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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서쪽으로 난 창] 서쪽 하늘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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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3-06 09:23 조회1,9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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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ed6c96002f5a13dd8b700ce8655ba72_1583515411_0473.jpg박지향/시인 화가 

 

내가 일하고 있는 리타이어먼트 홈 2층에는 넓은 다이닝룸이 있다. 서향인 이곳은 벽 전체가 커다란 통유리문으로 되어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리문밖 패티오에는 새빨간 제라늄이 각양 각색의 작은 꽃들과 어우러져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진다.  유리문 안쪽엔 검정색의 대형 그랜드피아노가 놓여있고 그 앞으로 원형 테이블이 두줄로 나란히 놓여 있다.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벚꽃이 피는 아침도, 하늘하늘 꽃잎이 지는  봄밤도 참 좋다. 그러나 늦여름의 황혼은 그 중 최고라 하겠다

지난해, 여름이 가을로 옮겨가던 날이었다.  아침에 소나기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더니 해질녘 서쪽하늘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수백만송이 연분홍 장미 꽃잎을 따다가 아낌없이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은은한 회색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연 분홍빛 꽃잎을 점점이 그려 넣은 듯 신비스러운 석양이었다. 넓디넓은 창으로 넘어온 노을은 노인들의 은빛 머리카락이며 파란색, 회색, 갈색 눈동자를 모두 장미 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누구 한사람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한번의 붓질로 소리 없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시는 창조주 앞에 엎드린 순간이었다. 노을을 등지고 앉은 사람은 등지고 앉은 채로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마주 앉은 채로 조용히 저녁식사를 했다. 

 

접시에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 거의 모든 분들이 고기한점 입에 넣고 노을 한번 바라보고 당근 한 조각 입에 넣고 노을 한번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아쉽게도 노을은 오래 머물러 주지 않았다. 어둠이 몰려와 천천히 노을을 밀어내고 하늘에는 하나 둘 별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조용히 식사를 마친 분들이 느릿느릿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87세의 할머니 이디스가 창가에 놓인 잘 닦아 반짝거리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굽어진 등허리, 시력과 청력도 좋지 않아서 근래 들어 피아노 앞에 앉는 날이 잘 없었다. 그렇지만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가녀린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위에만 올라서면 마법에 라도 걸린 듯 춤을 춘다. 연주가 시작되자 방으로 돌아가시던 할머니 몇 분이 피아노 옆으로 모여들었다. 서로의 어깨를 안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여름은 가고 장미는 시들었군요. 

당신은 가야하고 나는 기다려야 하군요. 

꽃들이 시들어 가면 언젠가 당신이 돌아오겠죠. 

그리고 난 싸늘히 죽어 있겠죠. 

저 초원에 여름이 오면 당신이 돌아와 줄까? 

계곡이 숨을 죽이고 눈으로 뒤덮일 때면 돌아와 줄까…

오 대니 보이, 오 대니 보이 난 당신을 사랑해요

”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였다. 끊어질 듯 이어져 가는 가냘픈 할머니들의 합창 소리가 노을 진 하늘을 날아올라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세월이 파 놓은 할머니들의 얼굴위에 난 깊은 골짜기로 굵은 눈물 방울이 흘려 내렸다. 감동 그 자체였다. 현란한 기교도, 화려한 장식도 무대도 필요치 않았다. 한번에 한걸음 씩 걸어온 세월처럼, 꾸밈없고 성실한 목소리 하나로 충분했다.  이디스 할머니만 빼고 모두 혼자가 되신 분들이었다. 소피아, 로즈, 에블린, 로레인, 그녀 들에게도 스무 살이 있었고, 그녀 들에게도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그러나 오월의 장미처럼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은 가고 사랑했던 이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이제는 병든 육신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외엔 특별히 기대하는 것도 신날 일도 없다. 서로 기대고 위로하며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디스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이였다. 같은 학교 수학 선생님이셨던 잭을 만나 25살에 결혼했다.  원하던 자식은 끝내 갖지 못했지만 한쪽 눈을 잃은 골든 리트리버를 입양해서 자식처럼 사랑을 쏟으며 사셨다. 13년을 함께 살아 정이 들대로 들었던 개를 잃었을 때 아프고 우울했던 시기를 빼고는 62년을 큰 다툼없이 서로만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았다. 젊은 시절의 부부는 산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등산을 가고 주중에도 틈만 나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셨다. 

 

요리를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하셨다.  할아버지의 비프스튜맛을 보지 않고는 비프스튜를 논하지 말라며 자랑하는 할머니 이디스는 사랑스러울 지경이다. 날마다 최고의 요리라고 칭찬받는 기분을 아느냐고 물으시는 할아버지 잭 또한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분이셨다. 은퇴를 하신 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부터 산은 바라만 보는 대상이 되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온 부부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함께 하지는 않았다. 같이 있을 때는 영화를 보거나 체스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각자의 공간에서 할아버지는 독서를 하거나 목공예품을 만드셨고, 할머니는 뜨개질을 하시며 몇 시간씩 기나긴 음악 감상을 하셨다.

 

 이렇듯 한 공간에서 서로의 공간을 인정하는 아름다운 균형을 유지하며 오랜 시간을 걸어오셨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수평을 이룬 천칭처럼… 

7년전 이곳에 입주하였고 6년을 함께 살았다. 3살이 많으신 할아버지께서는 파킨슨병을 앓으셨다.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한 지난해 초에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롱텀 캐어홈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신 후 건강이 급작스레 나빠 지셨다. 식사량도 많이 줄어 당연히 체력도 약해지셨지만 목요일에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신다. 제일 먼저 미용실에 들러 머리부터 단장하신다. 그날은 정성스레 화장도 하고 예쁜 옷으로 차려 입고 길을 나선다. 비가오나 눈이 오나 한번도 빠짐없이 찾아 가신다. 만나서 뭐 하시냐고 물으면 밥 같이 먹고 오신 단다.

 

 온몸의 근육이 굳어가는 할아버지와 시력과 청력을 잃어가는 할머니가 만나서 식사를 하시는 거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할머니의 커피잔에 설탕과 크림을 넣고 저어 주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할아버지 앞에 밀어주었을 것이다. 같이 계시던 동안은 식사시간이면 늘 그렇게 서로를 챙기셨다. 식사가 끝나면 할머니가 먼저 일어나서 옆에 세워 둔 워커를 가져다주셨다. 워커를 밀고가는 키 큰 할아버지가 휘어진 등으로 인해 작은 키가 더 작아진 할머니와 나란히 걸어 가셨다.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이었으므로 한참을 걸어 가셔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걸어가는 두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참 좋았다.

 

 

오늘은 목요일, 새벽부터 세찬 빗줄기가 창을 두드린다.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오후엔 비가 그친 단다. 서쪽 하늘 가득 연 분홍빛 노을이 펼쳐질 것이다. 그럴 거라 믿고 싶다. 매주 만나도 매번 설레고, 만남이 거듭 될수록 더 애틋하다는 할머니 이디스가 할아버지 잭을 만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혹여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어 차마 한번에 돌아서지 못하는 노부부를 노을이 내려와 안아 주리라. 그들의 허전한 등허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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