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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고 이상선 장로 간증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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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 이상선 장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14 21:32 조회1,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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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허름하지만 내집이 있고 내 가게가 있어서 궁핍했던 생활들이 안정을 찾아가고 다시 우리 부부는 사명을 위하여 21일 다니엘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나는 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명을 이룰 귀한 사람을 붙여 주신다는 응답을 받고 하루 종일 설레이는 맘으로 하나님이 보내 주실 큰 거목을 기다리는데 평소 조금 알고 지내던 평안도 박 집사가 불쑥 들어오는 순간, 마음에서 “이사람이다” 라는 것 입니다.

그는 우리 시장 사람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기꾼이라고 부르고, 신용도 없는 사람으로 정평이난 박 집사가 대뜸 메리야스 공장을 동업하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기술이면 충분하고 이 집사는 돈을 대라는 조건입니다. 저는 그 방면에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하니 이 집사 정도의 자금으로 영등포 고물상에 쌓여있는 버려진 기계를 고철 값으로 두 대만 사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이야기를 시작한지 두 시간 만에 나를 영등포 고물상으로 끌고가서 비를 잔뜩 맞아 녹이 시뻘겋게 쓴 커다란 기계 두 대를 새 기계의 1/100 값으로 사고 말았습니다.

말 잘하는 그의 능력으로 수원역 근처에 있는 시유지 땅 2백평을 소개 받아서 누가 볼새라 밤에 눈 깜빡할 사이로 천막을 치고 바닥도 고르지 못한 그곳에 기계를 갖다 놓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응답일까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왜 세상에 근사한 사람이 많은데 땡전 한 푼 없고 사기꾼 소리를 듣는 사람을 기도 마지막 날에 찾아오게 하셔서 성공할 확률이 10%도 못 되는 이 큰 사업을 벌이게 하시는지 멍하니 마치 어떤 물살에 맥없이 휩쓸려 가는 것 같았기에 우리 부부는 홍해 앞에 선 심정으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섬유 공장에 전혀 경험이 없는데 자본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사람이 달려들어 밀어붙이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가 되시는지요?

기계 이름이 ‘다이마루’ 라고 합니다. 이북에서 과수원 하던 저는 생전 처음 듣는 용어입니다. 기계는 등치가 크고 약 20여개의 실 뭉치가 걸려있고 그것이 돌아가면서 아래로 천이 짜여서 줄줄 흘러내리면서 감겨나오는 일본제 기계였습니다. 두 대를 놓으니 공장에 가득 찼고 이제는 녹이 쓴 이 기계를 다 풀어서 다시 기름으로 닦고 청소하여 조립을 새로 하는 과정을 밤새도록 하는 것 입니다. 박 집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기계를 뜯어내고 나는 기계 주위를 빙빙 돌면서 “하나님, 이 기계로 교회 10개 건축하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면 박집사는 성질을 있는대로 부리며 “이 간나 새끼 날래 꺼지라우”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몇 날을 수리하고 실 공장에서 실을 구입하고 또 원단이 완성된 후를 대비하여 메리야스를 만드는 여러 종류의 미싱도 중고로 사들이고 수원에서는 미싱공을 찾을 수 없기에 서울에서 더 좋은 조건을 걸고 사람을 10여명 채용했습니다. 드디어 남한 땅에 피난와서 처음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모든게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공장이 설립되어 드디어 전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기계가 철철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아래로 천이 하얀 색을 자랑하며 짜여서 나올 때 저는 돈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울컥 났습니다. 할렐루야!

 내 땅은 아니지만 공장 입구에 ‘(주)상신메리야스공장’ 이라고 간판을 걸었고, 영동 시장 노점을 하던 이  집사가 이제 공장 사장이 되었다고 여기저기서 축하인사를 받지만 내심으로는 아직도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응답인지 확신이 서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명색이 사장인 제가 그 분야에 몰라도 너무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보고 당장 영등포에 가서 ‘니온바리’ 1 대 ‘오바로크’ 2 대를 사오라고 합니다. 도무지 이게 뭐하는 물건이고 어떻게 생긴 물건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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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박집사는 작정 기도의 응답일가요? 누군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서 평생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고? 저는 말했습니다. 한 사람은 북에서 아내와 삼남매를 인도하여 38선을 넘겨준 얼굴도 못 본 길 안내원과 지금 우리 공장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왔다갔다하는 호랑리 같은 군기 반장인 공장장 박집사, 이 두 사람이랍니다.

