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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풍경 (스물네번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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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1-19 09:51 조회2,0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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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버터와 레몬향이 물씬 풍겨 왔다. 콧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큰딸이 안심 스테이크와 스캘럽 구이를 하고 있었다. 새하얀 식탁보를 씌운 테이블 위엔 정원에서 꺾어 다 꽂은 분홍장미와 가늘고 긴 분홍색 촛불까지 갖춘 제법 근사한 디너 테이블이 셋팅 되어 있었다. 순간 ‘남자친구가 생겼나? 인사하러 오려나? 승진했나? 뭐지?’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추측들이 내 머리속을 뛰어다녔다. 특별한 날 좋은 사람과 마시 자며 깊숙이 넣어 두었던 와인 샤토 드 페즈까지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작은 딸과 남편도 “무슨 날이야?” 하며 토끼 눈을 하고 내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이곳 리타이어먼트 홈에서는 ‘무슨 날’이 아니어도 저녁식사시간이면 많은 분들이 와인을 한잔씩 들고 나타나신다. 다이닝룸 옆에 있는 바에서 취향대로 사 오신다. 입주민을 위한 봉사 차원이다 보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바텐더도 입주민들이 자원해서 돌아가며 하신다. 제일 자주 당번을 하시는 분은 비행기 승무원으로 오랫동안 일을 했던 81세 제라르 할아버지다.  매일저녁 아내 제이미와 함께 제일 좋은 와인으로 식사를 시작하시는 할아버지의 피는 모두 와인으로 채워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좋아하시고 즐겨 드신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의 말투, 모습, 인품은 잘 익어 향기로운 와인 같다.

 

할아버지는 와인의 역사는 물론이요 포도의 종류와 수확시기 와인제조과정과 오크 통 제작에 이르기까지 와인에 관해 모르는 게 없다. 와인 좀 안다 하시던 분들도 제라르 할아버지의 해박한 지식 앞에서는 침묵하신다. 어려 서부터 우유대신 와인을 마셨다는 할아버지는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 중 하나인 보르도 출신이다. 할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와이너리를 하시던 아버지를 도와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해서 와인을 만들었다. 그랬던 제라르가 와이너리를 떠나 비행기 승무원의 삶을 사셨 다니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지 늘 궁금했다. 

 

한여름 땡볕아래 달콤하게 익어가는 탐스러운 포도를 따는 일은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것처럼 낭만적이지도 보람되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장남이었던 제라르가 와이너리를 물려받기를 바라셨지만 어린 제라르는 영글어가는 포도나 익어가는 와인에서 기쁨이나 보람 같은 건 찾을 수 없었고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하고 온세상을 구경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한 병의 와인이 이름을 가지려면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포도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열매가 열리고 익기를 기다려 수확을 한다. 모든 와인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오크 통안에서 2년의 숙성 과정을 거친 뒤 에야 와인의 이름을 달고 세상으로 나온다. 세상에 기다림 아닌게 뭐가 있을까 마는 와이너리에서의 일상은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늘 기다려야 만하는 일상은 성격이 급했던 어린시절 제라르에게 영원처럼 느끼게 했고 얼른 자라 독립하기만을 기다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아 놓은 용돈 몇 푼을 들고 파리로 갔다. 부모님을 사랑했지만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이 있었기에 고향을 떠나 비행기 승무원이 되었다. 비행사에서 보내온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날아갈 듯하던 심정은 기분에 그치지 않았고 오대양 육대주를 원 없이 날아다녔다. 좋은 곳, 맛난 것,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수많은 위험의 순간과 마주했고 별의 별일을 다 겪었다. 기다림이 싫어 승무원이 되었건만 승무원이란 직업은 기다림이 전부였다. 비행 스케줄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비행 시간을 기다리고 이륙 허가를 기다리고, 나타나지 않는 승객을 기다리면서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쉽사리 그만두지 못한 건 지금의 아내 제이미 때문이었다. 

 

같은 비행사에서 근무하던 제이미는 동료와 승객 모두가 좋아하는 너그럽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구애한 끝에 결혼을 하고 30년 가까운 세월을 하늘에서 보낸 부부는 최종 착륙지로 제이미의 고향인 이곳 밴쿠버를 선택했다. 

 

허리 디스크를 앓던 제이미는 53세가 되던 해에 은퇴를 했다. 우유대신 와인을 마시고 자란 할아버지는 비행사를 퇴직한 뒤 말년을 와인 소믈리에로 일 할 수 있었다. 손님들에게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고 대접하는 건 사교적인 할아버지의 성격과 잘 맞았고 놀이삼아 일 하셨다. 승무원으로 살던 시절도 좋았지만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로 살던 시간이 더 좋았다는 할아버지는 “나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행복 해” 하신다. 그런 할아버지 곁에 있노라면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은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꼬리는 내려오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비행일정에 맞춰진 삶을 살던 두 사람이 참 행복을 찾은 건 자신들의 시간에 세상을 맞추면서부터 였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여행, 조카의 결혼식, 가족들의 생일, 친구 들과의 만남 등, 자신들이 선택한 시간에 맞춰 진행되는 모든 일상이 행복이었다. 매일같이 땅을 디디고 사는 것, 누구나가 다 하는 이 당연한 것이 그들에겐 커다란 기쁨이라는 부부는 매일아침 주변에 늘려 있는 축복의 땅으로 산책을 나간다.  

 

한번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와인이 뭐냐 고 물었다. 뭘 것 같냐 고 되물으시길래 들은 풍월을 읊어 보았다. 페트루스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셔서 1945년산 로마네 콩티냐고 했다. 그것도 아니라 하셨다. 샤토 마고도 아니고 한 병에 3억 5천만원이 넘는다는 1947년산 샤토 쉬발 블랑도 아니라고 하셨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던 할아버지는 자라 나오기 시작한 하이얀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쓱 쓱 문지르시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바로 지금 마시는 와인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와인이야” 하셨다.

매일저녁 세상에서 제일 좋은 와인을 마시는 부부는 식전에는 화이트와인으로 식욕을 돋우고 메인 메뉴가 나오면 그에 어울리는 와인 한잔을 추가하신다. 할머니 제이미의 와인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그윽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미소로 답하는 할머니... 그 순간 *피노 누아 만큼이나 향기롭게 익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은 그 어떤 경치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노부부가 연출한 풍경을 뒤로 하고 돌아온 그날 저녁, 아껴 두었던 샤토 드 페즈를 열었다. 짙은 루비빛깔의 와인을 한 모금 삼키자 풍성한 과일 맛과 향그런 꽃내음이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남자친구가 생긴 것도 승진을 한 것도 아닌 그날, 우리는 백 불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가족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건강하게 돌아온 저녁, 다 같이 둘러앉아 늦은 저녁밥을 먹는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한 오늘을 위해.

 

*피노 누아(Pinot Noir): 가장 우아하고 값비싼 와인을 만드는 것으로 껍질이 얇고 포도알이 작은 적포도로 재배와 양조가 아주 까다로운 품종이다. 모든 다른 포도품종과 마찬 가지로 기후와 토양 수확 시기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른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대체적으로 부드러운 여름 과일 풍미에 향기로운 꽃내음이 어우러진 여성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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