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 산책] 묵향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LIFE

문학 | [문학가 산책] 묵향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윤영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29 08:56 조회830회 댓글0건

본문

758783364_0azkQFNI_353767c5efa15e8ca10ff000c330d8d64e1e0a4f.jpeg

윤영인 (시인, 캐나다 한인문학가협회 회원)  


코끝에 진한 향이 먹을 쥔 손을 놓게 한다 
오랜 시간 힘을 빼고 가볍게 슬슬 갈아 놓은 먹물 
벼루에 담겨 짙은 먹빛 광택을 낸다 
 
맑은소리 나는 돌 정과 망치로 쳐내며 
사포 같은 모래로 갈아 물 고이는 연지 만들고 
송연묵 갈면서 그 촉감 묵향에 젖는다 
 
닥나무껍질 찌고 벗겨서 삶고 두드리고 물에 풀어 
노란 접시꽃 손가락 사이사이로 물고기 떼처럼  
한올 한올 살아 움직이며 발 위에서 첫물 뜨고  
좌우로 떠 살을 채우면 조금 더 질긴 한지가 
 
강산이 네 번 가고도 오래되어 꾸깃해진  
색이 바랜 화선지를 버릴 수가 없어 고맙게 쓴다 
지금 종이와는 다른 얇고 번지지만 맛이 있다 
 
하얀 화선지 길이로 펴고 문진으로 한 곳 눌러 
붓끝에 농묵 기운 가득 붓대를 쥐고 한 획 긋다가 
가늘게 흘려 연결해 살며시 길게 천천히 놓아준다 
서체에 따라 숨결에 따라 마무리도 다른 빛을 낸다 
 
꽃봉오리 맺으랴 세찬 바람 견디랴 
낮추고 낮추며 그 생명 이어갈 때 
연기 속에 그을음은 검은색 회색 청색을 띠며 
매끄럽게 발묵 되고 여백까지 묵향 스며 발화된다  
 
칡 줄기로 만든 갈필 긴 것 짧은 털 섞음질  
부드러운 털의 붓 뻣뻣하지만 강하며 탄력 있는 
네발 달린 그들을 감싸줬던 교감하며 감촉이 손끝에  
 
날카롭게 이어지는 획 한 생각 놓치면 어디로 
다시 들어 곧게 가다가 휘어지고 작게 멈추다 
회오리치듯 급해진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붓끝을 모아 숨 고르고 지필묵연이 만들어지듯 
흙 속에서 숨죽이며 견디고 있다 이제 나오는 봄  
 
흰 화선지에 거침없이 스미듯 봄의 넓은 길 앞에   
진달래 해당화 영산홍 목련 복수초 들꽃 야생화  
잔잔한 물망초 패랭이 찔레꽃 이름이 먼저인 개나리  
 
붓에 머금은 먹물이 화선지에 내려 한 획을 그을 때 
숨 쉬는 종이에 퍼져 뜻을 알린다 
   
멈춤 없이 순간을 흐르는 피기도 하고 이미 져버린 
이제 막 지려 하다가 기대하지 않은 새순 빼꼼히 
 
갈 줄 알면서도 깊은 향 뿌리며 온 새봄이  
잠시라도 우리의 눈을 흐드러지게 만들 테니까
소나무 향 먹물이 화선지 위에서 만개하듯이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5,757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