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건너 글동네] 나의 사랑하는 아치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Vancouver
Temp Max: 7.57°C
Temp Min: 4.11°C


LIFE

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나의 사랑하는 아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춘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3-12 13:44 조회1,634회 댓글0건

본문

2beda4576d2bedd75253b0842ffb1653_1584045875_045.jpg김춘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아치(Archie)야, 나가자! 오늘 아침도 계단 위에 자리 잡고 늘어져 있는 녀석을 반 강제로 일으켜 세워 산책길로 나선다. 작년만 해도 나가자 하기가 무섭게 이리 저리 뛰면서 좋아라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눈에 띄게 게을러져서 내가 목걸이를 걸어 주며 나가자 달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동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강아지를 사 달라 졸라대었고 또 한편 사춘기 아이들이 동물과의 접촉을 통하여 정서가 발달할 것이라는 정서 교육적 목적으로 강아지를 사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제는 강아지만큼은 별 거부감 없이 공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치는 내가 산책 시간을 엄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가끔 내 방에 버젓이 큰일을 보고 나온다. 처음에는 이 녀석이 망령인가 하고 늙음을 탓 했다. 이런 변고가 자주 일어나면서 내가 불평을 했더니 아들의 말인즉 늙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영역에 표시를 하는 거란다. 하기야 작년에 딸 내외가 이리로 이사 오면서 데리고 들어 온 큰 녀석이 아래층을 차지하고 있으니 아치란 녀석이 자기 영역 표시를 분명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 녀석의 산책 시간을 철저히 지켜 주고 방문을 아예 닫아 버려 출입금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는 함께 산책한다. 이른 아침 미사를 다녀 온 후 따끈한 티를 마시고 신문을 대충 읽고 산책을 나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 시간 하던 산책시간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한 시간이 50분으로 다음 해엔 40분, 이제는 겨우 30분도 못 채운다. 그러나 30분 안에 녀석은 제 볼 일을 다 보고 나도 그만하면 하루 산책으로 적당하다 싶을 때 아치는 벌써 우리 집 쪽으로 가자고 방향을 돌린다.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있다. dog walker 라 하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실은 내가 강아지를 산책 시키는 것이 아니라 녀석 때문에 내가 산책을 하는 것이니 녀석이 오히려 내게 효도를 하는 것이다. 녀석도 나를 필요로 하지만 나도 녀석 덕분에 산책을 하게 되니까 우리는 공생하는 커플이다.

 

  녀석이 사람의 나이로 치면 딱 내 나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녀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녀석이 관절이 좋지 않아서 처음 산책길에 나서면 몇 발자국은 앞 다리를 조금 절뚝거리다가 약 10m 쯤 걸으면 정상으로 걷는다. 나도 그렇다. 앉았다 일어서면 무릎이 아프고 잠시 몇 발자국 조심스레 걷다보면 정상으로 걷게 된다. 또 녀석은 잘 잔다. 밤에 자고 낮에 또 자고, 이것도 우린 비슷하다. 나 또한 밤에도 자고 낮에도 잠시 눈을 붙인다. 그래야만 오후에 생동감 있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늙더니 고집도 세져서 안하던 짓을 한다. 전에는 비가 올 때 우비를 걸쳐 입히곤 했는데 이제는 싫다고 도리질 하다가 제 성에 못 이겨 내 손을 물기도 한다. 영락없는 고집 센 할배 모습이다. 자기가 싫은 것을 할 때 화가 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는 비가와도 비옷을 입히지 않는다. 산책 후 집에 들어와서 큼직한 타월을 푹 뒤집어씌우고 물기를 닦아준다. 얼굴을 가리고 닦으니 녀석이 내 손을 물 수 없다. 이 녀석이 또 고약한 것은 먹성이 너무 좋아졌다는 것이다. 늘 배가 고프다. 어떤 때는 며느리가 밥을 줬지만 내가 모르고 주는 때도 있는데 이 녀석은 아랑곳없이 또 받아먹는다. 웬 식성이 그리도 좋을까 싶다. 이 점은 나와는 좀 다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참으로 묘하게 창조하셔서 모든 동식물의 수명이 각각 다르다. 내가 10년을 살면 아치는 인간 나이로 80을 산다고 한다. 그러니 이 녀석은 나보다 더 빠르게 사는 것이다. 강아지는 강아지답게 본능에 충실하며 늙어감이 당연하지만 인간은 늙어가며 본능을 거슬러 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늙어가며 강아지처럼 본능에 충실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 끔찍스런 일이다. 동물적 본능에만 의존하며 사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녔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 때 인간은 본성만 남은 동물적 인간이 되어 결국 인간 고유의 특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동물은 동물적 본능에 충실히 살지만 인간은 본능을 제어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속성이 전연 다르다.

 

   늙음을 본능적으로 받아드리지는 말아야 하겠다. 설자리 앉을 자리를 살피고 양보하고 이해하고 때로는 분노도 삭히며 미소 짓는 여유로움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이면 젊은이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인간미의 향기가 퍼져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일 것이다.

 

  동네 골목길을 산책하는 데 이웃 젊은이가 손을 흔든다. Nice day! 또 조금 가다가 아기 산책을 나온 엄마와 마주 친다. 아기가 아치를 쓰다듬으며 포실 포실한 털 촉감이 좋아서 연실 He's so cute! 너무 귀여워! 를 연발한다. 아치는 앉을 자리 설자리 존엄 같은 어려운 단어를 알 필요가 없이 강아지답게만 살면 된다. 사랑하는 아치야! 우리 천천히 늙자. 그리고 오래 오래 함께 산책하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1,115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