 정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 구절은 아마도 휘감겨오는 슬픔을 떼어내기 위한 필사적인 주문은 아닐까? 만약에 후렴구가 상여가 나갈 때처럼 낮고 처량했다면 아마 그는 8연의 이 노래를 끝을 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진하고 말았으리라.

 

청산에 들어와 그는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까? 천만에, 그 곳엔 지독한 외로움과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처절한 고독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느 샌가 떠나온 자신을 후회하고, 힘들어도 오손도손 함께 살던 자신의 옛 초가와 밭떼기를 산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본다.

 

 가던새 가던새 본다 믈아래 가던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청산별곡 3연)

 

‘가던새’는 ‘갈던 사래밭’의 의미이고 ‘잉무든 장글란’은 쓰지 않아 ‘이끼 묻은(녹슨) 쟁기’를 뜻하니 청산 위에서 저 물 아래 있는 자신이 농사짓고 살던 집과 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미련에 잠겨있는 한 사나이의 얼굴이 삼삼히 그려지는 듯도 싶다. 그러면서도 천년 전 그 사나이의 얼굴이 지금 나의 얼굴과 몹시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만 무릎을 치게 된다. 노래의 생명이 이토록 길고 질긴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천 년 전의 사람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나 ‘행복’과 ‘이상향’을 추구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천 년 전의 노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공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우리도 너무 먼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청산별곡’의 주인공은 청산을 떠나 바다로 향하지만 그곳에도 그가 찾는 삶의 안식과 행복은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유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정처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행복을 어디서 구할까? 천 년 전 기댈 곳 없는 힘없는 백성의 구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청산별곡’의 마지막 연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행복의 의미를 찾아본다.

 

 

 가다니 배부른 독에 설진 강술을 빚는구나

조롱박꽃 누룩술이 매와 잡사와니 어찌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8연)

 

길을 가다가 배가 불룩한 술독에 농도가 아주 센 술을 빚는 모습을 보고, “저 누룩 내음이 나를 강렬하게 붙잡으니 내 안마시고 어찌 하리까“하며 술을 통해 세상 근심과 시름을 벗어나보려는 현실 도피적 모습에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그저 잠시나마 벗어보려는 천 년 전 힘없는 ‘가장’의 한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듯도 하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1,071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