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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고 이상선 장로 간증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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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 이상선 장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14 21:26 조회1,7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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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hristiantimes.ca/data/cheditor4/1708/SpkCUPZqxC.png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시1:1-3절입니다. 나름대로 복있는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았지만 막상 살아온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죽을 고비를 5번 넘기면서 그때마다 하나님 살려주시면 내 평생 교회를 건축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100% 죽음 직전에 살아났고 결국 경기도 수원에 자리를 잡으면서 처음에는 수원 제일 교회 창립 멤버로 시작하여 건축에 도움을 주다가 제이교회를 개척하면서부터 부지를 기증하고 건축비를 지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약 25개의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직원들이 많을때는 백 명이 넘었지만 돈이 모아지면 사업에 재투자하고 적립을 해야하는데 신기하게 오백만원만 모이면 전국에서 알지도 못하는 목회자들께서 오셔서 교회 건축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교회 짓는 용도로 확실하게 약속만 이루어지면 교파를 초월해서 지원을 했습니다. 물론 오백만원이 완벽한 교회를 짓는 전체 비용은 아니지만 당시 전쟁 후라 변두리 집 한 채가 50만원이면 살수 있는 시절이기에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오래 했지만 자녀들에게 단돈 10원도 물려주지 못 했습니다.

지금 많이 늙어서 체력에도 무리가 있지만 한국에 가능하면 안 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 도움을 받은 교회들이 많이 성장을 했고 그분들이 내가 한국가면 찾아와서 그분들은 은혜를 갚는다면서 돈을 주는 것이 부담이 되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한번 건축비를 도와주면 그 시간부터 절대로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가지 않는 관례를 지켜왔기에 그렇습니다. 오래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기념 사업에 기록하려고 제 간증을 여러 차례 요청을 했지만 단호히 거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과거를 돌아보면 미안한 일들도 있고, 사업이 어려워도 교회 건축지원은 지속하다가 마지막에 제주도에서 오셔서 도움을 요청하신 목사님 단 한분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차비만 드려 보낸 일이 가슴에 남아있고, 또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교회 건축지원하느라 학비 마저도 제대로 주지 못해 모두가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친 아들딸들과 빚을 얻어서라도 건축비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제주도 목사님께 더불어 미안했다고 꼭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이 간증을 씁니다.

 이글을 보시는 독자들께서도 이 늙은이의 진심어린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라면서 70년도 후반에 6년 동안 수원 제일교회에 출석했던 숭실교회 변상호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지난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1)


지금 조국 대한민국이 전쟁 관련 뉴스들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저는 6.25가 있기 전에는 공포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슬픔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제 고향은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사리입니다. 서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는 남포와 대동강이 힘차게 흘러가고 동쪽으로는 사리원, 남쪽방향으로는 해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 마을을 품고 있는 장엄한 구월산이 있어 계절마다 찬란하게 변화하는 말 그대로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고향 중에 아름답고 그리운 고향입니다. 이제 백세를 훌쩍 넘긴 시점에서 일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가물가물하고 전화기도 어디 두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웬일인지 어린 시절 뛰놀며 자라난 고향 산과 강 언덕 동네 다리, 진달래 피던 그곳이 이리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향 가는 열차를 타고 달려가면 백발의 늙은 나를 고향은 덥석 안아 줄 것 만 같고 인자하고 어질던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엎드려 울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너는 꼭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마을 언덕배기 미루 나무 옆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부모님들의 소원대로 총알이 소나기 처럼 쏱아붓던 38선을 넘어온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 없이 다 해 주면서 피난살이 서러웠던 이야기들을 일러바치고 싶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집안은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큰아버지는 은율군 소재 교회에서 그 당시 영수로 지내셨습니다. 당시 군에서 영수는 단 두 분만 계셨고 우리 부모님도 믿음 좋으신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큰 사과 과수원 두 개를 운영하였기에 언제나 여유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한집 건너면 모두가 친척이기에 지금 생각하면 천국을 옮겨 놓은 듯 오순도순 살아가는 그런 고향이었습니다.

봄이되면 온 천지에 사과 꽃이 하얗게 피고 가을이면 그 사과가 잘 익어서 또 온 땅이 빨갛게 영글어가던 그리고 상큼한 사과 향기는 마을을 진동시켰기에 그때가 그리워서 지금도 저는 사과를 좋아합니다. 우리 집은 사과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당시 사과는 아주 귀한 과일이기에 집안에 제사나 잔치에만 사용되고 서민들은 사과를 실컷 먹을 수 없는 시절 저는 과수원 집 아들이기에 온 마을 아이들에 부러움에 대상이었고 학교에 가면 두 사람은 조선 선생님 또 다른 두 사람은 일본 선생님이셨는데 사과 덕분에 선생님들에게도 저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특히 복음이 북쪽지역에 먼저 들어온 혜택으로 우리 집안은 일찍이 신 문명에 눈을 떠서 다른 아이들은 서당을 다녔지만 저는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의 고향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기억이 없는 좋은 생각과 좋은 추억 뿐이니 그래서 더욱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고향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2)

 


