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난 창] 쇼팽 사용법(열여섯번째 이야기)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LIFE

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쇼팽 사용법(열여섯번째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9-28 17:09 조회1,462회 댓글0건

본문

758783364_YW7Hrg8O_54198884d3f83da0174ed2f0e04d56ce3ad9d1d4.jpg박지향

 

먼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흐르고 너도 흐른다. 실개천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듯,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가듯, 서로 다른 강줄기를 타고 흘러 흘러 이 곳 리타이어먼트 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일년에도 몇 십분이나 된다. 내 이름 하나면 통과하지 못하는 문은 없었다는 높으신 분과, 내세울 이력도 자랑할 이름도 없지만 고개를 절로 숙이게 만드시는 분들이 함께 살겠다고 선택한 곳이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 선물한 주름진 얼굴에, 굵어진 손마디가 눈물 겹도록 아름다운 노년이다.

 

입주하실 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마지막 길동무들이기에 화려했던 왕년은 벗어 던지고 지팡이 하나 짚고 들어오신다. 세월이 깎아 둥글고 넉넉한 마음이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챙기며 둥글둥글 살아 가신다. 그런 동무들도 삐걱 거리는 날이 있다. 팔 구십 년을 살아온 힘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나 보다.

 

저녁식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할머니 두 분이 언성을 높여 가며 잘잘못을 따지고 있었다. 매리와 도로시였다. 몇 분이 말리고 간호사가 달려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성격이 뾰족하신 매리 할머니가 가시를 꺼내 찌른 게 틀림없다. 매리 할머니는 자신만 모르는 공인 ‘트러블 메이커’로 반갑지 않은 별명이 붙은 분이다. 얼마나 억울했던지 도로시 할머니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매리 할머니는 더 큰 목소리를 꺼내 흔들며 승전고를 울리고 싶어 했다. 

 

그때였다. 다이닝 룸을 가득 메우는 피아노 소리, 프랭크 할아버지가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끔 들려주시는 캐논 변주곡이었다. 그날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른손 멜로디에 평소보다 많은 장식을 달아 빠르고 화려하게 연주하셨다. 어떠한 잡음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두드리셨다. 순식간에 전쟁은 끝이 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프랭크 할아버지는 쇼팽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78세의 피아니스트다. 말년의 베토벤처럼 할아버지는 소리를 못 들으신다. 보청기를 했지만 별 도움이 안된다. 소리를 잃으면 언어구사 능력도 떨어지는지 할아버지는 꼭 필요한 말씀도 못 하실 때가 많다. 언제나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이라 할아버지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대화가 필요할 때면 스무고개 하 듯 연거푸 질문을 해서 대답을 이끌어 내고 기분을 파악해야 한다. 대신 할아버지의 기분을 읽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할아버지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심신이 즐겁고 가벼운 날은 경쾌한 춤곡 “쇼팽 왈츠 6번” 일명 “강아지 왈츠”를, 심신이 괴롭고 우울한 날엔 더 없이 슬픈 “녹턴 20번”으로 할말을 다 하신다. 이 세상엔 쇼팽만이 존재한다는 듯 가장 좋아하시는 곡도 “쇼팽 발라드 1번 G 마이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연주때마다 조금씩 분위기를 달리 하시는 이 곡은 영화 “The Pianist”속 슈필만 다음으로 할아버지가 최고다. 

 

슈필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의 잔혹함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다. 영화 “The Pianist”에서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으로 분한 애드리안 브로디는 페허가 된 건물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독일군 장교 호젠펠드가 보는 앞에서이 한 곡의 연주가 끝나고 나면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에 도입부에서의 흔들리는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더 몰입하게 만든다. 하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은 남자의 손가락은 건반위를 날아 다니며 피아니스트 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창으로 넘어오는 창백한 달빛을 받으며 혼신의 힘을 다 해 연주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숨 한번 쉬지 못하고 빠져 들었던 자신을 떠 올릴 것이다. 그 때 연주한 곡이 바로 “쇼팽 발라드 1번 G 마이너”다. 온몸에 돋아난 솜털까지 모두 일어나던 전율을 오래도록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명곡이다. 

 

할아버지 프랭크는 저녁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피아노 앞에 앉으신다. 거의 매일 연주하시고 언제나 짧은 것으로 한 곡만 들려주신다. 늘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연주 시간이 10분도 넘는 이 곡 “쇼팽의 발라드 1번”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자주 찾아 드니 듣는 우리는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치매를 앓기 시작한 할아버지는 단기 기억 상실증이 심해지고 있다. 10분전에 주문한 식사 메뉴를 기억하지 못하신다. 방금 식사를 하고 가셨는데 하루 종일 굶었다며 되돌아오시기를 일주일에도 몇 번씩 반복하신다. 고운 은발머리를 단정히 빗고 다니시던 할아버지가 머리에 까치집을 짓는 날도 허다해 졌다. 사라져가는 청력과 기억력도 문제지만 떨어진 체력 탓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피아노 연주는 문제가 없다. 단지 예전에 비해 속도가 조금 느려 지고 힘이 떨어졌을 뿐이다. 신기한 건 날이 갈수록 할아버지 연주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는 것이다.

 

낙엽이 지고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아무리 단단히 걸어 잠근 철벽같은 가슴이라 할지라도 빗장을 풀고 야 만다. 이제 곧 무덤으로 갈 우리가 싸울 일이 뭐가 있으며, “이기고 지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고 자문하게 하신다.  할아버지의 연주가 시작되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구비구비 돌아온 인생길에 지치고 상처입은 영혼들이 연민의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녹아 들고 만다. 슈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할 때도 그랬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슈필만 앞엔 쫓기는 자도 쫓는 자도 없었으며, 독일군도 전쟁도 없었다. 그곳엔 오직 한 명의 피아니스트와 한 명 관객만이 존재했다.

 

이렇듯 음악은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어 철옹성 같은 벽도 한순간에 허물어버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현대인들 마음의 거리는 명왕성만큼이나 멀어져 버렸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말이 안 통한다며 답답해하고 내 말이 안 들리느냐고 멀쩡한 귀를 나무란다. 고맙게도 언어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음악이 대신해주는 경우를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자주 경험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통하는 것은 음악이라 하지 않던가.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수선화에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 말한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고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마을로 내려온다고 시인의 말처럼 우리들의 삶은 노년으로 옮겨 갈수록 살아가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모두가 외로운 섬이다.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할아버지는 외롭다. 외로움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서도 피아노 앞에 앉으신다. 하루에 한번 한 곡의 연주로 섬과 섬을 연결하는 것이다. 잡다한 말 대신 한 곡의 쇼팽으로 세상의 소음을 잠 재우시는 할아버지는 백 년의 내공으로도 건너지 못하는 강 위에 다리를 놓으시는, 78세의 아름다운 현역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1,071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