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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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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in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3-14 11:28 조회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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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뒤채고 있다. 낮에는 무심한 듯 천연스럽던 강물이 밤이 되자 제법 일렁이며 흐른다. 다 큰 남자의 등줄기 같이 울룩불룩한 근육질을 들썩거리며 속 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도 같다. 강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건 무엇일까. 아픔이나 그리움, 작은 기억마저 증폭시키는 밤의 신묘한 마성 때문일까. 


  나는 지금 양화나루 선착장에 와 있다. 말이 선착장이지 강물 위에 떠 있는 배 모양의 휴게소다. 배 안쪽으로 '아리수'라 하는, 예쁜 이름의 한식집이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이층에도 뭔가 하는 양식당이 있다. 여름날 저녁이면 나는 가끔 이 곳에 온다. 커피 맛이 그런 대로 괜찮은 데다 내가 좋아하는 한강을 바라보며 강바람을 마구마구 쏘이는 게 좋다.


  가로등 그림자가 줄줄이 얼비쳐진 강 저편 도로 쪽으로 자동차의 불빛이 뱀처럼 이어진다. 강물도 불빛도 무심하게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은 누구의 의지일까. 검푸른 물살을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내게 묻던 말이 생각난다. 푸른 비단이 나부끼듯 부드럽게 굽이치고 있는 강물을 저만치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강과 바다 중 어느 쪽이 더 좋아?"
"강이요,"
"왜?"
"강은 지향점이 있으니까"

  냉큼 대답을 하긴 했지만, 강이 꼭 바다를 그리며 흘러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역사가 맹목이듯, 강물 또한 자연의 법칙에 따를 뿐, 지향점 따위는 없는 건지 모른다. 그냥 끝까지 내달려보는 것, 내친 김에 갈 데까지 가보는 것, 그저 그뿐이 아닐까. 삶이 그러하듯이.


  가끔, 고인 물 같은 내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때가 있다. 비껴나는 새 그림자와 스쳐 지나는 구름 따위밖에 비쳐내지 못하는 갇힌 물, 그 테두리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흘러가는 물이 고여 있는 물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더 먼바다를,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싶다. 폭포를 지나고 여울목을 만나 요동치며 흐르고 싶다. 바윗돌을 돌고 장애물을 넘으며 신나게 떠내려가고 싶다. 흐른다는 것은 살아 움직인다는 뜻 아닌가.


  모터보트 한 대가 선착장 한 귀퉁이에 비끌어 매어 있다. 거친 포말을 일으키며 강을 가르던 그 놈은 낮 동안의 열정을 아직도 식히지 못하였는지 모선에 연신 몸뚱이를 부딪는다. 애써 본능을 잠재우려 해도 강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살거림과 발 밑을 간지럽히는 잔물결의 부추김을 참아내기가 힘든 모양이다. 그렇듯 보채는 녀석 때문에 밧줄에 잇닿은 모선의 선미(船尾)는 생채기가 나고 멍이 들어 있을 것이다.


  흐르는 것은 흐르게 하고 떠나고 싶은 것은 떠나가게 하라.
  강이 그렇게 철벅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둠 속에서는 소리마저도 더 크게 살아나는가. 강물소리가 가슴으로 퍼져 온다. 무릇 동체(動體)란 움직여야 하는 법. 사람도, 차도, 배도, 너무 오래 세워두면 안 된다. 흐르는 물이어야 이끼가 끼지 않듯, 움직이는 것만이 녹슬지 않는다.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둔 배가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는 배보다 더 빨리 상한다 하지 않던가.


   아는 사람의 사무실에서 '물 흐르듯이' 라고 쓴 장방형의 액자를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앉아 있는 맞은 편 벽 중앙에 편액을 걸어둔 사무실 주인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이 물 흐르듯 사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즈음의 나는 묘하게도 '물 흐르듯이' 하는 그 말에서 유유함보다는 역동성을 느낀다. 휘돌고 섞이고, 부딪치고 부대끼며, 소리 내어 흐르는 게 물의 본성일 듯싶은 것이다. 


  상류의 발랄함과 하류의 완만함을 지나 강은 마침내 바다에 이를 것이다. 지친 제 몸을 풀어 제쳐 사방에서 모여든 동지들과 한 몸을 이루어 부풀어오를 것이다. 흐르려는 의지도, 지향점도 상실하고 이제껏 간직해 온 제 이름마저도 종국에는 잃고 말 것이다. 개울과 폭포와 호수의 기억을 양양한 개펄에 파묻으며, 시퍼런 짠물 속으로 자취 없이 침잠해 버릴 것이다. 흐르고 흘러가 강물이 만난 게 안식일지 평화일지, 또는 허무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강물의 끝에는 바다라는 새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도 바람은 불고 생명이 꿈틀대고 해가 뜨고 달이 진다. 흐르고 흐른 시간의 켜들은 도대체 어디에 고여 있는 것일까. 그 곳에도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이별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시간의 늪을 향하여 나 또한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간다.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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