이제 한 달이 지나면 추석이 다가옵니다. 환하게 떠오른 달을 볼 때도 그렇고 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이 때가 되면 유독 고향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옛날 어른이셨는데도 너무나 자상하셨고 끔찍이 자식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우리 마을에 아이들이 백 여명이 넘어도 학교가 없었고 모든 아이들은 서당을 다녔습니다. 난 음율군 읍네에 있는 소학교를 걸어서 다녔는데 어린 내가 걸어서 가기 힘들다 시며, 떵떵거리며 사시던 농사를 모두 소작농들에게 도지로 주고 이십 리 떨어진 학교 근처에 작은 초가집을 얻어 평생 남의 일 안 해보신 아버지가 소달구지로 집집마다 짐을 배달하셨습니다. 이 부족한 큰아들 신교육 시킨다고 하루 종일 일하시고 지친 몸을 이끄시고 그렇게 번 돈으로 찐빵을 사서 들고 오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목이 메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신 것은 이 못난 장남 잘 돼야 된다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이 아들은 그런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께서 한 번도 못 잡수셔보신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에 가서 구경을 할 때면, 소달구지 끌고 가시던 아버지 뒷 모습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습니다. 그런 생활을 꼬박 삼 년 반을 하셨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아파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4학년부터 그 당시 부자 일본 아이들만 겨우 가질 수 있는 자전거를 사 주셔서 일부러 따르릉 소리를 내면서 그것으로 온 마을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높고 웅장한 구월산에서 쉼 없이 쏟아지는 5개의 계곡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줄어들지 않는 물 때문에 주위에는 풍성한 농토를 이루었고 내 고향 사리 마을도 그렇게 넉넉하여, 20-30대 한참 나이에는 대동강을 무대로 평양에 사과를 팔러 다니는 시절이었다면 어린 나의 청소년 기간은 구월산 계곡이 놀이터였고 무엇보다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와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셨던 아버지가 있었기에 내 어린 시절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특히 독실한 신앙을 가지시고 자식들에게 그 신앙을 물려주시려고 선교사들께서 가지고 계시던 서양 악기들이 어디에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소를 팔아서라도 사서 장남인 저를 가르치셨고 덕분에 피아노, 플륫, 트럼펫을 일찍이 그 마을에서 제일 먼저 연주하였으며 특별히 클라리넷을 아주 잘 하셨습니다. 언젠가 군단위로 하는 연합집회를 인도하게 된 이후 자연스럽게 교회 성가대를 이끄는 18살 총각 집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믿음의 아버지가 물려준 복음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나도 자녀를 둔 아버지인데 내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내게 베푼 그 사랑, 만 분의 일도 못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늙어서 아이들을 챙길 힘도 없답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가 더 보고 싶습니다.    

 

 (3)


구월산에서 쏟아지는 구월천 계곡에서 멱감고 물놀이하며 고기 잡던 소년은 자라나서 이제 어였한 20대 청년이 되었습니다. 뒤돌아 보면 지금 20대와 그때 20대는 모든 면에서 달랐습니다. 철이 들었고 책임감이 확실하고 집안을 너나 할 것 없이 걱정하는 환경에서 저도 어였한 가장이 되었고 반대로 아버지는 많이 늙으시어 집안의 큰일은 자연스럽게 장남인 제가 해결을 하여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평양을 드나들며 사과를 팔아야했고 팔도에서 모인 내노라 하는 장삿군들이 모인 평양에서 많은 객주들을 상대하는 일이 시골 사람인 나의 상술로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신학문을 배운 저를 평양 객주들, 특히 큰 손들이 신용으로 믿어주고 배운 사람이라고 깍듯이 대우해 주었기에 한 번도 부당한 거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남포에서 평양까지는 기차로 2-3시간이지만 사과 양이 워낙 많아 그 운임을 절감하려고 남포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사과를 가득 실은 배로 대동강을 거슬러 밀물과 썰물을 계산하여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며 가다쉬다를 반복, 평양까지 3일 걸리는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피 끓는 청년 시절,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배를 빌려서 하다가 나중에는 친구와 둘이서 배를 샀는데, 물론 돗을 이용한 무동력이었지만 그때 선원들의 기술은 대단했습니다.

남포항도 전국에서 몰려드는 큰 항구 도시지만 그 당시 동평양(강을 건너서는 서평양)에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로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 특히 옷 잘 입고 잘생긴 일본 사람들이 북적대는 상업의 도시로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다 살수 있고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모든 유흥업소가 밀집된 생기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큰 거래를 할 때는 당연이 우리 장남이 가야 속지 않는다고 그렇게 아버지는 저를 믿고 의지 했습니다.

이제 나이 20대,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 시절 속에서 날마다 징집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여자는 정신대로 남자는 징용으로 군에서 면으로 매달 차출이 이루어지는 그때 부모님은 저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남 징용 안가고 장가들어 가업을 이어가기를 소원하는 기도가 이어지는 그때 마치 같은 군이지만 우리 마을에서 작은 고개 두 개 넘으면 있는 일도면에 믿음 좋은 집안의 처녀와 부모님들 사이에 혼인이 약속 되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신부 얼굴을 보던 때, 저는 처갓집에서 혼수 옷을 맞추어 준다고 결혼식 몇 일 앞서 옷 치수 재러 오라고 해, 가서 처음으로 색시 얼굴을 보았습니다. 믿음 좋은 집안이라고 설명을 많이 들었지만 막상 처음 본 새색시는 따뜻하고 착한 수줍은 미소로 반겨주었습니다. 사실 속으로는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생각 했습니다. 저 처자는 신랑을 잘 만났다고요, 대동강을 타고 다니며 사과를 팔아 돈을 한 가방씩 벌어서 평생 고생 안 시키고 호강시킬 자신이 있었습니다.

만약 비극적이 6·25전쟁이 없었다면 제 생각이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4) 


세월이 흘러서 제 나이가 30세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저에게 3자녀를 주셨습니다. 그토록 정정하시던 아버지는 날로 기력이 떨어지시고 반면에 저는 비록 일제 시대를 살아가지만 가정에서는 장남의 자리를 잡았고 세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배운 신학문에 기초하여 아버지가 하시던 과수원 농사를 더 공격적으로 발전시켜서 아버지께서 하시던 큰 과수원과 같은 과수원 하나를 더 구입하였고 먼 훗날을 내다보며 근처 두 군데 야산을 매입하여 남들이 볼 때 성실하게 일하며 재산을 증식한다고 칭찬을 많이 듣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사과는 홍옥과 국광이 최고 인기였고 특히 색이 진한 빨간색이 되고 굵어야 일 등급을 받기에 사과가 익어 갈 무렵이면 사과 열매 근처 잎을 모두 따서 햇볕을 최고로 받도록 하여 우리 사과는 80% 1등급을 받았고 당시 사과 한 상자가 쌀 한 가마니와 맞바꾸는 가격으로 금값이었으며 거기다 거의 일본으로 수출을 하는 시기에 큰 나무에서는 백 상자까지 땄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배운 인생의 교훈이 많지만 무엇보다 믿음을 지키며 교회와 주의 종들을 섬기는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 아버지 같이 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했습니다. 당시 복음의 씨앗이 평양에서 번져서 우리 사는 고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를 나오고 그리고 그때는 교회가 별로 없기에 교회간에 경쟁이 없었고 그러나 교회마다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로 언제나 감옥을 들어가시는 일들이 많았고 교회는 늘 이런 일로 기도했으며 아버지는 고난 받는 종들을 극진이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목회자를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는 것도 아버지가 가르쳐준 축복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사과를 매입하여 전국 도매상에 넘기는 객주는 당시 오늘날의 재벌들 수준인데 내가 사과를 한 배 가득 싣고 평양 객주에 가면 의례히 담배와 술을 권하지만 나는 아버지께 배운 대로 일언지하 거절하며 크리스챤임을 밝혔고 그런 나를 객주들은 더욱 인정했습니다. 또 한 달에 2-3번 평양에 가도 아예 그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마지막 기차로 남포로 내려와서 잠을 잤습니다. 이유는 그곳에 잠을 자면 자연이 객주들을 가까이하게 될 것이고 그들과 어울려 당시 유명하던 평양기생 집을 들락거리게 되었을 것이기에 언제나 신앙에 빈틈을 내주지 않아야 된다는 부모님의 믿음 관리법을 실천 했습니다.