박집사의 만남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몇 개월이 지나서 였습니다. 그 엄청난 사실을 아는 날 저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전쟁을 겪으며 가족과 이별로 인한 서럽고 힘들 때도 울었는데 지금은 이름 없는 약한 사람을 들어서 마치 중고 기계를 고치듯 갈릴리 약한 사람들을 가슴으로 품으시며 고치셨던 예수님의 손이 세상 사람들이 외면한 박집사의 손을 잡아 내게로 인도하셨던 사실을 알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무서움이 밀려와서 몇 일 밤을 눈물로 지샜습니다. 박집사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단지 피난민으로 5명의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뛰어다니다가 작은 약속 못 지키면 사기 쳤다고 하고 부자가 그렇게 하면 깜빡했다고 덮어주는 것이 가난하게 살던 시절의 피난민들이 받았던 인심이었습니다. 박집사를 보내신 예수님이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음성이 그순간 내게 너무나 크게 들려서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약한 사람을 존중하며 살았습니다. 반대로 높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요즘 환율로 환산하면 약 7백 억의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경기도 직물협회 회장을 삼년간 했습니다. 그럴때 국회의원 시장 군수 도지사 등등 사회적으로 힘있는 관리들이 모두 나를 만나려고 했지만 그분들을 만나지 않았고 교회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교단의 높은 총회장 노회장 그시절 한국교회를 들었다 놨다 하던 10위 안에 들어갔던 목사님들이 줄줄이 호텔에서 식사하자고 요청이 수 없이 왔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깨닫은 그날부터 저의 이웃은 영동시장 사람들과 교회 성도들 그리고 내 공장에 일하는 직원들이었고 오직 목회자들은 시골 농어촌 낙도에서 사역하시는 가난한 목사님들이 내가 받들고 섬겨온 귀한 종들이었습니다. 높은 목사님들은 안 만났지만 눈물로 가난을 붙잡고 살아가던 낙도의 섬교회는 배를 여러번 갈아타면서까지 찾아가서 비가 새는 지붕을 해 주고 화장실을 만들어 주고 강대상을 들려주고 종탑을 세워서 종을 달아주고 풍금을 사드리고 사택을 고쳐 드리며 그분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이 늙은 아버지의 바램입니다.

