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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문학 신춘문예 당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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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문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3-30 12:53 조회7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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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차상


호접몽(胡蝶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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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영

 

1

아버지는 일주일째 술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었어. 집을 나간 엄마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는커녕, 두문불출 오로지 술만 퍼마셨지. 마치 술을 퍼마시다가 죽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어.

나는 질식해 버릴 것 같았어. 담배연기에 찌든 알코올 입자들이 내 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어. 나는 창문을 열었어. 은회색으로 얼어붙은 하늘, 검고 앙상한 나신을 드러낸 나무들, 그리고 침묵에 빠져있는 주택들. 빛바랜 흑백 사진을 닮은 풍경 속으로 잘디 잔 눈발들이 날벌레처럼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어.

추웠어. 그리고 황량했어. 집 밖을 내다보아도, 집 안에 앉아있어도 마찬가지였어.

 

어차피 아버지는 엄마를 찾을 수는 있어도 다시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거야. 무려 다섯 번째 가출이었어. 엄마는 툭하면 자기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낭비되는 건 참을 수가 없다고 말했어. 마지막으로 나가던 날, 엄마는 살아도 그 소극장에서 살고 죽어도 그 소극장에서 죽겠다는 말을 했지.

엄마와 아버지로 말하자면, 현대판 선녀와 나무꾼이라고나 할까. 명문대 국문과를 나와 극작가를 지망하던 엄마와 중학교만 졸업해서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아버지. 선녀는 재색을 겸비했지만 가난했고, 나무꾼은 다소 무식하기는 했지만 부유했지. 두 사람의 결합은 퍼즐 같아 보였어. 서로가 서로의 빈 공간을 적절히 메워주는, 직소퍼즐. 그렇지만 그 결혼으로 인해 엄마는 날개옷을 빼앗긴 선녀 신세가 된 거야.

선녀는 어느 날 날개옷을 되찾을 결심을 했어. 연극을 선망하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에서 연출가 행세를 하는 남자를 만나게 됐거든. 엄마는 그 사람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했지. 자기가 쓴 희곡을 그 사람이 연출하면 그 연극은 크게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던 엄마는, 가정과 현실이라는 짐들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고 예술과 이상이라는 천상을 향해 미련 없이 날아가 버렸어.

현대판 선녀는 자식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야. 형과 나를 나무꾼에게 남겨두고 떠났으니까. 이제 와서 말이지만 묘한 건 형도, 나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완벽하게 적응했다는 거야. 우리도 아마 내심 알고 있었던 거겠지. 엄마가 유일하게 사랑한 대상은 아버지도 형도 나도 아닌, 예술이었다는 것을.

 

엄마가 떠나버린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저녁이었어. 아버지가 긴 잠에서 깨어나 찬 물을 찾았어. 형이 책가방에서 웬 종이 두 장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물컵과 함께 챙겨들고 아버지 방으로 향했어. 형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종이를 방바닥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지. 긴장한 듯, 형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어. 아버지는 찬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켜고 정신을 좀 차린 후 형이 내려놓은 종이를 집어 들었어.

한 장은 성적표였고 한 장은 상장이었어.

성적표의 학업성적란에는 ‘수’라는 글자가 일렬횡대로 나열되어 있었고, 행동발달란에는 ‘가’라는 글자가 역시 일렬횡대로 나열되어 있었어. 그리고 상장에는 다음과 같은 상투적 문구들이 인쇄되어 있었어. 6학년 1반 성명 권승욱. 위 학생은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되므로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1996년 12월 17일 현광초등학교 교장 박영춘.

주독과 상실감으로 인해 탁해질 대로 탁해졌던 아버지의 눈빛이 갑자기 광채를 발했어.

“반에서 일등이냐.”

“아니요, 전교에서요.”

“너 장래에 뭐가 되고 싶으냐.”

“의사요.”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형은 아버지의 약점을 알고 있었어. 아버지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지. 긴 얘기지만 짧게 하자면, 이래.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촌부의 맏아들로 태어났어. 집안에 경제적인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버지를 중학교 졸업 후 사회로 내몰았어. 아버지는 모진 고생을 해가며 여동생 다섯 명과 남동생 한 명의 학비를 댔어. 고모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결혼을 했지만, 막내였던 삼촌은 대학까지 진학을 했어. 의대였어. 삼촌은 결국 의사가 되었지. 문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시한 온 가족이 의사가 된 삼촌만 극진하게 대했다는 거야. 삼촌이 의사가 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아버지는 내심 서운한 마음이 컸을 테지.