 당시 내게는 어쩌면 필요한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과 제 안사람의 가슴은 점점 타 들어 가게 하는 것이 징용이었습니다. 많은 동네 친구 중 이웃집의 젊은 여자는 정신대로 남자는 징용으로, 뒤돌아보면 소위 빽 없고 돈 없는 사람 순서로 차출이 되는 것이 가슴이 아팠지만 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나날 속에 드디어 내게도 올 것이 왔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동원해 연기해왔던 징용 통지가 온 것 입니다.

       

(5)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부모님과 집사람은 이런 날이 올까봐 눈물의 시간을 보냈는데 다시, 온 가족이 기도로 매달리면서 길을 찾는 중에 공직에 나가는 방법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치하에서의 공직이란 우리 조선 사람들 눈에 언제나 ‘친일’이라는 부정적인 명칭이 따라다니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우호적인 공직은 산림 공무원입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쳐서 처음으로 발령 받은 곳이 지금 삼팔선 이북의 강원도였습니다. 공무원 신분으로 징용은 면했지만 집안에 과수원과 할 일이 태산 같이 많고 특히 사랑하는 부모님과 처자식을 멀리 두고 첩첩 산골에서 일 년을 보내야 했는데 근무하는 시간 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결국 하나님은 그때도 기도를 쌓는 기간으로 주셨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외로움과 언제 끝날지 모를 이별의 아픔을 견딜 때 집에서는 팔방으로 도움을 요청하여 다시 내무 공무원 시험 날짜를 알아냈고 그 시험에 합격되면서 우리 마을 면사무소 주사로 발령 받아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것이 일제 강정기 마지막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산림청을 포함한 3년의 공직이 나의 과거 이력서입니다. 어쩌면 부끄러운 과거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받으며 정부의 지시도 따라야 하지만 고향을 사랑하고 내 부모님이 계시고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고향 분들은 나를 잘 도와 주었고 물론 부끄러운 일도 안했지만 그분들이 한없이 고맙기만 합니다. 아마 삭개오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이 있기에 4배로 갚겠다고 큰소리 쳤을 것 입니다.

일제 말기, 공출이 극심했을 때 차라리 친족으로 있는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공정하게 배분하면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때도 우리 가족은 언제나 눈물의 기도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조선의 앞날을 열어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고 해방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곧 망한다고 귀뜸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징용을 면한 혜택을 가슴앓이로 견디어 가다가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이 되었습니다. 음율군과 황해도 전체가 들석이는 만세소리는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모두가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달리고 서슬퍼렇던 일본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서로를 위로하며 그간 고생했다고 모두들 따뜻한 손을 잡았습니다.

진절머리 나던 일본이 물러가고 다시 가장의 자리에서 가업을 돌보며 이제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 분위기가 이상해서 그날은 아버지께 사과를 평양 객주에 갖다 주고 오라고 했더니 물건을 중간에 맡기고 빈손으로 오셔서 6·25 전쟁으로 평양 사람들이 다 피난을 갔고 온통 피난민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했으며 하늘에서는 요란한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는 전쟁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6) 


온통 전쟁의 그림자가 뒤덮은 고향은 모두가 공포에 질렸고 나는 장남으로써 급히 자전거를 타고 남포항으로 달려가는데 웬일인지 길에 수 백 명의 국군들이 피난민을 막으며 이제 국군이 이겼으니 피난 가지 말라고하여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예감이 이상했습니다. 전쟁이 지난 밤에 일어났는데 끝났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아 남포를 향해 속도를 내는 나에게 국군복을 입은 군인이 총을 들이대며 이북말로 자전거를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짜 국군 행세를 하는 인민군이었습니다. 큰 재산에 속하는 자전거를 거부하는 나를 향해 총 수 십 발이 귓전을 스치고 날아가는 위협을 했고 처음으로 죽을 고비가 자전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자전거를 뺏기고 먼길을 절뚝거리며 집으로 오는데 눈앞에 아른거리는 가족이 걱정되어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그 먼 길을 달려서 집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죽음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때마침 고향에 국군 중위로 있던 고향 친구가 가족 걱정이 되어 부대를 이탈하여 달려 왔다가 30명의 젊은이들을 모아서 마을을 지키자는 치안대를 조직했습니다. 이제 군인이 아니면서도 민간인 신분으로 그것고 북한 땅에서 인민군들과 싸우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보도 연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인민군 앞잡이가 되는 직함이었는데 가입 안해도 죽고, 가입하여 활동하면 국군에게 죽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 당시 젊은 남자들의 처지였기에 어차피 죽을 일만 남은 남자들이 가족을 지키다 죽을 길을 선택했는데 무기는 국군 중위가 가진 총 한자루가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동쪽 바다 끝자락 섬에 들어가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맨손으로 적군의 무기를 뺏는,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에 그지 없는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우리를 잡으러 섬으로 들어오는 적군을 다 이겨서 수십 자루의 총을 가지고 목숨을 보장 할 수 없는 전투를 날마다 벌이며 또한 함께 결성된 동료들의 죽음을 수 없이 두 눈으로 보아야만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며 죽음이 올 때마다 ‘하나님 살아서 남쪽으로 가게 해 주시고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면 교회를 짓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며 닥치는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견디었습니다. 고향의 지형을 잘 아는 잇점을 활용하여 나는 이렇게 군번 없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식량을 가지러 육지로 나왔다가 5명이 잡혀서 한 줄로 세워놓고 차례로 죽이는데 4번째 내 차례에 총을 쏘려는 군인 뒤에서 ‘그놈 주머니 뒤져보라우’란 말이 들렸고 주머니엔 별로 중요한 것도 없었는데 ‘그 놈을 살려주라’라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그 몇 초간의 공포 속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제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 주셨습니다. 몇 일 후 다시 육지에서 완전 포위되어 십 여 명이 숲에 숨어있는데 손들고 나오면 살려준다며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그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을 때, 친구 손을 잡고 눈짓으로 ‘절대로 나가면 안돼’라고 하여 친구는 내 말을 믿었으나 다른 동료들은 그들의 말에 속아서 밖으로 나갔다가 우리가 수풀에 숨어서 지켜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쏴 죽이는 그들의 눈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나의 기도는 과연 어떤 몸부림이었을까? 기침만 콜록 나와도 총알 백발이 날아오는 그 때 기도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다짐 했습니다.  

