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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서쪽으로 난 창]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열다섯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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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9-16 06:39 조회1,9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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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783364_YW7Hrg8O_54198884d3f83da0174ed2f0e04d56ce3ad9d1d4.jpg박지향



초대장을 받았다. 나에게 청혼했던 남자가 자신의 결혼식에 나를 초대한 것이다. 사랑한다더니 결혼하자 하더니 겨우 몇 달 만에 나를 배신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큼지막한 “예스”를 포옹과 함께 선물했다. 


그 남자가 결혼식을 하던 지난해 봄, 하늘은 높고 화창한 날씨에 피기 시작한 꽃들이 골프장입구서부터 신랑신부와 하객들을 기쁘게 맞아 주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양가 가족과 절친한 친구 사십여명만 초대해서 점심을 먹으며 치러진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76세의 신랑 제프는 검정색 양복안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흰색 나비 타이를 단정히 메고 있었다. 살구 빛 롱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가 치장의 전부인 72세 신부 로라는 은은한 화장으로 기품을 더해 주었다. 결혼식은 주례도 주례사도 없었다. 백발의 신랑신부는 준비한 결혼 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의 큰아들이 성혼선언을 하는 것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양쪽 모두 절친한 친구와 직계가족만 초대했다. 그러다 보니 신랑신부의 성격과 사정을 훤히 알고 있기에 뻔한말이나 형식적인 표현은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 속에서 딱 맞는 축하 메세지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우리 아버지는 키가 작다고 하면 삐쳐요.” 하면서 말을 꺼낸 큰아들은 “그때는 시나몬을 듬뿍 넣은 사과파이를 만들어주면 금세 풀어져요” 하며 파이만 열심히 구우면 만사형통이라 알려준다. 그 말을 받은 로라의 딸이 “우리 엄마는 요리하는 건 좋아하지만 치우는 건 싫어하시니 설거지만 잘 하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요”하며 행복의 비결을 일러주었다. 


할아버지의 친구 폴은 자신보다 키도 작고 못 생겼지만 타고난 돈복과 여자복이 이해가 안 간다며 장난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친구는 고난을 뚫고 성실하게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며 진심을 담아 행복을 기원했다. 앉으려던 폴은 로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돈은 많지만 쓸 줄 모르는 흠이 있으니 쓰는 법을 가르치며 살아요” 했다. 로라 할머니는 자신도 돈 쓰는 재주가 없으니 그것이 큰 문제라며 이혼을 생각해봐야 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제프 할아버지가 “내가 결혼식날 이혼당하는 첫번째 신랑이 되는 거야?” 하시며 맞장구를 쳤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사람들 속에 앉아 있자 하니 개밥에 도토리같은 기분이 슬그머니 들고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할아버지와 하객들이 그냥 갈수 없다면서 내 손에 와인잔을 쥐어 주었다. 엉겁결에 받은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배신하고 떠난 제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하지만 로라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당신을 양보할 수 있어서 기뻐요.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사세요” 했다. 모두가 웃고 박수를 치는데 할아버지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버지가 배신한 여자가 또 있었군, 아버지는 도대체 몇 명의 여자를 배신한 거야?” 하며 할아버지를 바라다봤다. 그 말을 듣고 가만 계실 리가 없는 제프 할아버지가 “난 정말 나쁜 놈이야, 내가 레이첼을 배신하다니“하시며 두손으로 눈을 비비며 우는 시늉을 하셨다. 유머도 유전인지 아버지와 아들의 화려한 입담은 실로 대단했다.


할아버지와 내가 이런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한 건 일년전의 일이다. 내가 이벤트 코디네이터에서 다이닝 룸 서버로 포지션을 바꿔 일 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점심 시간이었다. 그날 내가 할 일은 커피와 차를 나눠드리는 일이어서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커피를 따라드리고 있었다. 제프 할아버지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 커피나 티가 더 필요하신 분이 계시냐 고 물었다. 한바퀴 빙 둘러보다 제프 할아버지 얼굴에 내 눈길이 멈췄다. 할아버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꼼짝 도 못하고 계셨다. 기도가 막혔다고 직감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다이닝 룸에 대기중인 간호사를 부르거나 없을 땐 비상코드를 당겨 간호사를 불러야 한다. 둘러보니 간호사가 없었다. 비상코드를 당기고, 간호사를 부르고 할 틈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할아버지 등을 세게 두드렸다. 몇 번을 두드렸는지는 기억에 없고 할아버지는 연거푸 기침을 하시더니 거친 숨을 토해 내셨다. 그 사이 직원들과 간호사가 달려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분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는 의무실로 모셔가 안정을 취하셨고 저녁시간엔 다시 밝은 얼굴로 식탁에 앉으셨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각별히 대우하신다. 나를 부르실 땐 내 이름 대신 “달링” 하신다. “달링”할 때의 목소리는 가진 것 중 가장 달콤한 부분을 꺼내 쓰시는데, 뚝뚝 떨어지는 꿀물때문에 옆에 계신 분들이 모두 혀를 내 두르신다. 그런 할아버지가 나에게 청혼을 하신 건 댄스파티 에서다. 댄스파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땐 할아버지와 결혼을 약속한 로라 할머니가 찾아와 늘 함께 즐기셨다. 로라 할머니는 딸과 함께 살고 계셨는데 그날은 딸의 수술이 있던 날이라 못 오셨다.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에 잘 다려진 검정색 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오신 할아버지가 로라 할머니 대신 나에게 춤을 청하셨다. 내가 일을 하는 중이니 1분만 시간을 드리겠다고 했다. 1분은 너무 짧다며 “레이첼! 우리 결혼하자, 그럼 밤새라도 함께 춤출 수 있잖아” 하셨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로라가 알면 내 머리털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뽑아 놓을 테니 그냥 내 남자친구로 남아달라며 장단을 맞춰 드렸다. 


영문학을 전공한 박학 다식한 할아버지는 절대로 지식 자랑이나 자신의 성공담같은 건 꺼내지 않으신다. 오가는 대화속에서 자신이 주연이 되고도 남지만 언제나 조연을 택하시고 트로피는 상대방에게 안겨주신다. 그런 할아버지 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즐거운 대화가 오가며 웃음꽃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키 크고 잘 생긴 분들도 계시지만 잘 생기고 근엄해서 다가서기 힘든 분 보다는 유머러스 하고 편안한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친구 말처럼 제프 할아버지는 부자다.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니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수 성가하셨다. 가난을 견디지 못해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던 아내를 용서했고 친구로 남았다. “용서하면서 더 많은 것을 얻었 어” 하시는 할아버지가 부와 행복,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함 밑에 깔고 앉은 유머와 재치가 아닐까 한다. 유머는 마찰부분을 부드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가 되었을 것이고 껄끄러운 사업관계를 매끄럽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 억울한 감정이 일어날 때에도 할아버지는 가벼운 유머로 대처하신다. 일생에 한번이라도 심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상황에 가볍게 대처하신다. 성공비결과 좌우명을 묻자 비결도 좌우명 같은 것도 없다 시며 영화 속 대사인 “Why so serious? “그 말이 참 좋다고 하셨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우리들의 인생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날이 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벼워졌던 어깨에 다시 무게가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집 주변 산책로를 걷는다. 걸을 땐 우주의 나이와 할아버지 말씀을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성공 비결도 좌우명도 아니었다는 그 말, “Why so serious? “나도 그 말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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