어느 명절날, 일가친척이 모여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삼촌은 아버지를 향해 별 생각 없이 한 마디 했어.

“형님이 뭘 안다고 그러세요.”

그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고, 실내 분위기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어.

“오냐 그래 니미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다.”

농담 끝에 살인난다는 속담이 있지. 물론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곁에 있는 사람들이 친인척만 아니었다면 능히 살인을 하고도 남았을 거야. 아버지는 삼촌의 멱살을 움켜잡고 흔들어대면서 그간 쌓였던 불평불만을 격한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퍼부은 다음, 끝까지 삼촌을 두둔하는 할아버지와 고모들을 향해 단호히 의절을 선언하고 말았어.

그런 아버지에게 의사가 되겠다는 형의 말은 엄청난 자극이었어. 아버지는 술독에서 헤어 나오는 기적을 몸소 실천해 보였고, 형을 의사로 만드는 일을 그야말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어.

 

2

그 날 이후 우리 가정은 다시 일상의 노선으로 되돌아갔어. 달라진 게 있다면 형이 중학생이 되었다는 것뿐이었어. 형은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명문사립중학교에 진학하는 데 성공했지.

입학식은 3월 4일. 입춘이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공기 속에는 아직 겨울 냄새가 남아 있었어.

형은 입학하는 날부터 모범생으로서의 자기 위상을 전교생 앞에 확고히 하려는 듯, 입학식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빨리 학교로 향했지. 반면 그날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어. 아버지가 그랬거든, “그깟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거라고 해봐야 별 대단할 것도 없으니 차라리 형의 입학식에 함께 가주는 편이 훨씬 낫다”고.

우리가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교장선생님이 연단에 서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중이었어.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휑하니 벗겨진 이마 이외에는 별로 인상적인 데가 없었어.

신입생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짧게 자른 머리 모양에, 천편일률적으로 밋밋하게 생긴 군청색 교복을 입고서 운동장에 도열해 있었어. 고만고만하게 생긴 소년들이 일사불란하게 줄을 맞춰 선 운동장 풍경은 고만고만하게 생긴 성냥개비들이 나란히 들어차 있는 성냥갑 안 풍경처럼 보였어.

그 성냥개비들 중 하나가 우리 형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형이 몹시 보고 싶어졌어. 형은 키와 체구가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니까 맨 앞줄 어딘가에 서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나 다를까, 형은 맨 앞줄에 서 있었지. 남달리 하얀 얼굴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뿔테 안경 덕분에 금방 눈에 띄었지. 형을 찾아냈을 때, 난 반가움보다 호기심을 느꼈어. 형은 분명히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암만 봐도 형의 시선은 연단 위의 대머리 교장을 향하고 있지 않은 거야. 형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냈을 때, 나는 충족감보다 실망감을 느꼈어.

형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화단이었어. 화단에는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꽃들의 머리 위를 이리저리 넘나들고 있었어. 딱히 신기할 것도 없는 그 생물에 형은 홀린 듯 한눈을 팔고 있었어. 나비 처음 보나, 원. 내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는데 아버지가 내 뒤통수를 한대 쥐어박았어. 조용히 하라는 거였지.

입학식이 끝난 후, 교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형에게 아버지가 기념사진 한 장 찍자며 꽃다발을 건넸어. 볼썽사납게도, 그 꽃다발은 조화다발이었어. 입학철이라서 생화 구하기가 조화 구하기보다 더 쉬운데도 굳이 조화를 산거야. 두고두고 활용할 수 있는 조화. 역시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문득 내 중학교 입학식에 저 꽃다발을 가지고 올 아버지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져서 나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어.

