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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내 인생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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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춘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8-17 23:00 조회1,5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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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eda4576d2bedd75253b0842ffb1653_1584045875_045.jpg김춘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그 분의 성함은 공아영 프란치스코 회 신부다(André O.F.M.). 신부님은 1954년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가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갓 사제 서품을 받은 28세의 꽃다운 젊은 사제로 한국 선교지를 자원하여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26년간 한국에서 선교를 하셨다. 한국 선교를 마치고 잠시 고향인 몬트리올에 오셨다가 아프리카 말라위 선교지로 가서 15년간 선교 후 아프리카 풍토병을 얻어 말라위를 떠나 본국 몬트리올로 다시 돌아 왔다.


1994년 몬트리올에서 프란치스칸 재속회라는 평신도 단체를 시작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인 겸손, 가난, 단순, 작음, 의 영성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그 분은 우리 재속회의 영적 보조자 즉 영적인 도움이로 오셨다. 밴쿠버로 이전해 왔던 2013년까지 나는 그 분을 모시고 평의회(임원회)원으로 일했다.


신부님의 한국사랑은 참으로 끔찍했다. 그의 선교지가 대이였고 그 곳에 오랜 동안 계신 탓에 약간 대전 사투리를 쓰지만 한국인을 만나면 늘 한국어로 말할 정도로 한국 사랑이 대단한 분이다. 지금은 93세로 지병이 있어서 언젠가부터 양로 병원에서 사신다. 얼마 전에 통화했을 때 ‘나는 왜 한국 사람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라 며 그가 얼마나 한국 선교를 기쁘게 하였던가를 털어 놓았다.


코로나가 퀘백에서도 예외 없이 사회 질서를 바꿔 놓았다. 캐나다에서 제일 많은 확진자 가 나온 만큼 규제도 철저했다. 무엇보다도 양로 병원의 타격은 컸다. 외부 방문자 금지 뿐 아니라 식당에서 하던 공동 식사가 폐지되고 각 방으로 식사 배달을 받는다. 한국에서 말하는 혼밥이다. 신문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 양로 병원으로 옮겨 가기 전, 수도원에서는 아직 핸드폰이 나오기 전이여서 컴퓨터로 한국어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병원으로 옮겨 가면서 그리고 이번 코로나로 모든 혜택이 다 끊겼다. 그나마 가끔 찾아오던 한인 신자들의 방문조차 끊겨 그야말로 독거 아닌 독거를 하는 노인 병동의 한 쓸쓸한 노 사제가 되어버렸다. 외부와의 접촉은 방에 설치된 작은 텔레비전이 전부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나는 이 곳 저곳 홀로 살거나 외로운 노인들을 찾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 방문을 한다. 토론토, 몬트리올 미국, 한국 등.. 의외로 홀로 사는 시니어들은 그런대로 잘들 버티며 살고 있다. 그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늘 혼자였으니까. 공 신부님도 내 전화 방문 명단에 한 분이시다. 육신을 쓰는 봉사는 못하지만 이렇게 전화 봉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화 한 통이면 상대에게 위로가 될 뿐 아니라 나에게도 기쁨이 된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카톡으로 남의 그림이나 글을 옮겨 올리는 것보다 한통의 전화는 더욱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다.


신부님의 전화 방문은 그분께도 큰 위로가 됨을 알 수 있다. 며칠 전에도 전화를 드렸다. 신부님이 한국 선교지에 들어 가셔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지 8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 했다. 그 때 공항에 마중 나온 당신의 어머님께서 ‘너는 왜 불어를 그렇게 말 하는냐?” 고 할 정도로 한국 사랑에 빠져 자국어를 잃어버릴 정도였으니 그의 한국 선교 사랑의 깊이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겸손함과 작음과 가난과 단순함이 무엇인지를 말로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하여 몸소 가르쳐 주셨다. 책에서만 배웠던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삶의 향기가 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로 전해 진 것이다.


나는 생일이 빨라서 학교를 좀 일찍 들어갔다. 내 동창들은 호랑이 띠인데 나는 토끼띠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지금은 사라진 K고등학교에 22세에 취직이 되었다. 24세에는 고교 3학년 졸업 반 담임을 했고 그 후 프랑스 국비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거의 5년 간 빠리 소르본느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의 모교인 E 대학에 강사를 하게 되었다. 후에 전임강사 까지 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 생활을 접고 첫 딸을 낳은 후 남편과 함께 몬트리올로 훌쩍 이민을 왔다. 거기서 둘째 아들을 낳고 거의 10여년을 아기 엄마로 그리고 몬트리올 성당의 출범을 위한 내조 작업을 하면서 지냈다. 평범한 주부로 살면서 자존감 내려놓기 연습을 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사람들이 미세스 최, 혹은 아무개 엄마 라 부르면 소스라쳐 놀라는 내 모습이 한스럽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나의 호칭은 늘 교수님, 선생님 이였는데 평범한 가정주부로 변신 되어 있는 나를 새삼 깨달으면서 자존감 땅에 내려놓기 연습을 했다. 가끔은 한인을 위한 통역 봉사는 있었지만 딱히 직장 생활도 하지 않았다. 굶거나 먹거나 자기가 벌어 먹일 테니 집에서 아이들 잘 키우고 살림만 하라는 남편 덕에 나는 남들이 다 하는 비즈니스도 해 본 적이 없다. 10년의 긴 자존감 내려놓기 고난의 시기가 지나고 그 후 몬트리올 한인 성당에서의 봉사, 교구 사목위원(무보수)의 일을 하면서 정부 공인 번역 통역 일과 한인 을 위한 불어 교실을 열어 불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속 프란치스코 회 라는 영적 단체 일을 시작했다.


옛 껍질을 벗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 인생의 항해는 궁극에는 프 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길이였다. 그 항해의 나침반이 되어 주신 분이 바로 공 아영 신부님이시다. 몬트리올에서 약 1시간 이상 떨어진 소렐(Sorel)이라는 수도원에 계셨을 때다. 우리 평의회원들은 매달 한 번 씩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신부님이 계시는 소렐 수도원을 찾아 가서 회의를 했다. 우리가 그 분을 찾아 가면 우리를 큰 손님으로 맞아 주셨다. 유유히 흐르는 생 로랭 강이 바라보이는 회의실에서 길지 않은 그 분의 가르침을 받으며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뜨거웠던가! 입에 달고 하시는 말씀은 늘 단순하라! 겸손하라! 마음으로 가난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몬트리올에서 소렐로 떠날 때 우리는 늘 차 안에서 로사리오의 묵주 기도를 노래를 섞어 바치곤 했다. 5 단으로 된 로사리오기도 중간 중간에 아베마리아를 부르면 우리들 마음은 곧 하나가 되어 영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 인생의 길잡이신 신부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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