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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동화-무한에 이르는 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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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병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4-15 08:35 조회1,9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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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d02f6ec5cb058eb69458c248edfa32_1586964898_2292.png박병호 

                                                                              

무덤이 완성되었다. 십자가도 없는 평장 묘, 보기엔 작고 평평해도 한 오백 번의 꽃 삽질이 행해진 결과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꼴레따 묘지 석물 같은 죽은자를 파는 화려한 장식물이 없어도 이곳이 묘지인지를 아는 사람만 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무덤을 엘리자베스 여왕 공원의 잔디밭으로 알 것이다. 햇빛 쏟아지는 날에는 37.7m 높이의 이 커다란 더글라스 전나무 아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벌거벗고 누워 햇빛을 탐할 할 것이다. 

 

언젠가 묻히게 될 자신을 위해 예행연습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샬렌의 얼굴을 연신 비춰댔다. 이에 아랑곳없이 지팡이 할아버지가 말씀을 이었다.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이름 없는 공간은 빨리 사라지게 된다고. “인간의 기억을 믿지 마라. 뇌는 믿을만한 기억장치가 아니다,”라고 하시며. “쿠스의 집, 어때요. 할아버지?” 샬렌의 물음과 함께 자동차의 문이 열리며 호리호리한 남자가 다가왔다. 샬렌의 아버지였다. “아빠! 언제 돌아오셨어요? 아직 오실 날짜가 아닌데.” 샬렌이 물었다. 짐작하고 미리 왔다고 했다

샬렌의 아빠에겐 해 뜨는 동쪽 끝 퀘벡시티에서 이곳 해지는 서쪽 끝까지, 이웃 마을 오가는 것보다 더 빠른 거리다. 대학원 시절 스위스의 한 공과대학에서 탄소나노튜브를 연구했다는 샬렌 아빠는 공간이동 시 피곤함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속도 감각 또한 보통 사람보다 몇백 배는 빠르다고 언젠가 샬렌이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이퍼루프를 만들어 타고 오신 것 아니에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미래 기계공학도답게 전문용어가 술술 나오는구나!” 샬렌 아빠가 반갑게 대답하신다. “응 그렇고 말고, 내 마음은 시속 1,200km로 내달릴 0.1% 진공 튜브보다 더 빨랐단다. 샬렌이 오늘 쿠스의 장례식을 치를 것 같았거든.” 샬렌 아빠가 응답을 이었다. “쿠스의 집?” 할아버지가 되뇌셨다. “참, 아빠 할아버지께 인사드리세요. 할아버지 아니셨다면 오늘 장례식이 이렇게 잘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샬렌이 말했다. 

 

“쿠스의 집이라뇨?” 감사의 인사와 함께 샬렌 아빠가 할아버지께 되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할아버지가 내게 물으셨다. “음, 저는 ‘여왕과 기니피그” 할아버지와 샬렌 아빠를 번갈아 보며 내가 답했다. “아빠는 이 묘지 이름을 뭐라고 짓고 싶으세요?” 샬렌이 물었다. “무한에 이르는 길!” 생각할 틈도 없이 샬렌 아빠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물론 종착지에 다다른 지름 3m의 하이퍼튜브 안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생각을 많이 자아내게 하는 이름 같아요. 어떻게 진공 중에서 1초에 30만 km로 내달리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이름이 만들어져요?” 샬렌이 묻는다. “항상 생각해온 이름이니까. 그런데 이름이란 지은이의 것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는 이의 것이란다. 각자 다르게 해석될수록 확장성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해석보다는 너희의 해석, 그리고 할아버지의 평가가 중요하겠구나.” 샬렌 아빠가 말했다. 

 

머리만 굴렸지 샬렌과 나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우리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평가해 주셨다. “보통 사람들은 관심이 많지만 잘 접근하지는 못하지. 시작만 하면 빨리 끝을 보려고 하는 인간들이라, 1로 시작하는 숫자에 계속 더해서 큰 수로 나아가다가 중단해 버리지. 어디나 부쳐 먹는 ‘0’ 이라는 숫자로 마감하고는.” 할아버지가 조금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샬렌아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마도 아빠는 이 좁은 엘리자베스 파크를 큰 공원으로 만들고 싶으시나 보다.” 할아버지가 샬렌 아빠를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비싼 집들로 둘러싸여 큰돈을 들이지 않고는 확장할 공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요.” 샬렌이 얼버무리듯 말한다. “비용-편익 분석의 예비 도시공학도다운 의문이구나.” 샬렌 아빠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탈리아에 온 관광객들이 비잔틴 교회들을 보고 수직 확산만을 느끼고 가지. 성가를 멈추어도 얼마 동안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게 하려고 내부 공간을 수직성과 선형성을 띠게 만들었다는 것은 느끼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이 작은 공원도 반려동물에게 수평과 수직의 쉼터가 되게 할 수도 있고, 꿈 많은 청소년에게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되게하지.” 샬렌 아빠가 할아버지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 청년기에 심장을 곧고, 길고, 그리고 동그랗게 만들어 놓아야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꿈을 그릴 수 있단다.” 할아버지가 샬렌 아빠에 맞장구치셨다. 할아버지, 샬렌 아빠, 샬렌, 그리고 나, 모두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길고 동그랗게 마음을 그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다. 사람을 겁내지 않은 홈리스 고양이 한 마리가 묘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완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이제 들어가 봐야겠구나. 오늘 쿠스와 너희들로 인해 즐겁게 지냈다. 1년 후 여기서 또 만날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가 한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샬렌과 나도 할아버지께 또 만나자는 말로 이별 인사를 대신했다.