꽃다발이 조화라는 사실을 알아챈 형의 표정이 일순 뜨악해지는가 싶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형의 뜨악한 표정을 카메라 울렁증 정도로 생각하는 눈치였어. 아버지는 조화다발을 들고 덩그러니 서 있는 형을 향해 채근하듯 스마일, 스마일을 외치면서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했지. 형 혼자 있는 장면 몇 장,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도 몇 장, 그리고 아버지와 형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까지 몇 장. 그런 후 아버지는, 지나가던 아가씨에게 가족 모두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어. 아가씨가 파인더를 들여다보면서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아가씨가 꽃다발이 조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 같아 자꾸만 발바닥이 간질거렸어.

사진을 다 찍고 난 뒤 아버지는 형 손에 들려져 있던 조화다발을 빼앗다시피 낚아채서 내 손에 쥐어줬어. 잘 챙겨뒀다가 집에 가거든 화병에 꽂아서 거실에 두라는 당부와 함께.

 

북경반점. 기념사진을 다 찍은 다음 우리 가족은 동네에서 가장 큰 중국집인 북경반점으로 직행했어.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생일에는 자장면을 먹어야 정석이라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지. 그나마 오늘의 주인공인 형은 아버지의 특혜로 자장보다 약간 더 비싼 간짜장을 먹을 수 있었어.

형이 면을 비비다 말고 문득 입을 열었어.

“아까 나비를 봤어요. 삼월이라고 해도 아직 꽤 추운데 어떻게 벌써 나왔을까요? 크기는 작았지만 아주 새하얀 광채가 났어요.”

형이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나비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불쑥 말허리를 잘랐어.

“의사 가운을 입으면, 너한테서도 분명 새하얀 광채가 날 거다.”

그 말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장광설이 이어졌어. 중학교 과정이야말로 앞으로 네 인생의 초석을 다지는 과정이다, 중학교 때 공부 잘 한다고 해서 의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중학교 때 공부 못하는 놈은 죽어도 의사가 될 수 없다, 지금 공부 좀 잘한다고 해서 우쭐해하면 넌 네 삼촌보다 못한 놈 소리를 듣게 되기 십상이다 등등.

아버지 얘기를 들으면서 자장면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시커먼 자장이 그릇째로 새하얀 나비 위에 덮어씌워지는 장면이 떠올랐어. 무심코 형을 쳐다봤지. 형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버지 말씀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어. 하지만 별로 새겨들은 것 같지는 않아. 이건 나만 알고 있는 건데, 형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건 딴생각을 할 때만 나오는 습관이거든.

 

3

아버지는 형이 중학교 진학을 계기로 우쭐해져서 공부를 소홀히 할까 염려했어. 하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지. 중학생이 된 형은 고시생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공부에 몰입했거든.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어. 그리고 중학교 졸업 후, 형은 마치 정해진 수순이라는 듯이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지. 물론, 그 후로도 계속 공부에 매진했어.

형은 자다가도 툭 치면 잠꼬대로 3Ca(OH)₂+ Al₂(So₄)₃ → 3CaSo₄+ 2Al(OH)₃ 따위의 화학반응식들을 줄줄이 읊어댈 것 같았고, 배가 고파지면 라면에다 x³+x-³=(x+x-¹)³-3·x·x-¹(x+x-¹)를 김치 대신 곁들여 먹을 것 같았으며, 화장실에 가서는 accelerated, successful, exceptional 따위의 영단어들을 토막토막 배설할 것 같았어.

어린 내 눈에도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지. 갓 건져 올린 잉어처럼 펄떡거려야 할 사춘기에 수면부족과 빈혈로 비실거리는 학구파. 어느 가수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는 친구는 없고 어떤 참고서를 사서 보느냐고 물어보는 친구만 있는 우등생.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PC방에 들러 겜이나 한 판 때리고 가자는 친구는 없고, 자기 집에 가서 미적분 문제 몇 개만 풀어달라는 친구만 있는 모범생.

주위 사람들은 툭하면 나에게 너희 형 반만이라도 닮으라는 말을 하고는 했어. 하지만 정작 나는 단 한 번도 형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해 본 적이 없었어. 다만 안쓰러웠을 뿐.

 

아버지는 장기출장이 잦은 전기 기술자였어.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이면 형과 나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미리 준비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반찬 두어 가지만 가지고 대충 저녁을 먹어야 했지. 아버지가 남자란 자고로 부엌을 멀리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분식집 애완견도 끓인다는 라면조차 끓일 줄 몰랐던 거야.

