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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서쪽으로 난 창] 용서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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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3-19 18:21 조회1,9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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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925b194ca8af1f4d1792229256e6eb_1584667311_9614.jpg박지향/시인 화가  

 

몇 년 전 콜로라도주 아스펜에 갔었다. 언니 부부와 함께 로드 츄립 중 들린 곳이다. 베일과 더불어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곳이다. 겨울이면 세계각국에서 몰려든 스키어들로 인해 이 조용한 산간 마을이 몰려든 인파로 북적이는데 우리가 찾아갔을 땐 초여름이었다. 

아스펜 다운타운은 아기자기한 카페며 아트 갤러리, 최고급 브랜드 상점, 원색의 화분들을 내다 건 레스토랑 과 호텔 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나는 혼잣말로 “여기는 미국이 아니야 난 지금 분명 유럽의 한 모퉁이를 관통하고 있어”라고 중얼거렸다. 여름이라 한가할거란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때마침 주말이어서 커피 한잔을 사는데도 한참동안 줄을 서야 했다. 우리는 가족 연인 삼삼오오 무리 지어 여기저기 이동하는 관광객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차를 돌렸다. 한참을 달리자 열어 놓은 차창 안으로 솔바람과 함께 산새 소리가 날아 들었다. 산속으로 올라가자 포플라 숲 속에 백 년은 넘음 직한 키 큰 판다로사 소나무가 여기 저기 섞여 자라고 있었다. 그 울창한 숲 속에 더도 덜도 말고 딱 한달만 살아 보고싶은 예쁜 집들이 포플라 나무와 더불어 늙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포플라 숲 속에서 화이트 바크와 도토리 나무가 사이 좋게 초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군데 군데 말라 죽은 고목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옅은 오렌지빛 나무 등걸 인걸로 보아 판다로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삼 십대 건장한 청년 같은 숲속에서 나무들이 죽어 넘어져 있다는 게 참 이상하다 싶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콜로라도주는 숲이 딱정벌레 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판다로사며 화이트 바크, 랏지 폴, 등 모든 종류의 소나무들이 딱정벌레의 공격에 쓰러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백 년, 이백 년 수많은 폭풍과 폭설에도 끄떡없던 소나무들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낱 조그만 벌레의 공격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 에이프릴도 그랬다. 한 마리 작은 딱정벌레가 우아하고 건강했던 그녀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젊은 시절 승마 선수였으며 의상 디자이너였다. 오래되고 낡은 흑백 사진속의 그녀는 늘 행복해 보였다. 유난히도 콧대가 오뚝하고 눈매가 그윽한 그녀가 자신의 애마위에 앉아 미소 짓는 모습이 그랬고, 가장 행렬 때는 화려한 드레스를 왕족처럼 차려 입고 군중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그랬다. 대가족의 축하속에 케이크를 얼굴에 잔뜩 묻힌 체 웃는 그녀는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얼음처럼 차갑고 비수처럼 날카롭게 만들어 버렸단 말인가?  아흔을 넘긴 그녀의 눈과 혹여 마주치기라도 하노라면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그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다. 언제나 바닥만 바라보고 다니는 말이 없는 그녀, 어쩌다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릴 땐 차가운 독설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누구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으며 언제나 혼자였다.

한번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서 일어나시기에 “남은 오후도 즐겁게 보내세요” 라고 평소처럼 인사를 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휙 돌아보더니 “네가 어느 나라에서 왔건 네 나라로 돌아가버려” 라고 소리 치더니 바쁘게 자리를 떠나셨다. 뭔가 심술이 나셨구나 생각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남녀 입주자 여러 명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나에게 대신 사과를 하시고 매니저에게 사실을 알렸다. 문제가 커질 조짐이 보였다. 자칫하면 에이프릴은 한동안 다이닝룸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질 수도 있게 된다. 정말이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되었다. 이번만 그냥 넘어 가자고 오히려 내가 간절히 부탁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의 간청이 받아들여졌다. 

그 일이 있은 후 에이프릴은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자꾸만 힐끗 힐끗 쳐다보는 눈빛과 몸짓이 단둘이 있을 기회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 때처럼 웃으면서 물었다. “에이프릴! 내게 할말 있어요?” 했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 너에게 한말이 아니야, 용서해 줄래?” 했다.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나에게 한말이 아니란 걸 알아요” 하며 한줌밖에 안되는 그녀를 꼭, 아주 꼭 안아주었다. 그 후로 우리는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웃지 않는 그녀가 나를 보면 미소를 짓는다. 자연스레 우리 사이에 우정 비슷한 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얼마전에 방문한 그녀의 딸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정말이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 눈엔 너무 예쁜 코가 그녀에겐 암초였다. 스무 살에 결혼을 하고 스물 두 살에 딸을 낳았다.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남편이 처음 본 아기를 보고 “코가 코끼리 코 같은 당신을 닮아 너무 커서 걱정이군” 했다고 한다. 몇달 만에 돌아온 남편의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꽂힌 것일까? 잦은 부부사움을 했고 급기야 남편은 자신과 어린 딸을 버리고 떠나 버렸다고 했다. 일본으로 가서 일본여자와 결혼을 했고 그후로 서로의 소식조차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남편이 떠난 후 자신의 높은 코를 미워하고 외모에 자신감을 잃고 분노와 비탄의 삶을 살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고, 세상을 코 아래로 내려 다 보며 자신감 넘치던 그녀의 영혼을 속속들이 갉아먹고, 한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딱정벌레는, 다름아닌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과연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은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용서해 주지 못한 자신이었을까? 

이제 곧 사월이다. 그녀의 이름 April은 언제든지 봄처럼 사월처럼 다시 시작하라고 지어준 이름 일거라고 우기면서 정원에 나가 보았다. 작년 봄에 사다 심은 몇 포기 프리뮬라가 기꺼이 겨울을 털고 일어나 연노랑 꽃잎을 꺼내 놓았다. 나는 곱디 고운 그 빛깔이 내 심장을 노랗게 물들일 때까지 바라보다가 겨울동안 엎어둔 토분 하나를 골라 제일 튼실한 것으로 옮겨 심었다. 내일아침 출근길에 들고 나갈 참이다. 혼자 볼 때 참으로 예쁜 꽃 프리뮬라, 함께 보면 더 예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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