 

 

바래다준다는 샬렌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샬렌과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전에 공원 북동쪽 미들로시안 에버뉴 49.5m 높이의 가장 높은 나무를 향해 걸었다. 훤한 낮에 만난 까치와 다람쥐를 깜깜한 밤에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재회의 기회마저 그냥 남겨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소수 이하의 숫자라도 붙들고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싶었다.

 

“우리 둘만이 부르는 이름이라도, 엘리자베스 파크를 ‘무한 숫자의 공원’으로 바꾸어 부르면 어떨까?” 까치도 다람쥐도 잠자러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 큰 나무 아래서 내가 샬렌에게 물었다. “쿠스를 1번으로 하고 이어 2, 3, 4로 확장해가다 곽 찬 3백 번쯤 가면 빈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샬렌이 넘겨짚어 답했다. “방법이 있어!” 내가 응수했다. “어떻게?” 샬렌이 귀를 내 입 가까이에 들이대며 물었다.

 

“우한 폐렴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경우에도 이곳에 묻히게 할까?” 내가 물었다. “이웃에 옮길까봐? 한국산 KF94 마스크를 씌워 묻으면 안전할거야.” 항생제 없는 전염병도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샬렌이 말한다. “쿠스가 1번이라고 해서 계속 1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리를 2번에 물려주면 무한대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내가 뭔가 동물에게 유익한 것을 발명이라도 한 듯이 소리쳤다

.

1번, 2번이 공간을 차지하고 그 숫자라는 이름이 고정되어 변화하지 않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그 자리는 황금의 자리가 된다. 독점적 권리는 진입장벽을 만들고 장벽은 기존과 신입, 청년과 노년 간의 따뜻한 인정을 사나운 동물성 동물들보다 못한 감성으로 바꿔버린다. 1번 장막과 2번 장막이 연합해 버리면 숫자 3번부터는 그 어떤 도전도 성공으로 이끌 수 없다고 했던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

샬렌에게 이 생각을 말로 바꿔 전하려는 순간, 샬렌이 먼저 말을 시작해 중단하고 말았다. “아프다고 발광하던 쿠스가 진통제를 맞더니 죽어갔어.” 샬렌이 쿠스의 죽음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털 빠짐이 시작되었을 때 병원에 갔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평소에 건강하고 활달해서 노화 방지제가 필요 없는지 알았거든. 적어도 쿠스에겐.” 

 

“샬렌, 우리가 쿠스를 살려내자, 죽음이 어느 한 공간에 박아 놓지 않게 하면 돼. 그러니까 새로 2번이 들어오면 쿠스자리에 묻히고 쿠스는 그 옆으로 이동해 가는 거야, 물론 그 순간 이름표의 숫자도 바뀌지. 쿠스가 2번이 되고 신입이 1번이 되고, 그렇게 계속되면 쿠스가 3번, 4번, 무한으로 나아갈 수 있어. 공간을 새롭게 바꾸면서.” 샬렌의 표정을 살피며 상기된 어조로 내가 제안했다. “그런데, 301번쯤 되면 쿠스가 엘리자베스 파크를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샬렌이 받아 물었다.

 

“공간이 수평만 있나, 더 넓은 수직 공간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공원을 수평으로 한 바퀴 다 돈 이후에는 수직으로 오르는 거야. 50m 높이의 더글라스 전나무에 사회적 이격거리를 2m로 유지한다 해도 한 그루에 25개의 공간이 생기고, 한 5백 그루의 아름드리나무가 다 차면 또 다른 선형의 언덕과 조경수들이 기다리고 있어.” 듣는 태도가 진지하고 우호적인 샬렌을 보면서 신난 내가 말했다

“아마 지구가 영속하는 한 무한의 공간이 살아남아 있는 셈이네.” 샬렌이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다. 한 번 태어나기만 하면 1번부터 무한대까지 모든 경험을 다 하게 된다니.” 신바람 난 샬렌이 이어 말했다. “이 공간 저 공간 좋은 자리도, 그리고 좋은 숫자도, 1, 2번이 나눠 갖지도 않겠지?” 내가 맞장구치듯 응수했다

“우리 같은 신입 청년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고, 늙어가는 우리 엄마 아빠가 죽어도 곧 다시 사는 것이네.” 샬렌이 동감하며 낮은 소리로 외쳤다. 샬렌과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이렇게 끝이 없는 세상을 만든 창조주께 감사하며 외쳤다. “무한 숫자의 공원, 무한에 이르는 길 만세!!” 

 

 

어느덧 푸르게 부푼 우리의 가슴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학교를 둥글게 감싼 공원에 다다라 있었다. 키는 작지만, 수평으로 넓게 퍼진 부채꼴 모양의 시다 나무 아래서 기니피그를 닮은 토끼 두 마리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살피고 있었다. “샬렌, 쿠스가 다시 태어났어.” (coreits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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