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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분홍 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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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5-27 08:42 조회1,24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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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주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은 누군가 날 위해 차려주는 밥상이다. 나도 그렇다. 배는 고프고 손끝 하나 까딱 하고싶지 않은 날에는 배달의 민족이 만들어낸 배달문화가 정말이지 그립다. 나는 가끔 우리 형제들 그룹 카톡 방에 예전에 먹었고 한 그릇 먹음 기운 나겠다 싶은 음식이름을 적어 올린다. 된장찌개, 열무김치 애호박탕, 갈치조림, 더덕구이, 바지락 칼국수…생각나는 음식 이름을 줄줄이 올려 놓으면 한국에 있는 언니 오빠가 재빨리 찾아 올린 사진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그러다 며칠전에는 내가 차린 밥상을 사진 찍어 올렸다. 언니 오빠들은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특식이라고 자랑했다. 처음으로 올린 음식 사진이었다. 다들 뭐냐 고 난리가 났다. 밴쿠버에 오면 해 줄 테니 지금부터 슬슬 걷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도착 할거라며 약을 올렸다.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도 아닌 것을 특식으로 둔갑시키는 비결은 따로 없다. 사연을 얹어 함께 먹으면 특별한 밥이 된다. 이 특식은 반찬이 없거나 기름진 음식이 물릴 때 너무 쉽고 간단하게 뚝딱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살짝 달궈진 팬에 기름없이 잔멸치를 덖어 식힌다. 깨끗이 닦은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매실 액기스, 참기름, 간장, 청주를 반 스푼씩 넣고 끓으면, 덖은 멸치를 넣어 재빨리 볶아낸다.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밥위에 볶은 멸치를 올리고 그 위에 살짝 구워 곱게 가루로 만든 김을 솔솔 뿌린다. 마지막으로 볶은 통깨를 올리면 특별하진 않지만 가끔 생각나게 하는 멸치덮밥이 된다. 여기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만능 양념간장을 넣고 조금씩 비벼 먹으면 된다.  무와 양파, 매콤한 할로피노 고추를 함께 썰어 넣고 담근 장아찌를 곁들여 먹는다. 반드시 나무젓가락만으로 먹는다. 처음부터 끝까지…이 간단하고 소박한 덮밥을 나에게 소개해 준 사람은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영국 태생의 에스더 할머니다.


내가 살짝 내려 다 보는 키니까 아마도 160 센티미터정도가 될 것이다. 할머니를 볼 때면 깡마른 몸매에 이상하리만큼 배만 볼록 나와서 자꾸만 눈이 배쪽으로 향했다. 조그맣고 하얀 얼굴엔 검버섯이 왼쪽 과 오른쪽눈 옆에 두 개씩 대칭을 이루며 꽃처럼 피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검은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는 희고 긴 머리를 허리까지 쫑쫑 땋아 내렸다. 끝에는 리본으로 장식하는데 기분과 때에 따라 그때 그떄 다른 색상의 리본을 묶으셨다. 누구라도 방문객이 있는 날은 빨강색, 기분이 좋은 날은 분홍색이다. 우울한 날은 파랑색을 달고 누구와 도 말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검정색 리본을 묶으셨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리본의 색깔만 보고 할머니의 상태를 알 수 있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갈 때와 멈출 때를 알려주는 신호등인 셈이다. 어쩌다가 도로위의 신호등이 고장 날 때가 있듯, 할머니 신호등도 고장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직원들도 신호등 없는 사거리의 자동차처럼 우왕 좌왕하며 눈치를 살핀다. 


한번은 에스더 할머니가 모린 할머니와 같이 도서실 앞에 앉아 계셨다. 마침 점심을 먹은 뒤라 시간도 있고 할머니 신호등이 분홍색이라 인사라도 하고 갈 참으로 다가갔다. “날씨 좋죠? 에스더, 모린?” 했다. 모린 할머니 반색을 하면서 “그래 너무 좋지?” 하셨다. 에스더 할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들고 있던 스웨터를 접었다 폈다 하셨다. 아무래도 신호등이 고장 난 듯했다.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서 좀 걸으세요.” 하고 돌아서는데 볼멘 목소리가 날아왔다. “날씨가 좋음 뭐해 찾아줄 사람 하나 없는데” 하시며 들고 있던 스웨터로 옆에 있던 탁자를 짜증스럽게 탁탁 두드리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음날 방문하겠다던 지인이 약속을 취소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사 오 십대를 일본에서 보냈다. 전도사였던 남편과 함께 전도를 하며 17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할머니 연세 58세가 되던 해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캐나다로 돌아오셨다.  올해 나이 75세이니 17년전의 일이다. 할아버지는 이미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혼자 이곳으로 들어오셨다. 