하지만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이면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었어. 총각 시절 오랜 자취 생활 덕에 아버지는 요리 솜씨가 좋으셨거든. 맛도 좋았거니와 영양가도 아주 높았어. 아버지는 그것이 우리 형제를 꼼꼼하게 보살펴 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했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자존심 강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주방에 들어가는 건 순전히 형 때문이라는 걸. 특별보양식을 만들 때면 가끔은 딱 일인분을 준비해서 형에게만 줄 때도 있었거든. 공부를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지.

하지만 그런 음식이 형에게는 고문과도 같았어. 보양식이라는 게 대체로 단백질이 풍부한 육류인데다가 그 재료는 혐오스럽기 일쑤거든. 미꾸라지에서부터 장어, 산낙지, 달팽이, 보신탕, 개구리, 지렁이, 기타 등등. 육식도 즐기지 않고 비위도 약한 형에게는 신체적 이득보다는 오히려 정신적 피해만 가중시키기에 딱 좋은 음식들이었지.

아버지는 몸에 좋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렇게 하면 형의 비윗살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의사가 되려면 좀 징그러운 것도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지. 아버지를 위해서 형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각종 혐오식품들을 억지로 먹어야 했어.

하지만 혐오식품을 먹은 날이면 형은 반드시 아버지 몰래 화장실에 가서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고 음식물을 모조리 토해버려야 직성이 풀렸어.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화장실로 불려가서 형의 등을 두드려 주어야 했어.

나는 형이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좀 징그러운 식재료가 식탁 위에 등장하는 날이면, 형을 도와준답시고 가능한 한 많이 먹었어. 하지만 그걸 탐탁지 않게 본 아버지가 형 몫을 따로 남겨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도와주기를 포기해 버렸지.

 

4

“장하다 내 아들.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가 되어서 삼촌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려라.”

형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우리나라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다고 알려진 S대 의예과에 당당하게 합격한 거야. 아버지는 집 근처 대로변과 동네에서 가장 큰 사거리, 두 곳에 축하 현수막을 내걸었어. 그러고도 부족해서 마을회관을 빌리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지. 이웃사람들 중 몇몇은 형이 의사고시에 합격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의대에 입학한 걸 가지고 웬 난리를 그렇게 치느냐고 뒤에서 수군댔어. 하지만 그건 아버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고, 나로서는 아버지가 각 방송국과 신문사에 연락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어.

 

대학생이 된 형에게서는 생기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어. 물론 형은 애초에 성격이 쾌활하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한마디로 말해서, 이전처럼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는 게 아니라 침울하고 멍해 보였다는 거야. 비 오는 날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신문지 조각처럼, 햇살을 받지 못해 점점 누렇게 시들어가는 화초처럼, 구멍가게 유리창에 붙은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허옇게 색이 바랜 광고지처럼.

분위기 뿐 아니라 실제로 형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어. 고등학교 내내 입던 바지가 너무 헐렁해지는 통에 아직 중학생인 사촌에게 물려줘야 할 정도로.

 

"그래, 이왕지사 시작한 공부, 아예 사생결단을 한번 내 봐라."

아버지는 차라리 형을 기특해 하는 눈치였어. 하지만 내가 볼 때는 형의 신상에 뭔가 구체적인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어. 그래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분위기는 아니었어.

나는 형의 가방 속을 엿보기로 결심했어. 대학생이 된 후로 형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가방이었어. 형이 난생처음 자기 손으로 산 가방이라서 애착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형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방을 챙겨 들고 다녔어. 학교를 갈 때도 그 가방,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그 가방, 심지어 혼자 집 앞 편의점에 잠깐 나갔다 올 때도 그 가방은 빼놓지 않고 들고 다녔으니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어. 집에는 우리 둘 뿐인데, 형이 오랜만에 느긋하게 사우나를 해야겠다고 한 거야. 아버지는 한때 엄마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지우겠다는 의미에서 원래 있던 집을 허물고 직접 설계까지 해서 새로 집을 지었는데, 아버지의 배려로 형 방에는 꽤 커다란 욕조에 가정용 사우나 설비까지 갖춘 욕실이 딸려 있었거든. 나는 사우나 기계 특유의 작동소리를 확인한 후, 재빨리 형 방으로 숨어들었어.