 다시 새로 시작한 공장으로 돌아갑니다. 요즘으로 본다면 규모가 제법 큰 공장이지만 사실 그렇게 큰 돈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자유당 정권이 끝나가는 어수선한 시절 공장 땅값이 안 들어갔고(정부땅) 그리고 모든 기계를 거의 중고로 갖추었기에 새 기계의 1/10 비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워낙 없는 형편이기에  이만큼 꾸리는 일도 힘에 벅찼습니다. 드디어 창업 20일만에 내복이 완성되어 나왔습니다. 당시 빨간 내복은 최고의 인기 효도 상품입니다. 직원이 마지막 고무줄을 넣는 공정을 마무리하여 내 손에 첫 상품이라고 들려주었습니다. 얼굴에 대어보니 어찌나 따뜻하고 포근한지 새 원단이라 냄새도 너무 좋고, 순식간에 황해도 이북에서 사과 밭을 몽땅 팔아 며느리 뱃속에 감아주셨던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평생 이렇게 좋은 내복 한 번 못 입으시고 언제나 광목 쪼가리로 만든 속옷만 입으셨던 불쌍한 우리 부모님... 할 수 있다면 이 옷을 들고 단걸음에 달려가서 빈털터리 피난민 아들이 고생 끝에 남한 땅에서 내 손으로 내복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입혀드리고 싶었습니다.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내립니다. 직원들은 내 속마음을 모르고 “사장님 그렇게 좋으세요?” 저는 설명을 안 하고 옷을 들고 내 사무실로 와서 한참을 더 울었습니다. 아버지께 딱 한번만이라도 내복을 드렸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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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을 한다는 것, 사람을 통솔하고 이끌어 가는 것, 특히 믿음으로 살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새삼 이 원단이 잘 짜여서 나오면 즉시 염색 공장으로 보내 우리가 원하는 색으로 바꾸어진 원단을 노련한 제단사의 손으로 최소한의 기립바시(짜투리)를 남기도록 잘라서 옷 의 각 부분을 연결하여 미싱을 하고 한 벌의 내복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공정과 손을 거친 후 예쁜 상자에 포장을 마지막으로 하여 가게에 납품하는 과정을 거치려면 노련한 공장장 박 집사의 책임 아래 두 명의 반장이 철저한 감독과 검사를 하여 불량이 없도록 모든 직원이 팀웍을 이루며 이런 좋은 소문이 인근에 퍼져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물건도 생각보다 고급으로 잘 만들어져서 주문이 이어지고 어느듯 직원만 백명이 넘는 규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장군차 전속 운전병으로 있던 좋은 운전기사를 만나서 바퀴가 세 개 뿐인 3륜 자동차도 샀습니다. 그러나 원단을 만들어 염색공장으로 보내는 과정이 번거롭고 경제적 부담이 커서 공장 내부에 아예 염색공장을 갖추기까지는 근 일년이 걸렸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가난을 벗어 보려는 몸부림으로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개는 명절에만 몇 일 쉬고 일요일도 없고 학교도 토요일에 문을 열었던 그시절 우리 공장은 처음부터 주일 성수를 한다고 했고 우리 부부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직원들 전도에 목표를 두고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올리며 중보기도로 섬겼기에 거의 모든 직원들이 저희가 섬기는 수원 제2교회에 등록하는 덕분에 교회도 금방 가득 차는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옛날 어른들 말씀처럼 ‘가지 많으면 바람 잘 날 없다’고 직원이 백 여 명이 넘으니 그들을 관리하는 일도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 지방에서 온 직원들에게 침식을 제공하고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저녁에 야간 공부도 시켜주며 비록 이런 일에 경험은 없지만 모두들 고생하는 직원들을 남으로 여기지 않았고 우리 자식들 대하는 마음으로 살피고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반 반장이 나에게 와서 미싱공 두 사람이 도둑년이라는 것입니다. 둘이 짜고 날마다 내복 한 벌씩 훔쳐간다는 것입니다. 당시 내복 한 벌이 반 달치 월급입니다. 나는 그때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나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면서 백지를 내밀며 반장에게 사표를 쓰도록 했습니다. ‘훔친 사람도 나쁘지만 같은 동료를 명색이 반장이라는 사람이 고자질 하는 자네가 더 나쁘다’며 이런 반장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직장이 귀하던 시절 주일마다 쉬고 월급 잘 주는 이런 회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반장은 싹싹 빌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반장을 설득했습니다. “그 두 아이는 병든 부모를 모시고 동생 넷을 키우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 딸이 오죽 했으면 그랬겠는가. 우선 못 본체 하자” 우리 집사람 성자 엄마도 이 사실을 옆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부탁도 안 했는데 그때부터 집사람은 따끈한 찐빵을 사서 사탕가루 솔솔 뿌려 비닐에 싸서 아무도 모르게 슬쩍 지나가며 그 아이들 주머니에 넣어주고 다음 날에는 고구마를 구워서 또 그렇게 하고, 마치 인자한 전도사님 같은 마음으로 접근하는 그 방법을 보면서 얼마나 보기가 좋고 고맙던지 그래서 지금까지 크게 다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사람이 뭘 특별이 잘못할 일도 없지만 혹 조금 실수를 했다고 해서 저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못 봐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고 몇 년지나 우리가 쫄딱 망했을 때 도둑년 소리 듣던 두 사람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우리가 재기를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훗날 도둑년이라고 불리던 두 사람은 나중에 교회 권사가 되어서 한 사람은 사비를 들려서 노숙자들을 수 백명을 먹이고 한 권사님은 여전도회장직을 왕성하게 활동하고 물질과 자녀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지금 보석 같이 쓰임 받는 저 귀한 권사님들을 도둑으로 몰았으면 주님을 어떻게 만날 것이며 교회를 많이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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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신메리야스 공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성실한 직원들은 주일을 휴무로 정한 것은 직원들 전도를 위한 조치임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모두 예배에 참석을 하였고 작업 현장에는 찬송가를 들으며 가난과 상처로 얼룩진 마음들이 서서히 치료가 되고 서로를 살피는 동료애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서서히 자라나는 믿음의 열매가 보여지면서 남한 땅에서 시작한 이 일이 전도로 이루어져가 우리 부부에게는 몸은 고되고 힘들지만 날마다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문제는 경영이었습니다. 경영에 전혀 지식이 없다보니 직원들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뒷받침만 해주면 될 것 같았는데 점점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품은 당시 최고 상품으로 널리 알려졌고 고급 내의 두 벌이면 거의 쌀 한가마니 값이 될 정도로 비싼 가격으로 주문이 들어오니 그 결실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피난민 출신인 저의 여린 성품이 어려움을 자초했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내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와 외상으로 물건을 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두 교회 성도와 인맥을 통해 마음 약한 나를 꼼짝 없이 거절을 못하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와서 몇 일 굶었다고 하면서 눈물로 애원하는 불쌍한 피난민 편리를 봐주려고 시작한 외상 거래가 이제는 사업의 존폐 위기를 초래할 문제로 다가 왔습니다.