 

(7) 


전투는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인민군 정예부대는 다 남쪽으로 갔고 후방 인민군들이 우리를 수 없이 공격 했고 우리도 끝까지 저항을 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동료가 죽고 밀리고 진격하고.... 섬을 기준으로 오랜 전투로 인해 식량이 떨어지면 육지로 나오는데 그 날도 육지로 나왔다가 포위를 당하여 죽을 상황에서 산속 땅굴에 이틀을 숨어 있다가 어느 새벽에 조용한 틈을 타서 섬으로 달려갔는데 길목에 3명의 동료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어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도 우리 보다 한 발 먼저 뛰어가다가 저들이 묻어 놓은 지뢰를 밟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죽을 것인데 그들이 먼저 밟아서 우리가 살았던 사실을 알고 저는 통곡을 했습니다.

우리의 소식을 유엔군이 알았고 그래서 전쟁이 발생한지 일 년이 지나서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미국 군함이 섬으로 왔고 목포로 간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긴채 사랑하는 고향과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2살 막내와 4살 딸, 6살 장남을 남겨두고 눈물의 기도를 하면서 남쪽으로 오는 배를 탔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고향 산천을 보면서 흘린 눈물은 눈물이 아닌 피였습니다. 그리고 기도 했습니다. 남한에 가서 교회를 짓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슬픔으로 소처럼 엉엉 울면서 이틀 밤을 지나 목포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주머니에는 5환, 쓰지도 못 하는 이북 돈이 있었습니다. 당장 오늘 저녁을 굶어야 하고 어디서 이슬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런 내가 교회를 짓는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보따리 들고 외삼촌 집으로 가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수 많은 피난민들 속에 섞여 쌀가마니를 종일 나르면 쌀 두되를 줍니다. 고향에서 험한 일은 안한 내 육신은 근방 죽을 것 같았고 하루하루가 고향에 두고온 가족 걱정에 몸서리를 치면서 지내다가 먼 친척이 경기도 수원 영동 시장에서 노점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수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수원은 나에게 제2의 고향입니다. 노점이란 남의 가게 앞에 돈을 조금주고 가마니를 깔고 작은 물건을 파는 것입니다. 좋고 이문이 많이 남는 비누, 수건, 옷, 신발 등은 가게에서 팔고 노점상은 실, 단추, 고무줄, 바늘 등등 작은 가정 소모품을 팝니다. 노점이기도 하지만 나는 주인이 아닌 점원입니다. 주변 청소도하고 비가 오면 비닐을 구해서 물건을 덮어 나는 비를 꼬박 맞으면서도 물건이 젖지 않도록, 마치 목숨 같이 지키고 잔소리를 들으며 일하여 국수 한 그릇 얻어먹는 것이 전부입니다.

온통 가난과 전쟁 속에 날마다 대포 소리가 들리고 누가 죽었다는 말들도 하도 많이 들어서 죽는다는 소리가 이골이 났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끼리 서로가 혹 고향 소식이라도 들으려고 이북 발음만 해도 달려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고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었고 온통 찾아봐도 웃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울어서 눈이 퉁퉁부어 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서울이 수복되어 노점 주인인 친척이 서울로 가면서 그 노점 가게를 제게 넘겨주었습니다. 몇 가지 물건이 전부이지만 이제 노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8) 


막상 노점을 인수 했지만 살아가는 생활은 거의 같았습니다. 시장 근처 두 분의 과부 아주머니가 하숙집을 운영하는데 수원에서 가장 싼 하숙집이라 주로 피난민들이 들어갔고 방은 합판으로 만든 두 평 정도의 방에 세 사람이 잠을 잡니다. 겨울에는 서로 온기를 느끼지만 여름에는 덥고 벼룩과 이는 왜 그리 많은지 온 몸에 스물 스물 기어 다니며 옮기고, 당시 목욕탕도 없고 빨래도 제 때 못해서 여자들은 서로 이 잡아주는 품앗이를 하고 남자들은 따뜻한 봄날 양지 쪽에 앉아 옷을 벗어 이를 잡는 광경을 쉽게 볼수 있었고 그래서 과부 집에는 쌀이 세 말 있고 홀아비 집에는 이가 세 말 있다는 말이 그때 생긴 것 같습니다.

온통 슬픔과 절망과 가난 속에서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점은 그런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기도한다는 특권과 축복입니다. 저 역시 사랑하는 주님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말씀과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시장 피난민들 십여명이 교회를 시작하기로 했고 저도 거기에 멤버가 되어서 자유의 땅에서 처음으로 내 교회로 여기는 수원 제일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노점으로 한푼 두푼 모은 작은 돈을 남한에서 처음으로 건축헌금을 드리는 은혜를 입으며 마음과 정을 붙이고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날마다 두고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걱정을 하다가 제발 안전하게만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가족을 만날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억지로 삼키면서 생명을 유지 했습니다.

