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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아흔이 넘어도 모르는 것(스물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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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22 18:08 조회1,37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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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시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는 할아버지 한숨에 땅이 꺼진다. 한 번도 짜증을 내신 적 없는 닉 할아버지가 저녁을 드시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방으로 가셨다. 같은 테이블에 앉으신 분들은 못 본 척 식사를 계속 하셨고 할아버지의 아내 라일라 할머니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계셨다.


닉 할아버지는 까다롭고 짜증 많은 할머니 비위를 맞추고 다독이며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잘 살아오셨다. 금실 좋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아내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 오실 것 같은 할아버지는 언제나 허허 웃음으로 할머니의 짜증을 넘어가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다. 궁금해진 내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 의무실 앞에서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어디가 불편세요?” 했다. “소화가 안돼서” 하시기에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내가 “어휴, 여자란…” 하며 이마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화난 척 “너도 여자잖아?” 하셨다. 


사연은 이랬다. 매일 저녁시간이면 할아버지는 삶은 계란 하나를 가지고 오신다. 언제나 할아버지는 스프를 드시고 할머니는 샐러드를 드시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계란을 가지고 오셔서 할머니 드실 샐러드 위에 잘라 주셨다. 지극 정성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오전부터 병원에 들러 이것저것 검사를 받고 지친 탓에 계란을 잊으신 것이었다. 샐러드와 스프를 받고 기억이 나신 할아버지는 급히 방으로 가 계란 한 알을 들고 오셨다. 아무리 급히 가신들 할아버지 연세 아흔 이신 데 얼마나 빨리 가시겠는가. 계란을 가지고 테이블로 왔을 땐 메인 요리가 나왔고 옆으로 밀어 둔 샐러드 위에 계란을 잘라 올리자 “너나 먹어” 하며 할머니가 버럭 화를 내신 거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케케묵어 곰팡이내 나는 과거를 들춰내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드셨다. 미안하다고 다음엔 절대로 잊지 않고 챙기겠다고 해도 특기인 잔소리를 멈추지 않으셨다. 첫아이 출산달에 출장 갔던 죄, 퇴근시간 늦은 죄, 친구와 다툴 때 자기편 들지 않은 죄, 알게 모르게 지은 죄명이 단두대위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딱 한 번 잊은 할머니 생일까지 데리고 나와 심판을 하니 하루 종일 검사 받느라 지친 데다 스프 한 술 입에 넣지 못한 할아버지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버린 것이었다.  


여자 마음을 보려고 화성 남자 금성 여자도 만나봤고 나름 여자 공부에 이력이 날만큼 공부했건만 “아흔이 넘도록 여자를 모르겠다” 하신다. 어이할 까나 나도 여자 인 것을…나도 알게 모르게 상처 주었음에 틀림없는 여자인지라 할아버지의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만 있었다.


우연히 인터넷에 올라있는 “여자심리 챕터1”이라는 사진을 본적이 있다. 챕터 하나가 열 권도 넘어 보이는 분량의 내용이었다. 정신 분석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조차도 여자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동물이라 하니 그런 가보다 했다. 심리학의 아버지도,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도 모르겠다는 여자 네 명과 할아버지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남자 네 명이 여행을 갔다. 나와 내 여고 동창생 3명이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간 것이다. 밤늦도록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와인과 소주잔이 오가다 보니 분위기의 힘을 얻은 친구 남편이 “여자는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미지의 세계”라 했다. 자동차 디자이너였던 친구 남편은 “여자는 내가 본 그 어떤 기계나 생명체중 가장 복잡하고 센스티브하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의 남편은”지구상에 존재하는 제일 복잡한 미로” 라고 했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기라 리조트로 오면서 길 찾기가 쉽지 않았던 또다른 친구 부부는 한참을 헤매고 다투며 숙소를 찾아왔다. 길 찾느라 고생한 남편 왈 “여자란, 가도 가도 끝없고 표지판 하나 없는 비포장 도로”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금성여자들이 “절대로 이해 안 되는 남자”를 정의하기 시작했다. “내 남편은 눈앞에 치즈를 두고도 어디? 어디? 를 수 십 번씩 외치는 장님이다” 하니, 옆에 앉은 친구가 “내 남편은 어쩌구, 양말 하나 똑바로 못 벗는 세 살 박이 어린애다” 했다 그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그건 약과지 내남편은 뭐든 꼭 말로 설명해야 해, 척 보면 몰라? 내가 화난 건지 피곤한 건지?”하며 서로 무슨 흉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병목현상까지 빚어가며 숨어있던 바보들을 끝없이 끌고 나왔다. 끌려 나온 바보들을 모아 놓고 내린 결론은 “나니까 당신과 산다”는 말이었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아메바에 끝없는 바보가 되어가던 천사표 남편들은 하나같이 똑 같은 말“남편이 잘못했네”로 백기를 들었다. 


늘 그런 것도 아니고 모든 남편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내 주변의 남편들은 대체적으로 “못이기는 척”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평화유지군이다. 그런 남편의 속 깊은 사랑과 인자한 미소를 보지 못하는 라일라 할머니는 닉 할아버지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까지 알뜰히 끌어안고 사신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걸 함께해야 하고 모든 일을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할머니에게 각자의 공간이란 없다. 사랑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그림도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제대로볼 수가 없건만 잠시도 할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신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그림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같은 작품은 최소한 4미터는 떨어져서 봐야한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반짝이는 금빛에 눈만 부실 뿐, 키스하는 여인의 홍조 띤 얼굴이나 무릎 꿇은 여자의 위태로운 발끝 같은 건 볼 수도 없다. 여유롭게 떨어져서 전체를 보면 키스하는 연인의 발 아래 피어 흐드러진 보랏빛 꽃밭도, 여자의 발끝이 닿은 아찔한 절벽도 보인다.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여인의 오그라든 손과 꼭 다문 여인의 입술을 보며 어떤 이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황홀함을 보고 어떤 이는 억지로 끌어안긴 여인의 숙명을 본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면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의견이 다른 미스터리에 쌓인 작품 “키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며 각자의 상상대로 느낌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이나 음악을 즐기듯 결혼생활도 인생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자유롭게 즐기고 누려야할 대상을 견뎌야 할 의무나 집착으로 얽맨다면 인생은 클림트의 그림처럼 발 밑은 꽃밭 같으나 실은 천 길 낭떠러지 같을 터이니…. 


다음날이었다. 할아버지 닉은 할머니 점심을 방으로 가져 가신다며 샐러드와 스파게티를 주문을 하셨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불편하셨는지 반성중 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방에서 꼼짝 않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안타까운 표정을 보이자 할아버지는”어휴, 여자란” 하시며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소탈하게 웃으셨다. 그렇게 “어휴”에 너털웃음 한 번으로 칼로 물을 베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점심을 들고 부지런히 방으로 돌아 가셨다.


축복받은 행성 지구별에 별들이 반짝인다. 지구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밝힌 불빛이 별처럼 반짝인다. 화성남자도 금성여자도 아닌 지구인으로 사랑하며 화평하자고,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총을 다 함께 누리 자며, 거리마다 집집마다 별들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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