“함흥차사”란 말을 알지요, 갔다하면 소식이 없습니다. 지금이야 전화가 있지만 그때는 어떤 통신수단도 없는 시절,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 큰아들에게 잔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왜 외상을 줍니까?” “아이들이 굶는다잖아” 매일 이런 다툼이 이어지고 다시는 외상 안 준다고 다짐하다가 고향 동네 다리가 어떻게 생겼고 먼 친척 이름 들썩이면 또 주고 또 주고 그렇게 나간 물건이 2천벌이 될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밤낮으로 고생하고 나는 전국을 외상값 받으러 다니고 어렵게 물어서 찾아가면 어린 아이들 대여섯이 3일을 굶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쌀 한 말 사줄 때가 더 많았습니다. 나는 어려워도 직원들에게나 거래처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영동 시장 가게도 처분하였습니다. 피난민들이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돈 받고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성격으로는 이것을 넘기지 못해 결국 고생하는 큰아들과 성자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습니다.

수원에서 용인으로 아침 저녁 동차라는 기차가 다니는데 마침 내 물건을 많이 받아간 사람이 용인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아침 기차를 타면서 수금하여 저녁 기차로 온다는 말을 남기고 용인으로 가면서 “오늘 수금 잘하여 저녁차로 와서 내일 직원들 월급 차질 없도록 해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용인에 갔더니 빚을 진 사람을 만날 길이 없어서 포기하고 기차시간을 맞추려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 사람 밤 12시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밤공기에 추위에 떨면서 기도하다가 말씀을 외우다가 찬송을 하면서 겨우 만나긴 했지만 이미 빈털터리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실망한 마음을 안고 다음날 아침 기차로 수원역에 내리니 우리 가족이 나를 붙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제 저녁 가차가 탈선을 하여 백 여명이 죽었고 어두워서 누가 죽었느지도 모른다면서 100%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살아서 돌아오니 기뻐서 울고 좋아서 울고 감격을 하였습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뭔가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어제 내 기도가 응답 되었다면 나는 죽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몰랐습니다. 예배당 지으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다시 울며 십자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행하는 사랑이 엉터리였습니다. 6,25전쟁에서만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피를 흘리시며 교회당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시며 또 우셨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십자가를 느끼며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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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물건이 생산되고 성실한 직원들 덕분에 분명 성공한 회사였지만 굶으며 추위를 견뎌가며 38선을 넘어온 피난민 출신 사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쌩 떼를 쓰며 달려드는 도움의 요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고 그 규모가 커 자금 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주)상신메리야스 공장은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채를 빌려서라도 흑자 운영되던 회사를 살려야 한다고 하지만 무조건 하나님 앞에 서원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진심으로 믿는 삶을 실천해야 했고 남에게 조금이라고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설립 된지 만 3년이 된 공장 문을 닫는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 졌습니다.

