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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세상은 타악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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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민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5-06 07:43 조회1,1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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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783364_1OQTF4pG_6b2ac4b02a7e4f3aeb6efdaf4ae0bae9ab1d1e53.jpg최민자/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홀로 앉아 저녁을 먹는다. 김치 보시기와 깻잎장아찌 하나, 혼자 먹는 밥은 단출할수록 좋다. 먹거리가 단순해야 눈빛도 축생처럼 순해질 것이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전주 부분이 매혹적인 이 노래는 첫 마디가 시작되기 전부터 내 몸의 세포들을 저릿저릿 일으켜 세운다. 비트가 강한 포크 록이나 댄스 음악에 관대해진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예전에는 잔잔한 발라드가 좋았는데, 삶이 가벼울 땐 쓸데없이 무게를 잡고 싶더니 사는 일이 버거우니 글도 노래도 가벼운 게 좋더라는 어느 친구의 말대로, 나도 지금 정신을 짓누르는 어떤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내지르는 음색이 맑은 듯 거칠다. 허스키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목청 한가운데에 녹슨 철심이라도 박혀 있는 것 같다. 밥 먹던 손으로 장단을 치며 나도 흥얼흥얼 소리를 보탠다. 그럼, 꽃보다 아름답고 말고.


 리듬이 신명을 불러들이는가. 빈 그릇을 싱크대에 옮겨 놓다 말고 혼자 흥에 겨워진 내가 식탁을, 물 컵을,  접시를 두드린다.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양 손에 쥐고 문 살도 기둥도 두드려본다. 사물의 저 깊은 안쪽에서 비어져 나오는 둔탁하고 어스름한 발성. 농담濃淡에 따라 수백가지로 나뉘는 수묵 빛깔같이. 미세하게 다채로운 모노크롬의 비트가 침묵의 음역을 무작위로 난타한다.


 세상의 사물들이 그렇게 다양한 소리를 품고 있는 줄을 나는 알지 못했다. 물병에, 도마에, 리모컨에, 냉장고에, 그렇듯 리드미컬한 흥과 신명이 숨어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았다. 비슷한 듯 다른 소리, 화장기 없는 무구한 소리들이 엇박으로, 까치걸음으로 깨금발로 쏟아져 나온다. 사물은 압축파일인가. 손 닿는 구석구석이 다 악기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악기 밖에 서가 아니라 악기 안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셈인가.


 세상은 타악기다. 두드려서 소리 나지 않는 것은 없다. 가볍게 속을 뱉어 낸 낭인들은 악기라는 이름으로 화사한 가락을 휘감으며 살지만, 세상에 태어나 쓸모로만 기억되고 소모되는 물건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만 거들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마는 사연 많은 사람들처럼, 손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의 장담만으로 그들은 가볍게 묵비권을 반납한다. 울고 싶을 때 누군가가 한 대 쳐주기를, 그리하여 무언가 그럴듯한 빌미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아이처럼, 누군가 다가와 굳어버린 먹 가슴을 두드려 주기를 내심 그렇게 기다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고 여리게, 길고 짧게, 사물들을 노크한다. 사물들이 화답한다. 존재와 존재 사이, 침묵과 침묵 사이에 잠들어 있던 소리들이 졸린 눈을 부비며 몰려나온다. 기다렸다는 듯, 참고 있었다는 듯, 액자와 에어컨과 앉은뱅이 탁자들도 멈칫멈칫 사설을 쏟는다. 혹시 이 침묵의 수화자들은 사바세계에서 기어綺語의 죄를 짓고 구천을 떠돌다 전생의 업장을 소멸하여 돌아온 글쟁이나 정치꾼, 사이버 종교가의 넋이 아닐까. '내가 누구인가? 아니면 '이, 뭐꼬?' 하는 화두 하나 붙들고 제각각의 형량대로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무담시 그런 생각이 들다니. 누군가 묵언의 북채로 내 정수리를 내리친 게 분명하다. 생각이 뭔가. 물物과 아我가 충돌하여 일으키는, 머릿속의 스파크 같은 것 아닌가. 나만 사물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사물도 나를 두드리고 있었음을, 만물은 그렇게 서로의 가슴을 두드리며 살아가는 것임을, 침묵의 군상들이 준엄하게 일깨운다.


 신명이 옮겨붙은 내 젓가락이 집안 구석구석을 두드리며 맴돈다. 한 손으로 허벅지에 추임새를 넣고 다른 손으로 반닫이며 화병을 두드리며 바람도 울리지 못한 그들의 심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도발해 들어간다. 단호하게 여며진 심장이 파열한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들의 분절된 속 울음이 팝콘처럼 튕겨져 흩어진다.


 두드림은 이제 유희가 아니다. 세상 모든 입 다문 것들을 위한 진혼의 축제요. 해원解寃의 춤사위다. 존재와 언어 사이의 불화를 넘고, 사물과 나 사이의 경계를 지우며, 내 안의 신명과 그 안의 점령이 한 통속으로 맞장구를 친다. 덩 기더쿵 더러러러, 쿵 더러러러, 덩 덕 더쿵덕, 덩 기덕쿵 더러러러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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