가방을 찾기는 쉽지 않았어. 보통 가방은 책상 근처에 두기 마련인데, 형은 침대와 벽 사이의 공간에 넣어두었더라고. 그걸 보니 이 가방 속에야말로 형의 변화에 대한 단서가 들어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었어. 가방 속에는 대학노트 두 권과 의학교재 한 권, 그리고 시집 세 권이 들어 있었어. 의학교재가 한 권 뿐이라는 것이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이상한 점이 없었어. 나는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어. 차라리 권총이 한 자루 나왔다면 그렇게 맥이 빠지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무심코 노트들 중 한 권을 펼쳐 보았어.

 

5

형의 노트

 

昔者莊周夢爲胡蝶(석자장주몽위호접) 栩栩然胡蝶也(허허연호접야) 自喩適志與(자유적지여) 不知周也(부지주야) 俄而覺(아이각) 則蘧蘧然周也(즉거거연주야)

不知周之夢爲胡蝶與(부지주지몽위호접여) 胡蝶之夢爲周與(호접지몽위주여)

周與胡蝶(주여호접) 則必有分矣(즉필유분의) 此之謂物化(차지위물화)

어느 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그때 장주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마냥 즐거울 뿐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장주임을 조금도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꿈에서 깬 순간 분명히 장주가 되었다. 대체, 장주가 나비 된 꿈을 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되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제물편齊物篇에서 - 호접지몽)

 

6

사실 변한 건 형뿐만이 아니었어. 아버지도 달라지셨지. 제일 커다란 변화는 금연이었어. 흡연 경력 20년에 매일 두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워 온 애연가였던 아버지가 금연을 선언한 거야.

형이 대학 첫 강의를 듣고 오던 날 밤, 아버지가 현관에 들어서는 형과 나를 거실로 집합시켰어. 우리 집에는 가출할 엄마도 없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소파에 나란히 앉았어. 아버지는 잠시 우리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심호흡을 한 번 했어. 그러더니 호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꺼내서, 그 안에 들어있던 담배를 탁자 위에 와르르 쏟아냈어. 그러고는 한 개비, 한 개비, 손가락으로 똑똑 분지르는 퍼포먼스를 해 보였어.

“나 오늘부로 담배 끊기로 했다. 내가 명색이 의사 아들을 둔 애빈데, 담배 같은 걸 피우고 있으면 안 되지. 지 애비가 현직 골초인데, 아들이 환자더러 담배 끊으라는 소리를 맘 편히 할 수 있겠어. 안 그런가, 닥터 권?”

아버지가 씩 웃으면서 형을 쳐다봤어. 형도 아버지를 따라 씩 웃었어. 하지만 뻣뻣하게 굳어있는 입 꼬리 때문에 도저히 미소라고 부를 만한 표정이 아니었어.

그나저나 닥터 권이라니, 이건 또 웬 낯간지러운 소리야. 옆에서 듣는 내 얼굴이 다 뜨거워지는데, 의대에 갓 들어간 학생 처지에 닥터 소리를 듣는 형은 어떻겠어. 아버지의 평소 성격으로 봐서 분명히 남들 앞에서도 형한테 닥터니 뭐니 할 텐데, 그걸 듣는 상대방은 또 어떻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 눈치였어.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그날부터 꾸준히 형을 닥터 권이니, 권 박사 따위의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어.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남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그 호칭을 썼어.

 

달라진 건 또 있었어.

고등학생 때까지 형을 단골로 괴롭혔던 식재료들이 한동안 식탁에 오르지 않았어. 좀 의아했지만 단순히 아버지가 보양식 만들기에 지친 모양이라고 짐작했어. 물론, 오산이었지.

평소 일벌레인 아버지에게도 취미가 있었으니, 바로 등산이었어. 하루는 아침 일찍부터 등산을 다녀온 아버지가 현관에 들어서면서 날 급하게 찾는 거야. 재빨리 나가보니 배낭 좀 받으라고 소리를 지르잖아. 엉겁결에 받아들었어.