모든 직원들 월급을 다 지불하고 그동안 고생한 공장장 박집사와 마무리를 위해 의논을 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박집사 월급을 주었고 그 사람 의견을 받아드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은 부채40%도 박집사로 인한 것이기에 그도 미안하게 생각하여 어려움 없이 대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박집사는 퇴직금으로 공장에서 가장 비싼 니온바리 기계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물건은 어디를 가도 당시 쌀 7가마니의 가치가 있기에 나는 망설임도 없이 허락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과의 마지막 인연이었고 세월이 흘러서 그를 찾으려고 수소문 했지만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직원들 등을 토닥이며 눈물의 이별을 하고 텅빈 공장을 돌아보니 너무나 썰렁하고 이제 요란하게 돌아가던 기계소리도 재잘대던 여공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장에 앉아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이지 반성도 하고 그래도 무리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고 문을 닫은 결단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남한 땅에서 얻은 재산은 다 없어졌고 공장도 집도 아직은 정부 땅이므로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이제부터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께 저를 들어서 던졌습니다.

피난민의 장점이 또 신앙인의 능력이 이럴 때 증명되었습니다. 총알이 핑핑 날아오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리니 외상 물건 가지고 간 사람들이 원망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그들은 다 어렵고 전쟁으로 가난하게 된 아픈 사람들이면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 내복을 팔아서 내게로 오려고 했을 터인데 당장 급한 쌀을 사고 병든 식솔 약을 샀을 것이며 모두들 헛된 일에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사람은 이정도 쯤은 압니다.

 그때 공장 옆에 있던 수원 제2교회는 우리 직원들이 떠나고 교회가 허전했는데 어느 주일 제직회를 하면서 교회를 짓는 말이 나왔고 땅이 어디 있느냐고 누군가 말을 하니 이상선 집사님 땅이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일 년 전 역전 옆 야산 꼭대기에 나중에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지어보려고 백평을 사놨는데 그시절 특히 야산은 요즘 말하는 땅값이 아니었습니다. 내복 30벌주면 충분했습니다. 1960년도 농사짓는 밭이 그나마 값이 나가고, 당장 보리쌀 한가마니를 땅 10평 보다 더 알아주던 때 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얼른 기증을 한다고 하여 쫄딱 망한 저는 다음날 교회로 땅을 등기하여 제2교회 착공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우리 큰아들은 겨우 남은 우리 가족의 살 집터마저 드렸다고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섭섭하다는 말을 남기고 안 가도 될 군대를 지원하여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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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문을 닫았고 없는 중에 마지막 남은 땅도 교회에 기증을 마무리 한 후 생각하니 그동안 밤낮 고생하고 상한 마음을 안고 군에 입대한 아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지금은 군 생활이 길지도 않고 여유가 있지만 60년대 초 군 생활은 배고프고 힘들고 사고도 많고 그시절 입영 통지서를 받으면 온 집안이 울음바다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런 생각에 아버지인 내 마음은 편치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고난의 세월은 지금 사업의 어려움도 자녀의 아픔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더욱 굳게 믿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에 그때 한 가지 내가 깨닫지 못한 신앙은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망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집 지을 부지를 교회에 이전절차를 다 마치고 텅빈 공장에 앉아 평상시에 하던대로 그날도 기도를 하는데 너무나 큰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믿음을 가졌다는 질책과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저는 반문했습니다. ‘저는 지금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불현듯 공장장 박집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오고 가다가 만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보낸 천사였습니다. 그 사실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것은 직물 공장을 운영하고 물건을 생산하려면 많은 부속품과 자재를 공급하는 약 30군데의 거래처가 어디에 있고 어떤 부품을 조달하는지 그 정보가 이 사업에서 가장 큰 재산인데 피난민 신분인 저는 영등포가 어딘지 구로공단이 청계천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 모든 거래처가 다 연결되었고 특히 원단을 짜는 기계는 눈감고도 고치고 조립이 가능하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특히 염색기술 한 가지 배우는 일도 수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완벽하게 습득이 되었고 그밖에 모든 기계 미싱 기술을 다 마스터 하였기에 만약 내가 다른 큰 대기업에 공장장으로 취업이 되어도 대 환영을 받은 정도로 만능 기술자가 이미 되었으며 거기에다가 우리 큰아들도 똑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사도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언급한 바울을 위해서 목을 내 주던 동역자들이 있었듯이 지금은 잠시 다른 직장에 다니지만 김 기사와 당시 도둑 소리를 듣던 여직원들을 비롯하여 함께 이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돈으로 살수 없는 내게 필요한 인재들이었는데 그들을 만나게 된 일과 이북에서 과수원 하던 이 촌사람을 3년간 밤낮으로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배려하여 잘 가르친 공장장 박씨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너무나 놀았습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함께 공장 문을 닫은 얼마 전까지도 몰랐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감사의 눈물이 흘렀고 졸딱 망해서 알거지가 된 줄 알았던 저는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나를 일꾼 만드시려고 고치시고 다듬고 훈련시키신 영적으로 표현하면 천사가 그 사명을 띠고 공장장의 모습으로 와서 3년동안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공장에서 이 은혜가 깨달아 지는 그 순간 그렇게 고생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 믿음에 철이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그날 공장이 울리도록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만남의 축복이 억만금의 가치가 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날부터 사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내가 만난 천사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가난하고 초라한 이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2)

