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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어머니의 지팡이(여섯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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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5-13 07:36 조회2,0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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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783364_egP0QcVO_31575821e1c1dba7e3b22d00c3afdb9721628f27.jpg박지향


“이사 가던 날 


뒷집아이 돌이는 


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탱자나무 꽃잎만 흔들었 다네…“


가수 박경애와 주정이가 듀엣으로 부른 ‘이사 가던 날’의 일부다. 이별의 아픔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담담한 빛깔로 그려낸 명곡이다. 설레임과 아쉬움으로 떠나는 각시는, 보내는 돌이의 애타는 가슴을 짐작이나 했을까?.  


내가 밴쿠버로 떠나오던 날, 뒷집아이 돌이는 하루를 울었지만 연로하신 내 부모님은 몇 날 몇일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돌이는 탱자나무 꽃잎이라도 흔들 수 있었지만 내 부모님은 밥숟가락 하나 들지 못했다. 마음 같아 선 달리는 비행기 앞에 드러 누워서라도 붙잡고 싶은 막내딸이었다. 보내야 하는 늙으신 부모님의 애끓는 심정은 그 작은 꽃잎 하나 흔들지 못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트리던 두 분은 행복하게 잘 살라 시며 꼭 잡은 손을 어렵게 놓아주셨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약속만 붙들어 놓고,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붙잡지 않은 그 마음은 오직 하나 사랑이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이사를 온다. 이 곳에서도 한달에 한두 번은 이삿짐이 나가고 들어온다. 들어오는 풍경은 모두가 거기서 거기 비슷한 그림이다. 서먹한 발걸음에 같은 표정, 같은 기대를 가지고 들어온다. 하지만 이사를 나가는 분들의 풍경은 많이 다르다. 어느 곳으로 옮겨 가느냐에 따라 그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사지의 주소는 세 군데로 나뉘어 진다. 첫째, 혼자 힘으로 살기가 힘든 분들이 가는 곳으로 더 많은 도우미와 더 많은 의료지원을 해 주는 롱텀 케어홈이다. 주로 이곳으로 많이들 옮겨 가신다. 둘째, ‘떠나실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예감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예고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천국으로 옮겨 가신다. 셋째, 아주 드물게 연로하신 부모님을 자식들이 모셔간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잭팟이 터졌다고 표현한다.


지난해 봄, 벚꽃이 지던 4월 하순, 할머니 한 분이 이사를 가셨다. 입주하신 후 줄곧 봉사 활동 도 하시고 베란다에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 토마토며 딸기, 바질 등의 채소와 꽃을 가꾸며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지내셨다. 여든이 넘은 노인들은 아무리 건강 상태가 좋아도 내일일을 알 수가 없다. 할머니도 그랬다. 2년전 겨울 갑작스레 쓰러지셨다. 뇌졸중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수족의 사용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아들이 모셔 가기로 한 것이었다. 잭팟이 터진 것이다. 


이사날이 결정되자 85세의 르노라 할머니는 가지고 계시던 옷 가지며 가재도구를 친구들에게 나눠 주셨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들네로 들어간다고 해서 몇 십년 소중하게 간직하던 물건들이 어찌 필요가 없을까. 혼자 가지는 행운이 미안해서 필요 없다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내 손에도 조그만 은색 종이 달린 열쇠고리 하나를 슬쩍 쥐어 주셨다. 


크고 작은 물건들을 나눠 주며 더 없이 행복한 할머니는 다시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식사량도 늘었고 어눌 해 졌던 발음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어 말씀도 더 많이 하셨다. 지켜보던 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르노라는 백 년도 더 살겠어” “시집 한번 더 가겠네” 하며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백 년도 더 살겠다던 할머니, 시집한번 더 가겠다던 할머니는 시집은커녕 한달도 더 살지 못하셨다. 이사를 몇일 앞두고 모두가 잠든 밤, 아무도 모르게 천국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소리없이 지는 벚꽃처럼 그렇게 홀연히 떠나 가셨다.


할머니의 짐이 나가던 날, 하나밖에 없던 아들과 며느리가 몇 번을 오가며 짐들을 내어 갔다. 빌딩 앞에 세워 둔 작은 트럭위로 연분홍 벚꽃 꽃잎이 떨어져 쌓였다. 평소에 끼고 다니시던 성경책과 앨범을 담은 종이상자위에도, 라디오와 뜨개실이 담긴 바구니 위에도 꽃잎이 쌓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삿짐 트럭은 연분홍 꽃상여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별의 말 대신 향기를 남기고 가신 르노라 할머니의 짐은 아들이 가져온 작은 픽업 트럭에 모두 다 실어졌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은 조그만 트럭 하나면 충분 했다. 

마지막으로 방안을 둘러보던 아들이 문 옆에 기대져 있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가 반들반들 해진 손떼 묻은 할머니의 지팡이였다. 그때까지 담담하게 짐을 나르던 아들이 “난 왜 이렇게 항상 늦지” 하며 누르고 있던 감정들을 뚝 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쏟아 내었다. 그렇게 자식들은 매번 늦고 부모님은 매번 용서하신다. 부모는 자식이 넘어지면 열 번 아니라 백 번도 일으켜 세우시건만 자식은 한번 넘어진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트럭에 올라 앉은 아들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 시동을 걸었다. 할머니의 짐을 실은 트럭이 천천히 빌딩을 빠져나갈 때였다. 입주민들의 창이 하나 둘 열렸다. 창밖으로 떠나가는 트럭을 향해 어떤 이는 손을 흔들었다. 어떤 이는 꽃상여가 되어 떠나가는 이삿짐 트럭을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4월은 이미 지고,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벚꽃도 지고 있다.  지는 벚꽃사이로 탱자나무 하이얀 꽃잎을 내 밀었다. 손쉬운 핑계에 밀려난 어머니의 자리에서 자라기 시작한 탱자나무 한 그루, 언제 파종했는지 나도 모른다. 

가지마다 돋아난 가시는 언제든 찌를 준비를 하고 있다. 지키지 못한 약속 앞에 변명을 늘어 놓을 때면 “양심도 없냐?” 하며 쿡 찌른다. 홀로 잠들어야 하는 어머니의 쓸쓸한 잠자리를 외면한체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단잠을 청한다. 그런 밤이면 “네가 지금 잠이 오냐?” 하며 또 한번 쿡 찔러주고 가는 탱자나무 가시… 사랑한다는 말, 건강하시란 말만 습관처럼 반복하다 내려놓는 전화기 밑에도, 탱자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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