땀범벅이 된 아버지는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띠우고 나에게 배낭을 건넸어. 그리고 배낭 안에 있는 자루를 꺼내서 베란다에 가져다 두라고 시켰어. 자루 안에는 독사가 들어있으니 절대 열지 말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지.

“그거 몇 마리는 술 담글 거고, 몇 마리는 이따가 끓여 먹을 거다. 우리 권 박사 얼굴이 요즘 좀 까칠해졌어. 신경을 더 써야겠더라.”

 

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최근 등산을 갈 때마다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있었대. 눈인사를 하다가 보니 어느새 말도 걸게 되고, 그러다가 통성명도 하게 되고, 끝내는 등산 친구가 되었던 모양이야. 편의상 윤 사장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실제 직업은 땅꾼이었어. 그 아저씨 말이, 몸보신에는 늦가을 뱀이 제일 좋다고 하더래. 그래서 아버지가 뱀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지. 저 자루 속에 있는 것들이 그 부탁의 결과물이었어.

 

뱀 자루를 베란다 안쪽 후미진 구석에 처박아 놓고 돌아서는데, 등산복 차림의 낯선 아저씨 하나가 현관에 들어서고 있었어.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는 걸로 보아, 까무잡잡하고 땅딸막한 그 아저씨가 윤 사장인 것 같았어. 뱀 잡는 법과 중국식 뱀 샤브샤브 요리법을 알려주려고 왔다더군. 아마 아버지가 뱀 처리까지 도와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어. 윤 사장이 요란하게 뱀 껍질을 벗긴다느니 토막을 낸다느니 하고 부산을 떠는데, 나는 그 장면을 도저히 볼 재간이 없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

 

뱀 고기 손질이 끝나갈 즈음, 외출했던 형이 집에 돌아왔어. 아버지, 윤 사장, 형,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이 뱀 여덟 마리를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샤브샤브로 처리한 뱀 고기는 그나마 평범한 식재료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어. 정작 문제는 샤브샤브 다음 코스였어. 윤 사장이라는 사람이 부엌에 가더니 뭔가를 들고 나왔는데, 세상에, 뱀 껍질이었어. 뱀 껍질로 만든 요리. 접시 위에 반들반들한 뱀 껍질이 비늘 하나 손상되지 않은 채로 정갈하게 쌓여있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윤 사장은 죽은 뱀 대가리를 접시 복판에 장식이랍시고 올려놓았어. 한 마디로 몰취미하기 짝이 없는 장식이지.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뱀 눈알과 내 눈이 마주쳤어. 당장이라도 한 마리 뱀으로 되살아나서 접시 밖으로 뛰쳐나와 내 목덜미를 물어뜯는 상상이 들 정도로 또렷하게 생겼더군. 전신에 소름이 돋았어. 그야말로 내가 살면서 본 중 가장 혐오스러운 요리였어. 나는 재빨리 형의 얼굴을 훔쳐봤어. 분명히 하얗게 질려 있을 거라고, 어쩌면 화장실까지 미처 갈 틈도 없이 토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형은 구토를 참는 낌새가 아니었어. 아니, 심지어 하얗게 질려있지도 않았어.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뱀 껍질을 집어 입에 넣더니 질겅질겅 씹어 삼키는 거야. 그렇게 내리 몇 젓가락 집어 먹더니, 보기보다 먹을 만 하다는 말까지 덧붙였어.

7

“요즘은 뱀 잡기가 수월치 않아요. 좀처럼 눈에 띄지를 않네요. 권 사장님 부탁이라 제가 특별히 신경 쓴 겁니다.”

윤 사장은 뱀으로 보신한 체력을 말하는 데 몽땅 쓰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았어. 그런데 정작 본인은 뱀을 잘 안 먹는다더군.

“젊어서부터 산을 탔기 때문에 건강 하나는 자신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도 다 한때네요. 세월은 못 당해요. 관절마다 곯았으니. 게다가 요즘은 산 탈 때마다 자꾸 아랫배에 당기는 느낌이 들어요. 만져보면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아프면 병원에 가보겠건만,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그런데 또 예전만큼 민첩하게 움직이기에는 벅차네요.”

