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난 창] 연재를 마치며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LIFE

문학 | [서쪽으로난 창] 연재를 마치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9-30 10:00 조회1,163회 댓글2건

본문



2899992623_wt7cSMq1_f2ceef366705b8f8ae4f6497b2cd5899042c07e6.png

             박지향




모국어가 멀어져 갔습니다. 그렇다고 영어와 친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느낀 언어의 한계는 내 삶의 한계였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쪽 발은 고국에다 올려 두고 또 다른 발은 익숙해진 낯선 땅 캐나다에 놓고 열여덟 해를 살았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한쪽에 두 발을 모아야 했습니다. 그때 입사한 곳이 인디펜던트 리타이어먼트 홈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단 말처럼 상처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과 나고 자란 땅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인생이 없다는 걸 맨눈으로 보았습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다가 나도 따라 핏물을 쏟으면서도 8,90년을 살아온 두터운 손으로 내 등을 쓸어 주실 때는 정작 사랑과 위로를 받은 건 나란걸 알았지요.  오가는 말은 많아도 남는 건 없고 권리를 주장하느라 의무를 다 하지 않았던 시간 속에 편견을 타도 하자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편견의 가혹한 자를 들이댄 사람은 바로 나란 것도 알았습니다.

 

평균나이를 85세로 보고 어림잡아 400명의 입주민을 만났다고 계산하면 내가 만난 시간은 3만 4천년이나 됩니다. 잘 먹고 잘 살았지만 늘 허기진다는 분도, ‘가족을 위해서’ 라 했지만 내세운 명분 뒤에 감춰진 탐욕과 부서진 가족사도 읽었습니다. 사랑했기에 모든걸 바친 뒤 무너지는 사람도, 끝까지 가 보지도 않고 길이 없다며 돌아선 사람도, 이별 뒤 비로소 시작된 사랑도 만났습니다. 수많은 사람에 수많은 사연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정답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묵묵히 걷는 길이 지름길’이란 것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던 ‘대단할 것 없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시던 말씀에는 빨간 색연필로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쳐 두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와 팔십 년쯤 살고 나면 건강하게 지내시다가도 갑작스레 호스피스병동이나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로 한번 더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나 대다수 입주 민들에게는 종착역으로 가는 마지막 정거장이기에 어디로 옮겨가든 이곳에서의 이별은 아프고 애틋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 순간이 간절한 순간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언젠가부터 회자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이곳에서의 일상이지요. 잘 살기 위해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할 순 없지만 누군가의 영정사진 속에 내 사진을 넣으면서 내 삶이 가벼워졌습니다. 그곳은 각자는 하나의 섬처럼 떨어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미처 가 보지 못한 나의 성지(聖地) 였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듯 걸었던 노인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나’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 될 것인가?’ 도 중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곳은 기억하는 것만이 전부인 세상 이었으니까요. 몇 번 만난 기억으로 평생을 사랑하고 영원히 그의 아내로 살아오신,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연(緣)도, 평생토록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두고두고 자신을 찌르던 할머니의 당신이 만든 감옥도 보았습니다.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했으니 성공한 인생이었다는 분과, 부귀영화를 누린 적도 생의 무대에 주인공이 되어 본적도 없지만 자신의 임무를 다 했으니 후회 없다는 삶도 만났습니다. 일평생이 행복하기만 하거나 불행하기만 한 인생은 없었습니다. 고통스런 순간과 기쁨의 날들, 그 모든 순간이 모여 만든 인생이지만 어떤 분은 아픔만을 기억했고 또 어떤 분은 사랑했던 순간과 기쁨의 순간을 더 많이 기억했습니다. 현재 나를 만드는 건 ‘기억’ 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생에 2막을 열어 준 직장을 떠나며, 인생의 황혼기이며 우리 모두가 걸어가고 있는 “서쪽으로 난 창”도 닫으려 합니다. 그동안 소중한 사연과 은밀한 사연까지 나눠주시고 아픈 삶 속으로 기쁘게 초대해 주신 노인 분들께 고 장영희 교수가 “되돌릴 수 없는 청춘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의 내 계절을 받아들임은 아름답습니다. 육신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은 아름답습니다. 이제껏 호두껍질 안에 가두었던 내 마음을, 내 이웃, 아니 온 세상을 향해 여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라며 번역 소개한 ‘칼 윌슨 베이커'의 시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끊임없이 베풀어 주신 관심과 사랑을 기억하며 긴 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귀한 지면을 할애 해 주신 중앙일보 사에도 감사 드립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또 다른 글로 다시 돌아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Let Me Grow Lovely)

칼 윌슨 베이커  (Karle Wilson Baker)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象牙)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꼭 새것만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어 있듯이

 

  이들처럼 저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욱 아름다워질 수는 없나요.

 

 

Let me grow lovely, growing old

 

  So many fine things do:

 

  Laces, and ivory, and gold,

 

  And silks need not be new;

 

  And there is healing in old trees,

 

  Old streets a glamour hold;

 

  Why may not I, as well as these,

 

  Grow lovely, growing old.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끝난 줄도 모르고 왜 글이 실리지 않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조금은 생소한 환경에서 맑은 마음으로 나이 드신 외로운 분들과의 만남을 아름답게 잘 담아서 표현한 글이 오래 도록 반짝이리라 생각합니다. 화가이면서 시인이신 필자가 이렇게 산문도 잘 쓰신다는 게 너무 반가웠습니다. 더 좋은 글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글 쓰는 일 멈추지 마시기를...

박지향님의 댓글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마지막까지 귀하고 정성스런 발자국을 남기셨군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창을 열어 볼 여유가 없었구나' 하며 송구스런 맘 금치 못합니다. 일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누구나 가야 하고 언젠가 도달하게 되는 "노인의 나라"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욱~~훑어 보니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한 빛나는 인생에 죄송한 마음이 크게 다가오네요. 감사드리며 끊이지 않는 선생님의 빛나는 장도를 기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LIFE 목록

Total 5,757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