 

‘내려 놓기’란 말 알지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니 말은 쉽게 하는데 막상 내려놓지를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들고 항복을 해야 하는데 죽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공장 문을 닫고 다 잃고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누구에서 줄 빚은 없지만 수중에 돈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38선 넘어온 사람들은 없을 때가 워낙 많아서 놀랄 일도, 겁날 것도 없는데다 지금은 믿음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라 이제 모두 비우고 멈추어 선 공장에 앉아 있으니 마음에 평안이 밀려오는 감격에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내 속에 위로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나를 비운 것이 전부인데 마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영적 눈이 열리니 하늘의 군병을 본 바로 똑 같은 마음이 당시 저의 현상이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주체를 못하여 평소 거래하던 실 도매상 집사님 가게에 들렸더니 나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요즘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안을 합니다. “이 집사 지금까지 고생했는데 서울에 큰 고무공장에서 장화 안에 들어가는 천을 구하는데 납품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들은 이야기이기에 머뭇머뭇 하였더니 얼른 편지를 써 주면서 서울 이 공장 자재 과장을 찾아가서 상담을 하라고 추천장을 써 주기에 그길로 서울에 그 사람을 만났더니 당장 내복 만드는  천을 엄청난 물량을 납품을 하라는 계약서를 그 자리에서 작성을 하였고 특히 그 과장님은 수원이 고향이라 내가 수원에서 왔다는 이유로 내게 유리한 납품 조건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 공장이 아마 남한 땅에서 제일 큰 ‘조일 고무 공장’인데 당시 직원이 7-8천명이 되는 굴지의 회사입니다. 

 

단 하루에 이루어진 그것도 우연히 거래처에 들렸다가 받은 추천서 한 장으로 우리 공장에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짜서 보내야 할 물량을 주문 받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 졌습니다. 그것도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 한 일도 없고 또 지금 아무에게도 어떤 부탁도 할 처지가 아닌데 이게 웬일입니까? 쫄딱 망한 저에게 6개월 납품 물량은 그 액수가 너무나 크고 특히 내복 옷감만 필요하기에 직원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아주 간단한 작업으로 내복 수 천벌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침에 만난 성령님의 역사를 떠올리며 과연 내가 확실히 내려놓았는지 좋은 계약서 들고 살아나서 설치는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하는 일은 없다, 다 주님이 하시고 돈을 벌어도 사업이 번창해도 특히 교회를 건축해도, 다 주님이 하신 것이기에 나는 철저히 죽어야 한다고 또 다짐하고 또 하고 또 했습니다. 

 

순식간에 10여명의 옛 직원들이 달려와서  당장 내일부터 출근을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은 직장 출근을 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들의 말에 감동이 되어서 속으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망한 회사, 망한 사장을 저렇게 믿어주고 신뢰하는 저 귀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역할을 해 준 공장장 박 집사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일꾼들을 이 사업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이들을 주께 하듯 잘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상신메리야스 공장에서는 두 번째로 다시 가동되는 기계소리가 밖으로 들려 왔습니다.  