그렇게 언 일 년을 지내면서 경기도 지역 지리도 어느 정도 알고 천하에 아는 사람이 없던 이곳에 교회와 시장 상인들로 이어지는 이웃들이 생겼고 고향에서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특히 성도의 신분으로 친절과 성실한 자세를 지켜 왔기에 영동 시장에서는 황해도 출신인 저를 다들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고 도움을 받아도 그리움에 애타는 실향민의 심정은 언제나 북쪽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는 것이 나만 아니라 당시 이북 땅에 가족을 남겨두고 온 사람들 모두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좌판 앞에 앉아서 저쪽을 바라보니 웬 거지복장을 한 여자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등에 아이를 업고 양손에 두 아이 손을 잡고 오고 있습니다. 당시 그런 모습을 하루에도 수십번 보기에 예사롭게 여겼는데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내 심장이 멈추고 맙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북에 두고온 아내와 세 아이였습니다.

 이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가고 그 꼴이 불쌍하고 한 없이 반갑고 아이를 받고 우리 부부는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을 못했고 주위에서 눈치를 채고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난리가 벌어졌고 모두가 몰려들고 눈물을 소낙비 같이 쏟으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꿈에도 그리던 처자식을 수원 영동시장 길바닥에서 이렇게 만났습니다.          

 

(9)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특히 우리 믿음의 세계에서는 많이 일어납니다. 38선이 세워져서 군인들이 총들고 지키는 경계선을 어떻게 여자가, 혼자도 불가능한데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넘어 올 수 있습니까? .....

겨우 정신을 차리고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세 아이를 나란히 눕여 놓으니 큰 부자가 된 것 같았고 그제서야 넘어온 과정을 물어 봤습니다.

황해도 고향 아버지께서 목숨처럼 여기던 과수원을 몽땅 팔아서 큰 돈뭉치를 어느날 며느리에게 내놓으시며 “이 돈을 사용하여 남쪽의 남편을 찾아가야 너도 아이도 제대로 살 수 있다. 소문에 목포로 갔다하니 그곳에서 남편을 찾아라.”고 말씀하시고는 돈을 배에다 칭칭 감아서 임산부 같은 모습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네가 무사히 남쪽 땅에 도착하기를 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할 것이다.”라시며 흐르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간절한 축복기도를 하시고 이 젊은 며느리를 등 떠밀어 보내셨습니다.

그길로 해주로 와서 그곳에서 제일 유능하다고 소문난 길 안내자를 만나 뱃속에 감춘 돈을 보이며 우리 모자를 남쪽으로 넘어가도록 도와주면 이 돈 전부를 주겠다고 하니 그는 평생 살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본적이 없었던 바라 만약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큰돈을 벌기 위하여 해 보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 길로 죽음의 38선을 향하여 남편과 아이들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각오 하나로 어둠속을 돌진하였다고 합니다.

낮에는 산속에서 숨어 눈을 붙이고 기다렸다가 어둠이 깊어지면 칠흙 같이 어두운 산을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여기저기서 경계선을 넘어가는 사람을 향해 쏘는 총소리를 수 백 번 들으며 가까이서 인민군들의 발자국소리가 나면 아내는 어린 막내 입을 막고 둘째는 안내원이 틀어막고 6살 장남은 그래도 컷다고 스스로 입을 막으며 꼬박 3일 밤을 산속 가시 덩굴과 바위틈을 기어넘었습니다.

손과 발이 터지고 피가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이 어미가 죽더라도 아이들은 살려주세요” 만 외치며 추위와 배고품을 잊고 오직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또 한 가지 보탠다면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모성애의 힘으로 꿈에 그리던 남쪽 땅을 밟은 후 품안의 뭉칫돈을 안내원에게 풀어주면서 돌아가서 고향의 시아버지께 우리 모자 아버님 기도 덕분에 살아서 도착했노라고 꼭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그길로 묻고 물어서 목포로 갔고 그곳에서 열흘을 찾다가 우연히 어느 부두 노동자가 이상선씨는 수원 영동시장으로 갔다고 하기에 다시 발길을 돌려서 굶고 걸으며 지친 모습으로 시장을 찾아와서 이 못난 남편을 만났던 것입니다.

 얼마나 지쳤던지 아내는 이틀을 먹지도 않고 잠을 잤습니다. 잠든 아내를 보니 그 모진 고생을 내가 시킨 것 같아서 너무나 미안하고 애처롭고 그리고 이렇게  만날 수 있도록 평생 일구어 오신 생명과도 같은 과수원 땅을 팔아서 전 재산을 며느리에게 지워주신 아버지 생각에 목이메어서 저는 몇 달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이야기를 하는 오늘 밤도 아마 뜬눈으로 지새울 것 같습니다. 제 아버지는 이런 분이었습니다.    

 

(10)


혼자 피난살이 하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그래도 가족이 있어야 힘이 되고 의지가 됩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언제쯤 밥을 실컷 먹일 수 있을까, 그래서 한참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가능하면 일찍 재우고 낮에도 배가 빨리 고프니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삶이 1950년대 한국의 사정이었고 우리 피난민들의 현실이었으며 제가 직접 겪은 그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새로 막 개척한 ‘몸된 교회’가 있고 저녁이면 집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가족을 거느린 가장인 저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3남매 먹이려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다 보니 세월이 흘러 남한에서 가족 상봉한지 약 열 달이 되었습니다.

