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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 [오징어 게임의 배우 양미선 이야기] 7. 아버지의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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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미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4-06 07:12 조회8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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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출연으로 밴쿠버 중앙일보와 인터뷰로 인연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연기 이야기 중심으로 연재 기회가 주어져 좋은 인연으로 생각되었다. 혹시 연극영화과 진학이나 연기 관련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들과 소통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재를 이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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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언젠가 내가 희곡이나, 시나리오 또는 에세이로서 글을 쓰게 된다면 꼭 첫 번째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우리 부모님 이야기다. 에세이 연재를 총 12회 계획하고 시작했는데, 어느덧 벌써 중반에 접어들었다. 감개무량하다. 그래서 7, 8회차는 나에게 제일 소중한 두 분, 내가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 두 분의 이야기로 이어 나가려 한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타고난 기질과 외형적인 측면, 내적 성향 그리고 연기하면서 느끼고 꺼내 보이는 모든 감성이나 정서들은 다 그곳으로부터 이어지고 시작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때론 삶의 무게가 참 버거울 때가 있다. 사소함으로 시작되어 암흑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그럴 때 내가 다시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늘 나의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오직 자식만이 인생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나의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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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업주부였고, 아버지는 우리 5남매를 키우기 위해 농협 창고에 딸린 작은 공간을 빌려 이발소를 운영하셨는데, 어느 날 나이 들어 내가 아버지께 “아빠, 이발소 하신 지 한 30년 정도 넘었나?” 라고 여쭈었더니, “30년은 무슨, 아마 60년은 넘었지?” 하며 껄껄 웃으셨다. 순간 내 머릿속은 잠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한 참 뒤에야 깨달았다. 60년...그래, 우리 아버지가 60년 넘도록 가위질을 하셨구나......마음이 저렸다. 아버지도 꿈 많던 어린 시절 그리고 청춘의 시절이 있었을텐데...아버지의 세상은 이 작은 이발소에 멈춰있었다는 것!! 마음이 참 아팠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면 늘 마음이 아프다. 두 분 다 어릴 적 부모를 잃어 부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으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얼굴을 전혀 모르신다. 어머니가 너무 어릴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탓에 기억할 수도 없고, 외할아버지나 다른 친척을 통해서도 외할머니의 사진을 단 한 장도 전해 받지 못했기에 외할머니의 얼굴을 평생 모르고 사셨다. 엄마가 보고 싶어도 얼굴을 기억할 수 없어 상상할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으리라. 아버지 역시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모두 아버지 어릴 적 다 돌아가셔서 어렴풋이 떠오를 뿐, 얼굴을 제대로 모르신다. 생각은 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그나마 친할머니의 사진이 한 장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발소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이발소를 운영하던 큰아버지들 밑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었는데, 아버지는 그 일이 너무 싫었지만 어렸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영화감독이 이발소 손님으로 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감독이 아버지를 보시고선 영화배우를 시켰으면 좋겠다 해서 데려가고 싶어 했단다. 물론 아버지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큰아버지들께서 안 된다고... 이발소에서 일해야 되니 절대로 안 된다고 못 가게 하셨다 한다. 한 번은 복싱이 하고 싶어서 복싱을 배우러 갔다가 큰아버지들께 들켰는데, 이발소에서 일하는 놈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권투는 무슨 권투냐며 엄청 때리셨다고......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세상은 작은 이발소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버지 곁에 할머님 할아버님이 계셨다면 우리 아버지도 다른 세상을 꿈꿀 최소한의 자유는 있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에 또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의 이발소는 파란색의 작은 미닫이문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 학교가 끝나면 나는 신나는 발걸음으로 이발소로 뛰어갔다. 그리고선 유리문 밖으로 아버지가 계시는지 가만히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밝게 웃으며 가게 안에 손님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냅다 소리쳤다. “학교다녀왔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손님 머리를 깎다가도 잠시 가위질을 멈추고선 참 기분 좋게 “아이구 우리 막뚱씨 왔어요~!!” 하며 인사해주셨다. 추운 겨울이면 아버지의 작은 이발소 안은 연탄난로의 열기로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버지는 연탄난로 앞에 앉아 무릎 위에 나를 앉혀두고선 따뜻하게 데워진 아버지의 손을 내 양쪽 귀에 가만히 올려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내 귀는 아버지의 따뜻한 양손에 온기를 되찾으며 간질거렸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난로 앞에서 창밖으로 저무는 하루를 행복하게 바라보곤 했다. 아버지가 참 좋아했던 노래 [섬집아기]와 자주 부르던 [메기의 추억][과수원길][꽃밭에서] 그리고 [개똥벌레] 같은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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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나 역시 [섬집아기]를 참 좋아하는데,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생각에 잠긴다. 아버지께[섬집아기]는 어떤 의미일까...아버지가 늘 그리워하시는, 어렴풋이 떠 오를 뿐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할머님에 대한 그리고 할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을까...그 답답한 그리움을 어떻게 감당하면서 살아오셨을까...하는 생각.

 

내가 지금 나이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처럼, 외형만 늙어갈 뿐 아버지 역시 마음만은 어린 시절 사랑이 필요했던 그 아이의 마음 그대로 남아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작은 이발소에서 나의 아버지는, 한 여인의 남편으로, 우리 5남매의 아버지로 치열하게 살았으리라. 그래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꿈도, 할머님 할아버님을 향한 답답하게 사무치는 그 그리움도 하나씩 하나씩 모르는 척 지워가시면서 살았으리라.

 

아직도 여전히 아버지는 이발소를 운영하고 계신다. 물론 임대하여 사용하던 과거의 파란 문 이발소는 아니지만 말이다. 60년 넘는 가위질의 결과물로 수전증이 심하신 우리 아버지. 이제는 손을 놓고 쉬시는 것이 좋겠다 하여도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그래도 오던 손님들은 계속 오는데 할 수 있을 때 까지는 해야지...”

 

 

758783364_EtQ5yhHz_8344753d0be70b0b9450c8666a22db2d5a1c3bab.jpg배우 양미선 (인스타@yangmiseon_claire)

일러스트 이재빈 (인스타@woq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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