그때의 인연으로 목사 된 일본인 부부도 방문했고 전도사가 된 청년이 다녀갔다. 그날도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부부가 방문 예약을 했는데 하루를 앞두고 갑자기 날짜를 변경한 것이었다.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입주자들은 몸은 병들고 특별히 하는 일도, 오라는 곳도 없다.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밥 먹는 시간과 누구든 찾아와서 말을 걸어줄 말벗뿐이다. 


에스더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밥이라고 입에 넣어 씹어봐도 밥 양보다 삼켜야 하는 알약의 양이 많다 보니 기다리던 밥도 쓰기만 하다. 입에 맞는 밥 한끼 먹고 나면 힘이 벌떡 날 텐데 내가 해먹을 기력도 없고 누가 해 줄리 없으니 그 또한 맛보기가 쉽지 않다. 주문한 밥의 반도 먹는 날이 허다했다. 어떤 날은 주 요리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디저트로 나온 케익만 한 조각 드시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독한 약을 이겨 내지도 못할 뿐 더러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몸은 야위어만 가셨다. 


그날 저녁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연어구이를 주문하셨다 아스파라거스 세개 중 두개를 드시고 연어구이는 잘라만 놓고 한 점도 드시지 않았다. 이렇게 안 드시면 안된다고 좀더 드시라고 권유했더니 숨겨둔 짜증을 있는 대로 꺼내 놓으셨다. 아스파라거스는 덜 구워졌고 연어는 너무 바싹 익어서 포크도 안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메뉴가 연어구이와 폭찹 중 하나를 선택하는 날이었기에 그럼 폭찹을 드시겠냐고 물었다. “내가 돼지고기 알러지 있는 거 모르냐?” 하셨다. 할머니는 돼지고기 알러지가 없다. 입맛이 없으신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돌아가실 때 무얼 먹고 싶냐 고 물었다.  대답이 “아무것도 없어” 였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후 복도에서 할머니를 마주쳤다. “너 멸치 밥 할줄 아니? “하셨다. 아니 뜬금없이 멸치 밥이라니… 나는 콩나물밥이 떠 올라 멸치를 넣고 하는 밥이냐고 물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쉽고 간단한 굴밥이나 콩나물밥처럼 쉽게 할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게 먹고 싶냐 고 물었더니 일본에 있을 때 가끔 먹었었는데 그냥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 

그 날밤 인터넷을 열고 보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방법도 많고 먹음직스런 사진도 많았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봐도 크게 맛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내 방식대로 멸치덮밥을 만들었다. 도시락에 담아 알루미늄 호일로 또 싸고 종이 봉투에 넣고 신문지를 덮었다. 만나면 말이 길어지기에 할머니 방문 앞에 놓고 와서 전화를 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몇 날 며칠을 분홍색 리본만 달고 다니셨다. 밥 한 그릇의 힘이었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은 남녀노소 국적불문인가 보다. 밥 한 그릇의 의미는 힘내라는 말이고, 때로는 용서하겠다는 말이다. 함께 먹은 밥 한 그릇으로 친구가 되고,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타인도 한솥밥을 먹으며 가족이 된다. 너와 나를 이어주는 튼튼한 다리다. 그래서 엄마라는 여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고싶지 않은 지친 저녁에도 쌀을 씻는다. 구수한 밥냄새를 맡으며 연신 창밖을 내다본다. 초인종 소리와 동시에 된장 뚝배기에 가스불이 켜진다. 밥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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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잘 어울려야 한다.
하나의 좋은 글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글쓰는 이의 품성과 글솜씨가  필요하다.
박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위의 두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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