큰 아들과 작은 딸은 수원 지동국민학교에 보내고 비록 노점이지만 팔고 있는 물건 품목도 조금 늘리고 약간 생활이 나아지려는 어느 날, 안사람이 소화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큰 병원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는 처지라 가까운 한의원에 갔더니 체한 것 같다면서 침을 맞고 간단한 약을 지었는데 이틀을 그렇게 아프다고 하더니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숨을 몰아쉬며 “세 아이를 북한 땅에서 당신에게 데려다 주는 내 역할과 사명을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셨다.”고 하면서 그날 밤 내 손을 잡고 다시는 못 올 천국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같이 칵 죽고 싶었습니다. 목숨 걸고 삼팔선을 넘어온 고생 때문인 것 같아서 불쌍하고 애처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 “무슨 일입니까?”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펑펑 울었습니다. 어린 세 아이들이 울고, 교회 식구들이 달려와서 울고 영동시장이 울었습니다. 만약 황해도 아버지가 보셨다면 나보다 더 우셨을 것입니다. 정신이 없고 실감이 나지 않는, 전쟁을 치른 가난한 피난민이 슬프다 못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픈 장례식을 했습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답니까? 제대로 마지막 말도 다 못하고 아내를 땅에 묻고 돌아오니 4살 막내 아들이 엄마한테 가자고 떼를쓰며 울고 있습니다. 아무 의욕이 없고 잘 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나고 그간에 잘못한 일들만 떠오르고 몇 날을 물도 못 마시고 아이들을 챙기며 더 힘겨운 피난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수원제일교회가 막 개척한 시절이라 비록 숫자는 적지만 모두 내 일 처럼 장례식날 보리쌀 두되를 가지고 오고, 어떤 이는 국수 몇 뭉치를 가지고 오고 또, 어떤 이는 곰표 밀가루 한 포를 가져 왔던 일이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그렇게 가족을 만나서 좋아하던 저는 이제 세 아이를 둔 가난한 실향민 홀아비가 되어서 막내를 등에 업고 노점을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입히고 씻기고 먹이면서 그때는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서 날마다 눈이 퉁퉁부어 있었습니다.  

 

(11)


혼자서 어린 아이들 셋을 돌보며 생업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도 육성회비를 내야 했고 없는 살림에 양식을 구하고 땔감을 사는 일이 급하다보니 아이들 씻기고 입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빨래를 못하고 갈아입힐 옷도 없고 윗도리를 거의 3-4달 정도는 빨아 주지 못하니 아이들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온 천지가 진흙 땅이고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저녁이면 천장에서 쥐들이 요란하게 뛰어다니고 방바닥 장판은 고르지 못하니 울퉁불퉁하고.... 동네에 놀고 있는 아이들 중에 배가 통통한 모습이 많았는데 모두가 영양실조 상태로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온통 가난에 찌든 배고픈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전쟁이 막 종료되어 모두가 어수선한데다 제대로 된 정부 시스템이 없으니 돌봄을 받지 못함으로 많은 아이들이 아프고 병들었습니다.

그시절 아이들이 가장 많이 아픈 곳이 배탈인데 그 이유는 대개의 아이들 뱃속에 회충이 우글거렸습니다. 어떤 날은 자다가 입속에서도 나오고 아이들이 변을 보면 10센치나되는 회충이 7-8마리가 나오면 기겁을 하고... 그래서 전염병이 들어오면 많은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었고 그들을 보호할 세상도 정부도 사회도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해서 나라를 위하여 기둥 같이 쓰여 졌을 아까운 아이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가난해서 그런지 왜 아이들이 코는 그렇게 많이 흘렸던지 모든 아이들이 코를 훌적거리고 학교에 입학하면서 코수건을 아예 가슴에 달아서 보내고 그것도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누리는 호강이고 우리 애들은 수건 달아줄 엄마가 없으니 코가 흐를 때 마다 이쪽 저쪽 소매로 번갈아 닦으니 양 소매가 번들번들했습니다. 그때 “굴에서 두 영감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무엇이야?”라는 수수께끼까지 있었습니다. 4-7살 아이들이 하얀 코가 길게 나오면 닦을 종이도 없고 그래서 하루 종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다녔습니다. 특히 우리 집 아이들이 더했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길에서 떠돌며 구걸로 살아가는 모습이 비일비재 했고 우리 집 3남매도 아버지는 있지만 엄마가 없는 관계로 아침이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대충 챙겨서 두 남매가 걸어가면 웃옷은 코를 닦아서 번들거리고 바지는 솜씨 없는 아버지가 기어서 바느질이 삣뚤뺏뚤 꼬맨 옷을 궁둥짝에도 한 장 붙이고 무릎에도 붙이고... 그래서 거지도 급이 (상)(중)(하)로 나뉘는데 아버지인 내가 보는 어미 없는 우리 애들은 상급 거지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전 하나 없이 남한 땅에 내려서 아는 사람 없는 낮선 타지에서 겨우 노점 물건 몇 개를 받아서 그 물건을 늘려서 아이들을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때, 제가 가진 것은 참으로 어린 3남매와 믿음이 전부였습니다. 찬송가438장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초막이 당시 제가 살던 집입니다.

 이런 거지 소굴에 어느 날 옷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잘 빗은, 몸에서는 동동구리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22살 예쁜 처녀가 왔습니다. 나는 아이들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날마다 거지꼴로 보내니 생활 지도하려고 오신 줄 알고 “선생님이 오셨군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아 글쎄 이 여 선생님이 쥐하고 이, 벼룩이 우글거리는 우리 소굴로 걸어들어 옵니다.  

           

(12)


어디를 보나 부유한 집에서 손에 물도 안 뭍히고 곱게 살아온 그 선생님이 다짜고짜 들어와서는 때가 덕지덕지 묻은 세 아이를 보면서 오늘부터 내가 이집에 시집와서 이 아이들 엄마가 되겠다며 폭탄선언을 합니다. 그러잖아도 하루하루가 힘든 나를 이 처녀가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 처녀가 지금 내 옆에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요즘들어 부쩍 기력이 약해져 알치하이머를 앓고 있는,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자주장사 루디아를 꼭 닮은, 주님 위해 평생을 드리며 삼남매를 낳은 정성자 권사 엄마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주의 일을 했다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제 아내가 다 했고 집사람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입니다.

이 사람은 평택에서 내노라하는 양반 중의 양반집 육 남매중 맏딸로 자라났고 18살에 갑자기 만난 복음이 불덩이가 되어서 그 기쁨과 감격 속에 살다가 결혼 적령기 22살에 소위 양반집으로 연결되는 모든 혼처를 물리치고 믿음의 남편이 아니면 혼자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부모님께 선포하고 잠시 수원 친척 언니 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집마다 다니며 물건을 파는 방울 장수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수원 영동시장 노점에 이북에서 피난와 고생하다가 아내가 북에서 아이 셋을 데려다주고는 먼저 천국으로 갔고 가난한 홀아비가 아이 셋을 기르는데 불쌍해서 볼 수가 없더라’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집에 시집을 가라.”