 

 

 

(23)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6)

그동안 황해도 구월산 자락에서 산나물 캐고 땔감 나무하고 사과 농사짓던 시골 사람이 물론 고난의 세월은 살았지만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축복의 때가 되었습니다. 조일고무에 이어 동신 화학도 같은 조건의 계약을 이루었고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든 원단을 한통씩 감아서 무게를 재서 납품을 시켰고 그래서 제품 무게가 아주 중요했고 그래서 한 통에 40KG 50개씩 이틀에 한 번씩 납품을 하면 어음을 주는데 그 어음은 당시 삼성이나 현대가 아직 없을 때 그 두 회사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가기에 상장 어음이라 일반 시중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언제든지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노력을 하면서 사업을 해도 실제로 돈 버는 기간이 약 5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절을 만나야 하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물건 만들면 살 사람도 없지만 그 시절에는 황금 어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 중에 복을 주신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어 주었습니다. 하늘에서 돈 자루에 구멍이 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장화를 신어야 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명 한복을 입었는데 대한민국 도로가 당시 포장이 거의 안 됐습니다. 그러니 겨울에는 눈이 와서 장화를 신어야 하고 그 눈이 녹아 질벅질벅하니 장화 없이 나갈 수 없었으며 초여름 지나면 장마가 왜 그리도 오래가는지 온땅이 진흙투성이기에 누구든지 길을 가려면 장화를 신어야 옷을 버리지 않고  걸어 다닐 수가 있는 시절이라 그때 신발 공장에 전국에서 돈을 한 가방씩 들고 신발 도매상들 수 백 명이 와서 막무가내기로  장화를 주어야 나머지 신발을 사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장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장화 속에 들어가는 천을 만드는데 무슨 영문인지 이런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 우리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복을 만들던 때보다 직원도 3분의 1만 있으면 되고 염색도 까다로운 색깔이 아니고 모든 공정이 만들기에 쉽고 또 재료가 그렇게 고급 실이 필요하지 않기에 원가가 절감되고 반대로 이문은 내복에 비해 배로 더 남는 세상에 이런 사업이 내게 주어졌고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답이 없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이루신 결과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군에 간 아들이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이 기적이었고 그때 아들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쫄딱 망한 상황에도 교회에 부지를 헌물하시더니 이렇게 축복이 되었다고 진심으로 은혜를 체험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돈을 따라 갈 때는 돈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돈을 생각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니 돈이 따라왔습니다.

“갑질”이라는 말을 알지요, 수원에 직원 30명을 거느린 작은 공장 사장이 대기업에 납품을 하려면 구매 과장 와이프 생일까지 챙겨야하는 강자의 횡포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제까지 개입하셔서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계약서에는 내가 “을”인데 현실에서는 제가 “갑”이었습니다. 이유는 아침마다 대기업 회장님이 구매과장 불러서 군대 용어로 ‘쪼인트’를 걷어차면서 “너 오늘도 상선메리야스에 가서 물건 충분히 못 가져오면 사표 써” 아침마다 이런 압박을 받은 직원 만명을 거느린 대기업 두 구매 과장이 와서 “이사장님 저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은 제게 구매 과장 목 날리는 힘까지 주셨습니다. 만약 내가 납품을 하루 늦추면 그들은 해고되고 맙니다.
 한국 대표고무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느냐 멈추느냐하는 일이 내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그때 알고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죽음의 길로 내몰린 아들을 눈물로 부르짖던 황해도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몸을 파고들어오면서 나는 아무것도 주님 위해 한 일이 없는데 이렇게 밀려오는 축복이 좋다고 펄펄 뛸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겁이 나고 무서움이 밀려오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이 물질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돈이 들어오는 대로 어려운 교회를 우선적으로 성전건축을 위해 쓰기로 했습니다.  

