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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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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05 08:22 조회9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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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간에 늦지 않게 공항에 가야 한다. 친구의 부탁으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를 픽업하러. 하얀 백지에 이름을 크게 인쇄해서 들고 있으면 된다고, 그러면 아이가 보고 찾아올 거라 한다. 마중을 하기에도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을 바래다 주기에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에 살다 보니 갈 일이 꽤 잦다. 집에서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나갔지만 다시 한번 스케줄을 알리는 스크린을 살펴본다. 정시 도착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대합실은 늘 부산스럽고 왁자지껄하다.

나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프린트해서 들고 서있는 사람이 꽤 여럿이다. 그들의 시선은 대부분 도착한 사람들이 빠져 나오는 문을 향해있다. 뚫어져라 그쪽만 바라보는 이도 있고 여럿이 함께 어울려 수다를 떨며 가끔 문 쪽을 힐끗 거리는 무리도 있고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공항만큼 다양한 모습들이 섞여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인종도 문화도 쓰는 언어도 족히 십여 가지는 될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 마음속 풍경이 궁금하다.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떨어져 사는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은 십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고 여행 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청년은 설렘과 흥분으로 가슴이 뛸 것이다. 또 오래 전의 나처럼 이곳에 뿌리 내리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맘씨 좋은 아저씨도 있을지 모른다.

띄엄띄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많아진다. 서울의 공기를 몸에 묻히고 걸어 나오는 이들도 눈에 띈다. 오랜 비행 끝에 여권에 도장을 찍고 방금 도착 마당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합실에 자리 잡은 얼굴들 사이를 분주히 살핀다. 문을 빠져 나온 사람들과 라운지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 왔을 때 의미 있는 누군가가 나와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올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출발 전에 통화로 바빠서 나가지 못한다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라운지를 벗어나 거리로 나설 때까지도 작은 희망을 달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끝내 아는 척 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름 표정 관리를 하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가지만 그 짧은 순간에 스며드는 쓸쓸함은 숨길 수 없다.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나이가 들었든 조금 젊은 사람이든, 그런 것들에 상관없이 결국 사람은 지독히 외롭고 연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라도,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고 하는 것이 귀찮고 성가신 사람조차도 낯선 곳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반갑게 손 잡아줄 누군가를 기대하게 될 것 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놀랐지?’ 하면서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인간에 신뢰가 부족한 사람이라도 말이다.
 
떠나기도, 돌아오기도 하고 출발지이기도, 도착지이기도 한 공항은 설렘과 기다림, 행복한 긴장과 약간의 두려움, 때로는 슬픔까지도, 온갖 감정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늘 소란스럽고 혼잡하지만 그 가운데 묘한 어울림이 있기도 한 곳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무심해지면 우리는 공항을 떠올린다. 그리고 떠날 생각을 한다.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공항에 간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중간중간 반성도 하고 다짐도 하면서, 내가 가는 길이 제대로 된 길인지 맘먹고 고민해 보기 위해 떠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에는 그런 요소들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은 영화에서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공항으로 나가 가장 빨리 탈수 있는 비행기를 타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쓰는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혼자여도 좋고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가 함께라면 그것도 괜찮고,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예기치 않게 마주치는 장면들은 더욱 반갑고 또 진하게 와 닿을 것만 같다. 잠시 영화 속의 주인공을 따라 해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다. 촘촘히 계획한 여행이든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든, 집을 나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편하기도 하고 다소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서 가끔이라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한다. 비행기가 떠 오르는 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옆자리에는 덩치 큰 사람이 앉아 있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담겨져 있던 곳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모양이나 빛깔의 그릇에 나를 담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늘 네모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오히려 동그라미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또 식어가던 마음이 다시 데워져 물먹은 잔디처럼 생기가 더해지고 그만큼 주위를 향해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떠나는 사람들 속에 끼어있고 싶다. 내가 가는 곳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라도, 훨씬 공기가 탁하고 불친절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도 별 문제 없다. 아니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 자주 가고 싶다. 

 신정효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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