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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아무 날 (다섯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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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4-29 08:54 조회1,9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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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d02f6ec5cb058eb69458c248edfa32_1586965429_3591.jpg박지향


남자가 걸어온다. 감청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하늘색 바탕에 흰 물방울 무늬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걸어온다. 노랑색 장미를 한아름 안은 그 남자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꽃을 든 남자가 다이닝 룸에 나타난 것은 점심식사가 막 시작되던 시간이었다. 모두가 테이블 앞에 둘러 앉은 채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내가 아니었다. 저 꽃의 임자는 자신일 것이라 꿈꾸던 스물 둘 아리따운 엠마도 아니었다. 나를 지나고 엠마도 스쳐 지나갔다. 


남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조이스 앞이었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양 볼에 번갈아 키스를 했다.  들고 온 꽃다발은 그녀의 품에 안겨졌다. 그 순간 84세 조이스 할머니 얼굴은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이라도 받은 듯 환하게 빛났다. 그녀의 손자 데이빗은 꽃 한다발로 할머니를 여우 주연상의 자리에 앉혀 주었다.

 

조용한 성격에 키도 자그마하셔서 평소엔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분이다. 말수도 적고 목소리까지 작아서 대화가 필요할 때는 허리를 굽히고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런 할머니가 손자 데이빗만 나타나면 다른 사람이 된다. 왕 수다쟁이로 순간 변신하신다. 그날도 데이빗이 나타나자 손주 자랑하시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다. 피아노는 기본이고 트럼펫과 기타까지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뮤지션이라 한다. 달리기도 수영도 잘하고 심지어 철봉까지 멋지게 한다. 계란 프라이와 블루베리 스무디 만드는 실력은 따라올 자가 없다 하신다. 조이스는 데이빗의 할머니임에 틀림이 없다. 



식사를 하시던 분들은 부러움 반 질투 반 섞인 눈빛으로 많은 추측들을 쏟아 놓았다. 조이스 생일이라는 둥, 암 수술 받기전에 보러 온 것이 틀림없다. 손자다. 아니다 아들이다. 어떤 분은 어머니날이 지난 지 두 달도 넘었는데 어머니 날이라는 둥… 그 날은 어머니날도 아니고 생일날도 아니었다. 그저 매일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날들 중 하루였다.


식사를 마친 조이스 할머니는 옆에 앉은 할머니들에게 받은 꽃송이를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꽃을 나누는 손길을 손자가 기꺼이 도와주었다. 나누는 마음도 예쁘고 받아 드는 손도 예쁜 풍경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분들에게 다 나눠 주고도 몇 송이가 남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매리 할머니에게 한송이를 건네자 “그만둬, 난 그 딴것 필요 없어” 하며 불편한 마음이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매리 할머니는 꽃은커녕 맨손으로도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늘 뾰족한 마음이 방문객을 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할머니였기에 어쩌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매리에게만은 꼭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꽃을 주려 다가 무안해진 할머니를 이 잘 생긴 손주가 잘생긴 말로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고마워요, 하마터면 우리 할머니는 한송이도 못 가질 뻔했네요” 하며 하이얀 이를 드러 내었다. 넉넉한 마음이 비좁은 마음을 덮어주고 싶었지만 꽃 한 송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매리 할머니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리를 떠나셨다.


조이스 할머니의 손자 데이빗은 변호사다. 뉴욕에 있는 로펌에 소속되어 있다. 한창 일 할 나이였고 결혼도 안 했으니 데이트도 해야 한다. 튼튼한 직장에 키 크고 잘생긴데다 여자를 넘어 사람 사랑하는 법을 아는 남자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바라는 꿈의 남자인가. 그런데도 일년에 네 다섯 번은 꼭 할머니를 찾아온다. 할머니 생일, 어머니 날, 크리스마스 그리고 아무 날…. 


데이빗은 초등학교 시절에 양친을 잃었다. 아버지는 암으로, 어머니는 가출로 잃었다. 다행히 조부모 이신 조이스와 할아버지 죠셉의 사랑으로 잘 자라 주었다. 할머니는 간호 조무사로 일하셨고 할아버지는 자동차 정비일을 하셨다. 바쁘고 고달픈 날들이었지만 두분에게 최 우선 순위는 늘 데이빗이었다. 


할머니는 밤근무 열 두 시간을 하고 돌아온 새벽에도 도시락을 싸서 학교로 보냈다. 비록 딸기 잼과 피넛 버터를 바른 샌드위치라 해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배가 불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서라도 데이빗의 학교 행사에는 빠지지 않았다.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제일 큰 목소리로 응원해 주었다. 


그런 할아버지는 3년전에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남으셨다. 그렇게 혼자가 되신 후부터 데이빗은 일년에 두 세번 오던 길을 ‘아무 날’을 덧붙여 네 다섯 번으로 횟수를 늘였다. 그 날이 바로 ‘아무 날’이었다. 


조이스는 수없이 많은 야생화 군락속에 핀 한송이 들꽃 같은 존재다. 그런 84세의 할머니 조이스를 무대위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마법이다. 생일도 아니고 어머니 날도 아닌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날로 바꾸는 이 마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단지 꺼내 드는 자와 꺼내지 못하는 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대여! 꽃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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