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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코너링(열일곱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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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0-11 18:35 조회1,5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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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나는 치어리더다. 내가 기꺼이 치어리더를 자처하고 나선분은 86세의 할머니 로레인이다. 할머니는 지금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계신다.


작고 가녀린 몸매에 짧은 은발머리를 검정색 실 핀 두개로 단장하고 다니시는 할머니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눈으로 들으신다. 작은 얼굴을 반이나 차지하는 커다란 검정 뿔 테 안경을 끼고 다니 시는데 그 모습이 흡사 왕잠자리 같다. 궁금한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할머니 눈은 언제나 바쁘다. 새 입주민이나 누군가 방문자라도 나타나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시는 지 눈동자 구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성능 좋은 보청기를 했지만 별 도움이 안되는 귀를 눈이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시는 할머니는 빌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그 조그만 몸에서 그렇게도 큰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크고 높은 톤의 목소리 때문에 할머니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면 합석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상이 털리고 만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나이 경력 출신지까지 모두 물어보신다. 잘 듣지 못하시니 대화를 하는 상대방은 최선을 다해 높고 커다란 소리로 대답해야 한다. 대답이 끝나면 상대방이 답한 것을 자신이 제대로 이해했는지 소리 높여 재차 물으시니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대화의 내용을 모두 다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모두가 할머니와의 합석을 꺼린다. 


한번은 새로 들어오신 케리 할머니와 조 할아버지 부부가 비어 있는 할머니 테이블에 합석하셨다. 그러자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신이 난 할머니는 호구조사부터 시작하셨다. 부부냐, 자식은 있냐, 언제 입주했냐, 몇 호실이냐 등, 쉼 없는 질문과 대답이 바쁘게 날아 다녔다. “응, 재혼했구나, 자식은 있어?”하고 물으셨고 “딸 둘 아들 하나예요” 답하셨다. 그러자 “딸 둘 아들 하나라구?” 하며 목청을 높여 확인하셨다. 다이닝룸에 앉은 모든 이들에게 두 분의 신상소개를 단 한번에 끝내 주셨다.


원치 않았던 개인사까지 모두 털린 두 분은 다시는 그 자리에 앉지 않으셨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아예 시도조차 안 하는 분도 있지만 함께 살아갈 공동체이니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한번쯤 앉는 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즐겁지는 않은 표정이다. 말 하고싶지 않은 개인사를 답해야 하는 불편함보다 목청을 높여 대화해야 하니 음식의 맛은커녕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 식사 시간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꼭 필요한 말이 아니고는 미소를 지어 줄 뿐 대화를 피한다.  


솔직 담백한 성품이 잘 닦아 놓은 유리창 같은 할머니는 숨길 것도 숨기고 싶은 것도 없다. 그렇다고 자랑거리가 넘치는 인생도 아니었다. 말하지 않고, 두드려보지 않고 건넌 돌다리가 가르쳐준 교훈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난 결혼을 두 번 했어, 첫번째 남편과는 사별했고 두번째 남편과는 이혼했어” 하셨다. 왜 이혼했는지 묻지도 않았건만 “아주 나쁜 놈이었거든 “하시며 나쁜 놈이라 하는 이유를 시원하게 설명해 주셨다. 


한 살 터울로 낳은 세명의 아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첫 남편을 잃었다. 첫 남편과의 몇 년은 더없이 행복 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햄버거 가게를 함께 하면서부터 부부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잠시도 떨어질 틈없이 붙어 있어야하는 환경에 여과없이 드러나는 서로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보며 실망도 했고 사소한 의견 대립에 싸우는 날이 늘어갔다. 두 사람 모두 에게 휴식도 필요했고 각자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쳐 생각만 하고 살았다. 


젊은 시절 수줍음도 많고 말수가 적었던 로레인은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고 불만이 있어도 참고 할말이 있어도 참았다. 그러다 보니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언젠가, 말 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날은 오지 않는다. 가끔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는데 말하지 않는 내 맘을 상대방이 어찌 알겠는가? 말을 해야 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겨울, 사소한 문제로 크게 다툰 뒤 로레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고 로레인을 찾아가던 남편은 커브길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마음이 급했을까, 오토바이를 즐겨 타던 남편은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마주오던 차와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사를 당했다. 남편의 사망 보험금과 집이 있었고 함께 운영하던 햄버거 가게가 있었지만 돈으로는 메꿀 수 없는 구멍이 있었다. 많이 싸웠지만 사랑했던 순간 또한 많았던 남편의 빈 자리는 너무나 컸다. 혼자 하던 가게에 문제가 생겨 렌트비 내는 것이 버거웠고 아이들도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하는 로레인은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다급했던 그녀는 남편을 보내고 일년 뒤 서둘러 재혼을 했다. 단골 손님이었던 남자는 로레인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독신이었고 잘 생긴 남자가 바쁠 땐 가게일도 도와주고 아이들 과도 잘 놀아주는 자상함까지 고루 갖춘 남자였기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급히 먹은 밥은 체하고 커브길은 급하게 돌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뼈아픈 대가를 치르고서 야 알게 되었다.  코너에 몰린 그녀가 너무 급하게 핸들을 돌려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결혼을 하자 남편은 햄버거 판 돈을 빼 내가기 시작했다. 콩깍지가 잔뜩 낀 눈과 귀는 주변의 만류나 충고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집도 가게도 다 내어주고나서 야 남편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중장비 기사로 일을 한다더니 운전을 한적은 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해고당한 뒤 변변한 직업도 집도 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햄버거 가게에서 로레인을 알았고 그물을 던진 것이었다. 가져간 돈은 술과 술집에서 만난 여자들의 입에 다 쏟아 부었다. 또다른 희생양을 발견한 남자는 유유히 떠나버렸다. 한때 남편이라 믿었던 남자는 코너에 몰린 여자를 아예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아주 나쁜 놈’이었다.


‘나쁜 놈’과 이혼을 하고 세 아이를 데리고 월세집을 전전하던 그녀에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는 남자가 나타났다. 재혼으로 인한 상처가 컸던 로레인은 결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4년이란 시간동안 변함없는 사랑과 도움을 주던 로이가 안전한 돌다리 라는 걸 확인하고 동거를 시작했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여느 부부 못지않게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사랑하며 살았다. ‘내 남자친구’라 표현하는 할아버지 로이는 전 재산을 32년을 함께 산 할머니에게 남기고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일년 넘게 소식한번 없던 둘째 아들도 ‘아주 나쁜 놈’ 도 할머니를 찾아왔다. 돈 냄새를 맡고 온 하이에나들이었다. “나 돈 있어, 그런데 너 에게 줄 돈은 없어” 하고 쫓아 버리셨다는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 시원스러운 웃음 소리에 반해버린 내가 “죽는 날까지 쓰고 남은 돈은 싱글 맘을 위한 단체에 기부할거야” 하시는 할머니의 치어리더가 되고 말았다.  


자동차 경주시 승패의 관건이 코너 링인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다. 급한 맘에 커브길에서도 있는 힘껏 액셀레이터를 밟으면 전복되거나 미끄러져서 차선을 이탈해 버리고 만다. 코너로 진입하기전 미리 속도를 줄이고 앞 뒤 차와의 거리도 확인하며 천천히 돌아야 한다. 


두 번 넘어졌지만 세번째 코너링에 성공한 로레인은 지금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선수는 결승점이 눈앞이라고 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할머니는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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