아버지가 식어 빠진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어. 아버지는 금연 이후 녹차를 입에 달고 살았어. 하고 많은 것들 중 녹차를 고른 건, 아마 ‘의사 애비’가 마시기에 적당히 우아하고 건강한 음료라고 판단한 결과일 테지.

“연배에 비해 젊어 보이셔서, 몸이 그리 안 좋으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거 괜히 우리 닥터 권 때문에 무리하신 거나 아닌지.”

윤 사장이 손사래를 쳤어.

“아닙니다, 그게 제 직업인데요. 몸 아픈 거야 나이 탓이지, 어떻게 권 사장님 아드님 탓이겠습니까.”

아버지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딴생각을 하는 눈치더군. 그러다가 불현듯 형을 찾았어.

“권 박사, 잠깐 이리 와 보시게나. 아, 공부를 하고 있으면 못 들을 수도 있겠군. 형욱아, 가서 형 좀 불러 와라.”

형 방에 들어가 보았어. 형은 시집을 읽고 있었어.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내가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듣지 못했어.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높였지.

“형, 아버지가 잠깐 나오래!”

형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아, 단음절의 대답을 신음처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어.

아버지는 형을 보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 그리고 좀 전에 윤 사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전했어. 윤 사장의 상태를 윤 사장 본인보다 더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더니, 형의 의학적인 견해를 구했지.

“글쎄요. 병원엘 가보시는 게 좋겠네요.”

형의 목소리는 다소 시큰둥했어. 아버지가 다시 물었어.

“자네 보기엔 병원에 가는 게 옳겠는가? 뭐가 문젠 거 같아, 권 박사?”

“몸이 불편하시면 병원에 가보시는 게 당연한 겁니다. 병원에 가보세요.”

이번에는 형의 대답에 짜증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어.

“야!”

약간의 침묵 끝에 아버지가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어. 올 게 왔구나 싶었지.

“저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윤 사장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어. 밤 11시가 다 된 시간에 약속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아무도 윤 사장을 만류하지 않았어. 만류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

“너 대체 왜 그 모양이냐. 진짜 모르더라도 애비 체면을 봐서 적당히 둘러 댈 수 있는 거잖아. 하다못해 변비라고 둘러댈 재간도 없냐. 의사 될 놈이라고 공부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야. 환자를 친절하게 대할 줄도 알아야지!”

아버지는 찻잔에 남아있던 녹차가 테이블 위에 쏟아지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테이블을 땅땅 두들겨 대면서 형을 나무랐어. 그 앞에서 형은 너무나 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 손가락으로는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형이 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아버지는 거실에 남아 밤늦도록 홀로 앉아 있었어.

새벽녘.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형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이더군. 문을 닫아 줄까 싶어 다가갔는데, 어스름 속에서 누군가 침대 머리맡에 서있는 게 보였어. 아버지였어. 아버지는 잠든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어. 형 쪽으로 투박한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가 도로 거두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형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어.

 

8

형의 노트

 

마틴 셀리그먼 박사는 커다란 우리를 준비했다. 우리는 한가운데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 다음 우리의 한쪽에는 두어 마리의 굶주린 개를 집어넣고, 다른 한쪽에는 먹이를 집어넣었다. 개들은 먹이를 보고 달려들었다가 유리벽에 부딪혀서 뒤로 물러났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였지만, 그때마다 유리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개들은 먹이에게 접근하기를 멈추고, 원래 있던 쪽에 머물러 앉아 있었다.

셀리그먼 박사가 우리로 다가가 유리벽을 제거했다. 벽이 사라졌는데도 개들은 먹이가 있는 쪽에 접근하지 않았다. 굶주린 채로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Learned helplessness 실험의 일부.)

 

9

해가 많이 짧아졌어. 저녁 6시만 되면 하늘은 먹물에 푹 담갔다 꺼낸 광목천이 되어 도시의 이마를 내리덮었어.

윤 사장이 다녀간 후, 형은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 같았어. 어느 순간부터 공기도 흐르기를 멈추고 시간마저 정지해 버린 것 같았어. 형은 새벽같이 나갔다가 늦은 밤에 귀가해서는 자기 방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큰 소리 내는 법 없이 TV 앞에 앉아 저녁 뉴스만 잠깐 시청한 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지. 아버지는 계속 형의 기분만 살피고 있는 눈치였어.