 

 

(24)

 

원단 짜는 기계를 5개를 더 들여놓고 직원 30명이 3교대로 나누어서 24시간 풀가동을 하였고 밤낮 기계가 돌아가니 물건이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내가 구하는 것 마다 다 응답을 하셨습니다. 집사람 성자 엄마를 만나지  십 여 년이 지났으나 그동안 형편도 어려웠지만 그러나 아직 가고 싶은 친정에 못가는 집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일도 놀라운 방법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어느날 우리 김 기사가 옛적에 모시던 부대에 높은 장군이 불러서 갔는데 장군이 쓰던 자동차를 급하게 처분을 해야 하는데 당시 너무 고급차라서 일반 사람이 살 수가 없기에 김기사에게 반값으로 줄테니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상신메리야스 사장님께 준 선물이라고 단정하며 차를 몰고 왔습니다. 군인들이 관리한 번쩍 번쩍 빛나는 당시 가장 고급차인 뉴크라운을 제가 사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현대 기아 대우가 아직 없을때 코로나, 뉴코로나, 세분틴, 뉴세분틴, 그리고 일반 크라운과 우리가 산 뉴크라운은 길이가 길고 검정색 최고급으로 모양과 디자인이 대단하였고 참고로 경기도지사가 같은 차를 타고 경기도에 2-3대 밖에 없는 차를 하나님은 저에게 주었습니다. 3년된 100% 일본제인, 당시 고속도로가 없기에 마일리지는 겨우 10,000 Km 정도인 특히 군에서 관리하여 거의 새 차 였습니다. 왜 이 차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 처가집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그때 차를 타고 거리에 나가면 교통순경이나 특히 경기도 일원에 있는 검문소를 지나면 다른 사람은 다 신분증 조사를 하는데 우리 차는 단 한번도 검문을 받은 적인 없고 오히려 경례를 붙입니다. 경기 도지사차량 번호가 1000번이고 우리차는 1002번입니다. 컴컴하게 유리 썬팅이 되어 있고 누군지 알수도 없고 만약 잘못 검문했다가 혼이 나기에 아마 높은 사람이 안에 타고 있는 줄 짐작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자동차 문화가 그랬습니다. 이제 이 자가용을 타고 처음으로 처갓집에 간다는 기별을 했습니다. 새 양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낀 김기사는 우리 부부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본인이 더 흥분을 하면서 잘 모시겠다는 김기사 옆 좌석에 내가 타고 집사람과 딸 숙자 성자 셋을 뒷자리에 태우고 남자 아이들은 회사에서 쓰는 큰 화물차 짐속에 탔습니다. 그 시절 화물차에도 자연스럽게 타고 다닐 때 입니다. 그날 화물차에 처갓집에 줄 선물을 100만원 가치의 물건을 실었습니다. 당시 우리 회사 직원 한달 급여가 7-8천원 할 때 입니다. 창세기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 올 때를 예상하면 거의 맞을 겁니다. (온 가족 옷 20벌, 카시미롱 이불 열채, 소뒷다리 둘 돼지 반마리 과일 종류별 여러 상자, 등등, 영동 시장 물건을 눈에 보이는 대로 가득 실었습니다.)

 

수원 영동시장에서 노점을 하던 아이 셋 둔 홀아비에게 금쪽같은  딸을 보내고 눈물로 사셨던 장인 장모님을 제가 이해하면서 늘  미안 했는데 이제 가난뱅이 홀아비가 경기도 부자가 되어서 처가에 갈 때 평택 사람들이 다 길에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고 장인 장모님은 버선발로 달려 나와 우리 아이들을 덥석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첫 마디가 “과연 너희들이 믿는 예수님이 진짜구나” 가난뱅이 홀아비가 이렇게 살줄 몰랐다고 합니다. 조금 살다가 헤어져서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마 평택이 생기고 제일 좋은 자동차가 왔다고들 했습니다. 결혼하고 13년만에 간 처가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외갓집이 생겨서 좋았고 제가 평생 고마웠던 우리 장인 장모님은 이북에서 온 아이들 셋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고 여섯 손자를 한결같이 챙기셨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이 그립습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시던 모습을 이북에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보다가 두 분이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분들은 유교 사상을 뿌리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던 처갓집 가족 친척 모두를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 시켰습니다. 내가 만나 하나님은 그 어른들도 동일하게 만나 주셨습니다. 평택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놓고 집사 직분을 가지시고 10여년을 사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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