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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시간] 불완전한 문장으로 나누는 비효율적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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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11-01 23:07 조회1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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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선생님은 마음을 사로잡은 글쓰기에 대해 말을 꺼냈다. 은퇴 후부터 시작했는데, 열심히 쓴 지는 두 해 정도 되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꿈틀대는 것은 알았지만 이민 와서 먹고사느라 못 본 체했던 글과 화해했다. 글을 읽고 쓰며 경험과 사유를 복기하고 펼쳐 보인 행위가 어느덧 노년에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글을 쓰는 일이 힘에 부칠 때도 있다. 젊은 시절 어디 갔다가 이제 왔냐고 글에게 혼나는 느낌이라는 말에 애틋함이 담겨있다. 매일 글과 사귀며 산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성스럽게 글을 써서 보여준다. 돋보기를 쓰고 꾹꾹 눌러썼을 모습이 모니터 화면으로도 보여 매번 뭉클했는데, 오늘에서야 핸드폰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써내려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머리카락 희끗한 그가 한나 선생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를 때마다 내가 써온 글과 시간을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져 매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밴쿠버에서 한국어 글쓰기라니 이 역설이 우리의 간절함을 말해준다. 양 선생님을 만난 한국문인협회, 이곳에서는 ‘수필 쓰는 김한나’를 가장 인정해 주는 곳이다. 모국어로 쓰는 일의 가치를 알고, 서로의 글을 나눠 읽으며 글정을 나눈다. 수필가는 사상가라며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고 조언해 주는 어른들이 있다. 수필이 쉬워 보이지만 어느 장르보다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글이라고도 충고한다. 소설처럼 허구에 숨지 않고 시적 허용에 의미를 함축하거나 변형하지 않는 수필은 정직하게 짓는 집이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만나 산문 합평회를 한다. 40대부터 80대까지 글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선후배들이 써온 글을 읽고 다정하고도 예리한 의견을 나눈다. 문학도로 뻗은 뿌리를 캐나다에 옮겨 심어 멈추지 않고 글을 쓰는 이, 은퇴 후 일상에 비집고 들어온 글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이, 모국어로 글을 쓰며 흐릿해지지 않고 또렷한 나로 살아가는 이. 나는 먼저 글을 쓰며 이민자로 살아온 선배 문인들이 있어 안도한다. 


어른들 글에서 동년배인 내 부모를 만날 때면 더욱 마음이 일렁인다. 어떤 희망으로 이 땅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차마 묻지 못했던 당신들의 마음이 선배들의 글에 스며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담은 글에서는 활자로 표현된 적 없는 아빠의 마음이 읽힌다. 색은 바랬지만 깊은 빛이 새어나는 아빠의 시간을 헤아려본다. 이웃들과 정성스러운 음식을 나눈 글에는 엄마의 솜씨와 인심이 묻어난다. 맛깔난 표현과 정갈한 문장은 엄마의 식탁과 닮았다. 우리 엄마도 글을 썼다면 이런 글이었을까. 아빠의 시간, 엄마의 냄새가 나는 글로 우리는 가족이 된다. 


내가 어른들의 삶을 정독할 때 당신들은 나의 글로 젊은 시절을 소환한다. 우리가 다른 시간대에 같은 길을 걸었던 지점을 발견하면 함께 환호한다. 글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때 삶을 제대로 탐험하는 듯하다. 이따금 나는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는 잘못된 곳에 있는 게 아닌지 궁금했다. 어긋난 마음과 성과없는 꿈에 움치리다가도 독자가 있는 글을 쓸 때 생기를 찾는다. 


캐나다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일이 비효율적인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관계를 맺고 마음을 나누는 이 일이 번거롭더라도 우리는 비효율적인 사랑을 선택했다. 완벽한 답보다 불완전한 서로의 문장을 아낀다. 투명한 단어를 모아 집을 짓고 나면 오늘처럼 놀러와 내 글을 읽어주는 글벗들이 있어서 또 하나의 글이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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