시간이 멈춘 자리에는 묘한 긴장감만...

우리는 모두 지쳐가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아직 해도 떨어지기 전인데 형이 집에 들어왔어. 형은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대신 거실에 나와 앉았어.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잠시 뒤적이더니 이내 소파에 길게 누워 TV를 봤어. 시끄럽고 유치한 코미디 프로를 틀어놓고 큰 소리로 웃기까지 했어. 마치 매일 그래왔다는 듯이 TV를 보며 웃고 있는 형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어. 난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어. 그래, 이 사람은 착하디착한 우리 형이야. 가족을 위해 집안 분위기를 쇄신시키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뿐이야.

 

형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가 잔칫상 차리듯 저녁을 준비했어. 손이 많이 가는 튀김, 생선구이, 갈비찜, 잡채. 달랑 세 식구가 모여 앉아 먹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였지. 너무 거창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니 오히려 입 안에 쓴맛이 맴돌았지만,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를 생각하면 걸신들린 거지 흉내라도 내야 할 것 같았어. 형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갈비찜을 꾸역꾸역 먹어대더군. 배가 터질 것처럼 불러올 때 쯤,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열었어.

“병원은 어디에서 개업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번화가여야겠지?”

이게 무슨 소리야. 형은 입을 헤 벌리고 멍청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봤어. 입 안에 들어있던 고기 한 점이 낙하하려는 찰나, 형이 얼른 고기를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며 대답했어.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뭘 어디서 어쩐다구요?”

아버지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어. 지금도 수입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사업을 더 확장할 계획을 하고 있었어. 지금보다 더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돈으로 빌딩을 한 채 사서, 형이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개인병원을 열게 해주겠다는 거였지. 아버지는 의사 아들의 등에 업혀 당신만의 왕국을 이루려는 꿈에 빠져 있었어. 장황한 그 얘기의 요점만 추려 보면, 이래. 서울 번화가에 4층짜리 건물을 산다. 1층은 접수처 및 진료실, 수술실 등으로 이용하고, 2층은 환자 휴게실 및 입원실로 사용한다. 3층은 형이 결혼한 후 큰 아들 내외의 살림집으로 쓰고, 4층은 아버지가 노년을 보낼 살림집으로 쓴다. 이게 아버지의 계획이었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진행이 빠른 아버지의 계획표에 우리 형제는 얼이 빠져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유쾌하게 웃어 젖혔어.

“권 박사 병원 개업하면 이 애비가 지금 하는 일은 그만 둘 생각인데 말이야. 이 애비 소일거리 삼아 병원에 자리 하나 내주시는 게 어떻겠는가. 듣자 하니 원무과장이라든가 하는 자리가 있다던데. 나이든 애비가 방바닥이나 차지하고서 TV 지킴이 신세로 사느니, 사무실 하나 번듯하게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겠나?”

형이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그 한숨의 의미는, 지금 아버지가 늘어놓는 얘기는 너무 거창할 뿐 아니라 시기상조다, 라는 것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어.

“웬 한숨이야. 애비한테 조금도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권 박사. 유능한 의사 아들 두는 게 내 평생의 소원 아닌가. 그렇게만 되면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테지. 그런 아들에게 건물 하나쯤 마련해 주는 게 대수겠어. 아무 걱정 말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게.”

묵묵부답, 유구무언, 요지부동. 잠시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어. 아버지와 내가 얼떨떨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자기 방으로 가더니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났어. 한 장의 종이였어. 그 종이를 식탁 위 아버지 앞에 내려놓더군.

종이를 내려놓는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어. 그러더니 의자가 아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어. 아버지는, 오래전 언젠가 그랬듯이, 찬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형이 내놓은 종이를 집어 들었어. F F F F F F.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F 뿐. 그 중에도 A가 있기는 있었어. 딱 하나 뿐이었지만. 그 옆에 국 문 학 개 론 이라는 다섯 글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어.

“아버지. 저는 의사가 될 수 없습니다.”

혼란에 빠져 입을 반쯤 헤 벌린 아버지의 시선이 종이 위에서 형의 얼굴 위로 옮겨갔어.

“저는 시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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