그길로 시장에 달려와서 현장을 확인하고 몇 번 기도를 하였고 최종적으로 응답을 확인 한 후 이 움막을 밀고 들어와서, 결정을 했으니 이 가난뱅이 홀아비에게 허락을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당연이 거절을 했지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도 말이 되지 않고 제 나름대로 바른 신앙을 지키려고 언제나 나를 돌아보며 살아 왔는데 지금 내 앞에 철없는 한 처녀의 말에 흔들릴 내가 아닙니다. 당장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고 타이르고 야단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후 수단으로 가서 부모님 허락을 정식으로 받아오면 생각해보자고 겨우 달래서 보냈습니다. 그 결과는 뻔하기 때문입니다. 처녀는 그길로 평택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자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처녀 아버지가 저를 만나로 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잘됐다.’ 내가 직접 어른을 만나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사람 제발 집으로 데려가라고 내가 진심으로 설명하고 설득해서 이 잘못된 상황을 바로하려고 만났습니다. 그날 처녀 아버지는 혼자 오셨고 역시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먼저 말을 하십니다. 첫째, 나이가 많고 (17년차이) 둘째, 돈이 없고 셋째, 아이가 하나도 아닌 셋이나 둔 홀아비고 넷째, 남한 양반들은 이북사람을 다 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다섯째, 가장 싫은 것이 예수쟁이라는 것, 그래서 이 결혼은 딸을 곱게 기른 아버지로써 절대 반대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얼른 “예...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발 따님을 데려가십시오.”

 그때 그분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 집에 가장 존경하던 형님이 몇 년 전에 작고 하셨는데 어제 밤에 꿈에 나타나 ‘딸을 영동시장 홀아비 한태 시집보내라’고 하시고 나는 평생 그분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기에 오늘부로 내 딸을 집에서 쫓아냈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시면서 일어나 갔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며 점점 멀어져가던 보습이 꼭 황해도 우리 아버지 같아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3)


나무꾼 집에 선녀가 올수는 있지만 때 국물이 줄줄흐르는 우리집에 선녀가 왔다고, 말 잘하는 영동 시장 사람들이 얼마나 말이 많았겠습니까? 어쨌든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신중하게 주의 종들에게 상담을 하고 믿음의 조언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뜻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격려를 받으며 결혼식도 없이 교회 식구들과 조촐하게 식사하며 가난한 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때부터 약 15년간 집사람은 친정에 가지 못했습니다.

여전이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확연이 달라진 것은 온통 때로 꼬질꼬질하던 우리 아이들에게 어디서 옷감을 구했는지 삼남매의 옷을 손수 만들어서, 그것도 한 달에 한 벌씩 바꾸어 입히고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손길로 아이들을 보살피니 시장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몰라볼 정도였고 학교에서도 전교에서 제일 더럽던 우리 아이들이 어느날부터 도련님 같이 옷을 입고 오니 담임선생님이 우리를 불러서 갑자기 아이들이 좋은 옷을 입느나고 이유를 물었고 새 엄마가 와서 만들어 입힌다고 하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엄마가 있느냐하며 칭찬에 칭찬이 학교로, 시장으로 수원시내에 퍼졌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마음의 아품도 치료가 될 무렵 새 생활을 시작하는 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왔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재래식 목조 건물은 거의 비닐로 덮은 상태인데 갑자기 시장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작은 내 노점도 순식간에 홀랑 타버리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시장 복구에 힘을 보태고 권리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겨우 다시 물건을 구입해서 노점을 시작 했는데 다행이 새로 단장한 시장이라 손님도 많았고, 사람들은 우리집에 착한 선녀가 들어오면서 복을 가지고 왔다고 모였다 하면 우리집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전도에 도움이 되어서 새로 시작하는 수원 제일 교회의 부흥에 기여를 했습니다.

어째든 하는 일들이 잘 풀리고 그렇게 아끼고 절약하여 드디어 노점을 하던 주인집 가게를 계약했습니다. 비록 작은 가게였지만 빈손으로 피난 와서 착한 우리 성자 엄마와 함께 눈물 젖은 돈을 모아서, 가게 앞에 덧문이라고 하는 함석으로 된 문 번호가 1~5번까지 있고 번호순으로 문을 넣고 마지막 문에 열쇠로 잠그는 이 가게를 인수하였는데 동아일보 신문에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 회사를 사서 사장이 되는 날 저는 이렇게 이 작은 가게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병철회장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의 축복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자다가 밤에 나와서 가게를 보고 들어가고 특히 성자 엄마의 눈물의 기도 응답이기에 온 천하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노점과 가게 안에 물건의 종류와 그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옷, 신발, 수건, 담요, 없는 것이 없습니다. 황해도 이 집사를 이제 사람들이 드디어 ‘이 사장님’이라 부르고 우리 성자 엄마를 ‘사모님’이라고 시장사람들이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캄캄한 인생길을 가는 저의 손을 잠시도 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날마다 내일 새벽 가게 문을 번호대로 열어 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좋았고 교회 식구들이 함께 좋아하였고 저렇게 이쁜 처녀가 저 집에 들어와서 가난을 벗었다고 골목골목마다 모였다하면 우리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 가게가 바로 수원 영동시장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상신상회’ 였습니다.    

(14)


옛날 50-60년대 천막교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디든 부름받은 종들이 좋은 땅에 무조건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세우면 공무원이 철거한다고 위협도 하지만 공권력이 부족하던 그때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제일교회도 작은 땅을 사고 옆에 붙은 정부 땅이 6백 평 정도 있어서 교회를 짓고 당시 중고등학교가 많이 부족하고 온 천지에 가난한 아이들이 많을 때 허가는 없지만 각 사회단체에서 야간 학교를 열어서 그늘진 곳을 밝히는 등불 처럼 봉사할 때 제일교회도 교실 두 개를 야간 학교로 만들었고 우리 집 큰아들이 첫 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북에서 하나님이 주신 3남매와 이남에서 3남매, 이렇게 6남매를 키우면서 다섯 손가락을 깨물면 다 아프듯이 모두가 사랑하고 귀한 자식들이지만 그중에 제 장남, 지금 시카고에 살고 있는 올해 80인 이효섭 장로 이야기를 잠간 하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늙으면 집안의 장남 장녀는 줄줄이 자라는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공부도 못하고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 큰아들이 그런 경우로 가슴에 언제나 아픔과 미안함으로 남아있습니다. 엄마가 결행한 일이지만 목숨걸고 동생들 손을 잡고 38선을 넘어와서 겨우 안정을 찾을 즈음, 사랑하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또 새엄마가 들어오고 5년만에 3동생이 태어나고 집에서는 장남이고 아래로 동생을 5섯이나 돌보아야하는 힘든 환경 속에서 사춘기를 아프다는 말도 안하고 참고 자랐습니다.

