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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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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9-21 19:57 조회8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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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인 / 캐나다 한국문협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이제 조석으로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소나무에서 솔가지들이 챠르르 떨어져 쌓이고 툭 하고 솔방울도 떨어진다. 드디어 계절이 바뀌려나 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번 여름이 서서히 저물고 있다. 유난히 많았던 산불이 아직도 진행 중이고 그래서 저 건너편 하늘은 맑지 못하고 부옇다. 바람결에 탄내가 코로 스며들 때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수많은 동물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이 참으로 딱하고 애잔하였다. 그래서인지 해가 질 무렵 바라보는 노을이 더 없이 슬퍼 보였다. 아름답고 장엄해야 할 서쪽 끝에 놓인 그것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황량함과 허무만을 남겨주고 있다. 더는 노을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 어떤 일이 앞으로 펼쳐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실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씩씩하게 손 흔들며 떠나던 태양이 이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마지못해 걸음을 옮긴다, 남아있는 우리가 마음에 밟히기라도 하는 듯이.


언젠가 이처럼 느끼던 때가 있었다. 더는 지는 노을을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없던 때였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던 가을날 오후, 대학에서의 마지막 중간고사에 실패하고 텅 빈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렸다. 도저히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표를 끊고 어린이 대공원으로 들어갔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그 많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 부모님은 오 남매를 데리고 공원을 구경 시켜 주셨다. 내 나이 일곱 살,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공원은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였었다. 한적한 공원을 걸으니 마치 전시 중인 착각이 들었다. 십 오 년 전의 꼬마가 어엿한 숙녀가 되어 혼자 공원을 걸으니 괜히 뿌듯했다. 기분이 한결 나았다. 중곡동 후문으로 나오니 어스름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이제 막 나왔는지 포장마차를 열다 말고 아주머니 한 분이 걱정스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두르고 있던 때절은 앞치마가 왠지 모르게 슬펐다. 이어 망쳐버린 시험이 생각났고 국가고시를 치러야 하고 취업도 해야 할 현실에 급격히 우울해져 버렸다. 마음의 은신처가 절실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장마차로 향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소주 반 병과 홍합탕을 시켰다. 천천히 한 잔을 들이키고 몰래 엿보는 아주머니에게도 한잔하시라고 권했다. 기미 낀 그녀의 얼굴에 엄마의 얼굴이 어렸다. 인정에 오랫동안 목말랐던지 그녀는 마다하지 않고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탕 그릇을 그녀 앞으로 밀어주며 천천히 드시라 했다. 따스한 집안에서 가족의 저녁 식탁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에 홀로 장사를 나온 그녀가 안쓰러웠고, 씩씩해 보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내리는 비를 보았다. 온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우동 국물의 내음이 넌지시 피어 오르고 진열대 안쪽에서 산 낙지가 소리 없이 꿈틀거렸다. “학생, 부모님께 잘해요. 자식이 못사는 모습 보여주면 부모는 가슴이 제일 아프다오, 그것이 다 부모가 못나서 그런 것 마냥 부모는 또 자기 탓을 하며 괴로워한다”고 했다. 그때 그녀의 말이 화살처럼 심장에 날아와 박혔었다.


그렇다. 지는 노을이 아름답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루의 임무를 완수하고 힘찬 내일을 준비하며 보무도 당당히 떠나는 태양의 뒷모습은 항상 찬란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 태양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태양과 같을 때 비로소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지금은 따뜻하고 평안한 저녁을 마주하고 있으리. 그녀만의 삶에 대한 성실이 그녀에게 아름다운 노을이 되어 빛을 발하고 있으리라. 넘어지고 때로는 아프고 불안해도 그 불변의 진리를 믿고 계속해서 전진한다면 다시금 나의 노을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감동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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