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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색으로 씁니다(열두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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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8-04 09:56 조회1,5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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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783364_YW7Hrg8O_54198884d3f83da0174ed2f0e04d56ce3ad9d1d4.jpg박지향


그녀를 만나려면 아침 잠과는 이별을 고해야 한다. 하이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해가 뜨기 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그녀의 영혼은 슬며시 사라져 버린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큰언니와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그때, 새벽 공기를 가르고 달려간 곳은 경주, 달이 비치는 연못 *월지였다. 칠 팔월의 월지는 연꽃으로 유명하다. 입장 시간을 착각했던 우리는 한시간도 더 기다린 뒤에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른 시각이라 우리 두 사람 외 엔 아무도 없었다. 흐린 날씨덕에 그때까지 태양은 구름속에 갇혀 있었다. 큰언니와 나는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발끝으로 톡톡 차면서 저 멀리 보이는 연 밭을 향해 걸었다. 청록색 커다란 연 잎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연꽃, 아침잠을 포기하고 달려온 보람을 주고도 남았다.


만개한 홍련도 예쁘지만 하이얀 꽃잎을 두 세 장 열었을 때의 백련은 말로는 다 못하는 미의 극치다. 비밀스러운 여인이다. 비밀스럽다 못해 신비스러운 백련의 자태는 내 짧은 표현력으로는 전해줄 재간이 없다. 청초 하다는 말 한마디로 어찌 그 꽃의 기품을 다 표현하겠는가? 향기롭다는 말 한마디로 어찌 그 고혹적인 향을 모두 다 설명하겠는가? 백련 앞에선 차라리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침묵으로 바치는 나의 경탄이다.


침묵보다 더 힘있는 말이 있을까?. 침묵은 때로 동의한다는 말없는 의사 전달이고, 때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이다. 도저히 대화가 안되는 억지에 떼쟁이를 만나면 한마디 말도 아깝다. 그때도 침묵하며 돌아서야 한다.


82세 할머니 아이린은 그 때가 언제 인지를 잘 알고 있는 수다쟁이다. 할말은 똑 소리 나게 하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필요 없다 함은 언쟁에 참여하지 않는 다는 뜻이고, 남의 얘기를 등 뒤에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뒷담화가 파도를 타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반면에 아침 산책길에 만난 강아지 이야기며 옆방 할아버지가 나눠 주신 쵸코렛 두 알은 하루 종일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후식으로 먹은 티라미수는 맛과 향이 우러날 정도로 달달하게 전달하시는 타고난 이야기 꾼이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조용하고 감미로운지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매력에 풍덩 빠져 들고 만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녀의 제일 큰 매력은 모두를 입다물게 하는 침묵의 대꾸다.


이 곳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의자에 앉아서 하는 요가 교실이 열린다 한번은 요가실 앞에서 아이린 할머니를 만났다. 방석을 들고 나오시기에 요가가 끝이 났나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목소리 매리 할머니가 아이린 할머니를 쫓아 내셨다. 사실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비켜 준 것이다. 지정석도 아니건만 굳이 아이린 할머니가 앉은 자리를 자기 자리라 떼를 쓴 모양이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아이린은 침묵으로 대한다.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안 봐도 비디오다. 요가 한번 빠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다른 놀이가 없는 것도 아니니 기꺼이 그 자리를 내 주고 나오신 것이다. 내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자 “네가 길을 가는데 지나가던 개가 마구 짖어, 그럼 넌 어떻게 할거야?” 하셨다. 내가 하는 말이 “그냥 가던 길 가면 되죠” 했다. 할머니는 윙크와 함께 내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리시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가셨다.


할머니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놀이는 그림 그리기다. 13년전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 뒤엔 백혈병을 앓던 딸까지 할아버지 옆에 묻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같은 해에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을 떠나보낸 할머니는 방향을 잃고 헤매는 폭풍속의 배 같았다. 그때 시작한 것이 그림이다. 정신과 치료 중 하나였던 그림이 이제는 할머니의 삶이 되었다. 세상 소리가 시끄러울 때도 우울하고 적적할 때도 가장 편하고 좋은 친구가 그림이다. 무섭고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부터 숨고 싶을 때에도 그림만큼 좋은 피난처는 없었다. 


9년째 그림놀이에 빠진 할머니의 작품수가 어마어마 하다. 작은 단추한개서부터 운동화, 수선화, 고양이, 먼저 가신 할아버지와 딸의 얼굴까지 다양한 소재와 크기의 그림들이 할머니의 태블릿 PC에 저장 되어있다. 저장된 그림들은 글 대신 색으로 써 내려간 할머니의 자서전이다. 노랑색 작은 단추는 딸의 스웨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고 낡은 운동화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신고 다니시던 할아버지의 신발이다. 모두가 애틋하고 소중한 사연을 담고 있어 어느 것 한 장이라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다.


할머니의 그림은 캐나다의 민속화가 모드 루이스나 미국의 국민화가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처럼 푸근하고 친근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 고픈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과 고정관념 없이 순박하고 자유로운 모드 할머니의 그림을 섞어 놓은 것 같다.  아이린은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서 그림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9년전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의 소심하고 우울했던 흔적은 지금의 작품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얼마나 대담하고 씩씩해 지셨는지 모른다. 원근법이나 세상사람들의 눈 따위는 의식하지 않았고 붓 가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그린다. 주저없이 휘두른 시원한 붓 터치와 밝고 따뜻한 색상은 그리는 행위 자체가 기쁨이었고 쉼터였음을 말해준다. 


세 분 할머니 모두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학교 등록금 보다 더 큰 레슨비를 지불하며 살아낸 인생이었기에 필설로 다 못하는 삶의 희비를 담은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예술작품이든 작가의 개인사를 알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작품을 대할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면서 위로 받았고 살아갈 힘이 되어준 아이린의 그림들은 나에게 쉬다 가라며 자꾸만 말을 걸어온다. 겸허하게 받아들인 운명에, 살아온 세월이 발효시킨 깊고 향기로운 맛에 내가 붙들리고 만 것이다. 


아이린은 열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네 명이나 되는 동생들의 엄마가 되어 먹이고 가르치고 성장시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린 아버지는 또 한 명 돌 봐야할 아이였다. 한창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십대에 가장이 되어버린 그녀의 삶은 외롭고 험난했다. 천성이 착하고 우직한 아이린은 내가 져야할 짐이 아니라고 내팽개 치지 않았고 투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의 성품은 말하지 않아도 그림에서, 평소의 행동거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칭찬은 아끼지 않았고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매사에 여유와 감사가 넘치는 할머니는 “오늘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살아 숨쉬는 것이 기뻐” 하시며 즐겁게 사신다.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향기롭게 익어 가시는 할머니는 흙탕물속에서 피어났지만 아름다움과 품위를 잃지 않은 연꽃 같다. 물속에서 자라지만 물에 젖지 않는 연 잎처럼,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고난속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은 그녀는, 영혼이 떠나지 않은 새벽의 백련이다. 

  

*월지: 경주에 있는 안압지를 경주 사람들은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 하여 월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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