15살 무렵 제일교회 건축을 할 때 오산 미군부대에서 건축 자재를 기증받아 교회 마당에 쌓아 놓고 당시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누구든지 밤에 들고 가면 그만인 세상에 교회에서 우리 장남 효섭이를 추운 날 모닥불 피워놓고 밤새도록 건축 자제를 지키도록 했고 아침이면 수고 했다고 장로님이 돼지고기 한 근 끈어 주면 집에 가지고 와서 가게 나간 우리 내외를 대신하여 다섯 동생을 나란히 앉혀놓고 고기를 구워서 제비새끼들 입 벌리듯 형만 바라보는 동생들 입에다 넣어주고, 한참 먹을 15살의 자신은 입에도 대지 않던 그 모습이 지금도 떠올라 가슴이 멍멍해 집니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장남은 하늘에서 낸다고 했는데 아래 5섯 동생들은 좋던 나쁘던 모두 대학 공부했는데 우리 장남 효섭이는 지동국민학교 2년 다니고 교회 야간학교 조금 다닌 것이 학벌의 전부입니다. 동생들과 부모 사업돌보는 일에 청년 시절을 다 보냈습니다. 수원 제2교회를 지을 때 20대 청년이 90cc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가는 군포 ‘지지대 고개’를 넘나들며 교회 건축 자재 사오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녔고 주위에 껄렁껄렁 노는 친구들도 있어서 얼마든지 빗나갈 여건이 충분했지만 신앙의 길을 벗어나지 않은 아들입니다.

 세월이 흘러 내 처가인 평택 외할머니께서 외손자 효섭이가 새엄마에게 잘하고 5동생을 잘 돌본다고 효섭이 장가들 때까지 생일날 마다 닭 한 마리씩 들고 오셔서 생일상을 차려주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모든 자녀들이 고맙지만 묵묵히 부모의 뜻을 따라준 큰아들이 있었기에 우리 부부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 못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아무것도 물려 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셔서 26년 전에 미국으로 불러주셨고 슬하의 한 아들은 약사로, 한 아들은 변호사로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어서 이 아버지는 그나마 큰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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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족이 늘었는데 집이 문제 였습니다. 그래서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가게도 주셨으니 우리 가족 비바람 피할 집을 주십시요” 이북 사람들이 피난와서 모두다 형편이 어렵다보니 때로는 자식들 먹이려고 너무 악착스런 생활 습관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피난민들을 좋지 않는 시각으로 볼 때도 많았습니다. 도움도 많이 주었지만 가난하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갈등 같은 것인데 그런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있었습니다.

수원 제일교회가 설립되는 이유도 그런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존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면으로는 이북 땅에 복음이 먼저 들어왔기에 믿음이 더 좋을수 있는데 그러나 교회에서 늘 외면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직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비판하려고 말하는 의도가 절대 아닙니다. 어쨌든 교회가면 마음에 상처가 쌓이고 그래서 영락교회를 기점으로 전국 대도시의 많은 지역에서 피난민들 위주로 세워진 일들이 결국 한국 교회 성장을 이루는 발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수원 제일교회 넓은 마당에 정부땅 몇 백 평이 있어서 교회 장로 권사 집사 모두 빈손으로 월남한 가난한 사람들이기에 서로 의논을 해서 교회당과 사택을 짓고 남는 땅에 각자 집을 짓게 되었고 그때 7채의 집이 세워졌는데 집을 짓는 기간이 하루만에 끝내야 했습니다. 자기 땅이 아니고 허가도 물론 없고 ‘판자집’ 나무 판자로 겨우 바람만 막아 벽을 만들고 지붕은 박스로 덮습니다. 그리고 그날 무조건 가족이 이사를 들어가야 철거를 면합니다.

구청에서 철거를 하려고 나왔다가 아이들이 오물오물 누워 있으면 차마 어쩌지 못하고 돌아가고 그것이 묵인되면 그다음 함석으로 지붕을 올리면 집이 됩니다. 비가 오면 빗소리가 우두두둑 요란하게 들리고 바람이 불면 어떤 집을 지붕채로 날아가고 그래도 드디어 우리 집이 그렇게 생겼습니다. 종이 박스로 덮은 집 참 좋았습니다. 몇 년전 TV 뉴스에 이디오피아 난민촌이 나오는 장면을 보는데 왜그리 정겹던지 이유는 그때 피난민들이 하루만에 만든 집들이 난민들 거주지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한지 자세히 보면서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이남 땅에서 내집이 생겼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기도 한 응답의 결과였으며 우리 집사람 성자 엄마의 강력한 기도가 한몫 했고 그때부터 집사람은 하루에 두 시간 정도만 잠을 자고 날마다 교회에서 철야기도로 밤을 새우며 살았습니다. 나중에 벽돌로 벽을 만들고 지붕을 스레트로 개량하여 요즘 말로 레노베션을 말끔이 하고 정부에 얼마의 땅값을 내고 정식으로 등기를 마치기까지는 십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6 자녀의 부모가 되었고 내 집과 가게를 가졌을 때 불현듯 어느날 다시 하나님과 약속한 교회 건축 사명이 떠올랐고 그 사실을 집사람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서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서 이제 우리부부 공동의 사명이 되어 마음으로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저축된 돈은 없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체험하고 또, 황해도 부모님들로부터 배운 신앙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들을 수도 없이 보았기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고 특히, 죽음의 사선을 넘어오면서 하나님과 약속한 교회 건축 사명을 이루어달라는 기도를 지금까지는 나 혼자 해왔는데 이제부터는 이미 기도의 용사로 훈련된 집사람과 함께 기도의 불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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