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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 '갓' 하나에 2000만원? '모자의 왕국' 조선 갓의 비밀

중앙일보 기자 입력25-11-08 11:04 수정 25-11-0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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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면에 고운 명주 실을 한 올 한 올 입히고 옻칠을 더해 반투명의 격조 높은 멋을 선사하는 통영 진사립. 정춘모 입자장의 작품.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K모자 #갓킹덤 #APEC지드래곤

요즘 광화문 일대 고궁에는 한복을 차려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흥미로운 건 남성의 경우 대부분 ‘갓’을 썼다는 점이다. 2019년 최초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킹덤’으로 촉발된 갓에 대한 관심이 올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으로 이어지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조선 선비들의 필수품이었던 갓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난달 31일 지드래곤은 경주 라한셀렉트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 공연 무대에 올라 ‘드라마’ 등 3곡을 불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특히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36초 짜리 영상을 공유했는데, 총리는 게시물에 “말레이시아의 많은 K팝 팬들이 오늘 밤 지드래곤의 공연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적고 ‘#K팝영원히(#KpopForever)’라는 해시태그까지 붙여 화제가 됐다.


이날 지드래곤은 흰색으로 끝단을 마무리한 검정 수트에 검은 중절모를 썼는데 진주 장식 갓끈을 달아 눈길을 끌었다. 이를 지켜본 네티즌들은 “K컬처의 정체성이 전통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 의상”이라며 환호했고, 과거 MBC 예능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갓 쓰고 누가 힙합을 하냐?” 물었을 때 “저희가 하죠”라고 답한 지드래곤의 영상을 소환하기도 했다.

중절모에 진주 갓끈…K정체성 알린 GD
‘케데헌’의 ‘사자보이스’. [사진 넷플릭스]
‘케데헌’의 ‘사자보이스’. [사진 넷플릭스]

걸그룹 엔믹스 역시 최근 유튜브에 ‘SPINNIN’ ON IT’ 댄스 연습 영상을 선보이면서 멤버들 모두 ‘케데헌’의 사자보이스로 분해 검정 도포와 갓을 쓰고 등장하면서 8만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다.

“‘케데헌’에 나온 사자보이스를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죠.”(미국인 제이콥·조나단) “드라마 ‘폭군의 셰프’를 보면서 저 모자는 뭐지 궁금했어요.”(일본인 유타·히로마사) “한국 전통 옷을 입는 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모자까지 쓰고 싶었어요.”(이스라엘인 리키) 지난 2일 일요일 경복궁에서 만난 남성 외국인 관광객들의 갓을 쓴 소감이다.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바두산은 “MBC 드라마 ‘대장금’(2003년작)에서 인상적으로 봤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왔다는 6명의 친구들. 최기웅 기자
베트남에서 왔다는 6명의 친구들. 최기웅 기자

경복궁 근처에 위치한 한복 대여 업체 ‘삼삼오오’의 정윤규씨는 “몇 년 간 꾸준히 갓을 찾는 사람들은 있었는데 최근 ‘케데헌’이 뜨면서 갓을 빌리는 비중이 확실히 늘었다”고 했다. ‘봄은한복’의 황유경씨도 “‘케데헌’ 이후 외국인 고객들이 확실히 많아졌고, 한복을 입는 남자분들이 대부분 갓을 쓰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2019년 넷플릭스를 통해 ‘킹덤’이 소개된 직후 아마존닷컴에선 조선시대 모자들이 상품으로 등장했다. ‘한국 드라마 킹덤 모자-조선시대 전통 모자’라는 설명과 함께 옆에는 드라마 ‘킹덤’ 스틸도 첨부했다. 당시 갓의 가격은 49.99달러(5만원대). 외국인들 사이에서 “넷플릭스 킹덤은 좀비와 모자에 대한 드라마다” “모든 사람이 끝내주는 모자를 쓰고 있다” “넷플릭스 킹덤 정말 끝내주는데 최고는 좀비보다 모자” 등의 리뷰가 이어지면서 ‘킹덤’의 제목을 ‘갓킹덤’으로 바꿔 부르는가 하면, 신을 뜻하는 단어 ‘GOD’과 우리 갓이 같은 발음인 것을 이용한 ‘오 마이 갓’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실제로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개항기 때 기록을 보면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를 비롯한 외국인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모자의 나라’ ‘모자의 발명국’ ‘모자의 왕국’으로 부르며 극찬했다고 한다. 프랑스 화가 조세프 드 라 네지에르는 “모자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문을 해주어도 될 수준”이라며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중 갓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를 가졌고 흑립·초립·백립·칠사립 등 소재와 디자인,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한국의 갓은 무엇보다 가볍고도 무거운데 그 특징이 있다. 인류가 만든 모자 가운데 갓만큼 가장 가볍고 가장 엄숙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갓이 표현하는 의미는 실용성도 심미적인 장식성도 아닌 일종의 점잖음을 보여주는 도덕성이다. 갓 쓰고 망신당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것은 쓴 사람의 인격이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 하나의 기호이다. 남자의, 선비의, 양반의 시니피앙(signifiant·기표)으로써 사람 전체의 몸을 기호로 바꿔놓은 작용을 한다.” 2022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이 『우리 문화 박물지』에서 갓에 대해 쓴 글의 일부분이다. 그만큼 조선 선비들에게 갓은 단순히 패션 소품이 아니었다. 의관정제를 통해 품격을 완성했던 일종의 문화이자 정신이었다.

정춘모 국가무형유산 입자장. 아내는 양태장 이수자, 아들은 입자장 조교로 온 가족이 함께 통영갓의 맥을 잇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정춘모 국가무형유산 입자장. 아내는 양태장 이수자, 아들은 입자장 조교로 온 가족이 함께 통영갓의 맥을 잇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그런데 이 갓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51단계 이상의 공정이 필요하고, 5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갓을 제작하는 공정을 ‘갓일’이라고 하고, 크게 세 파트로 나뉘며 각 파트마다 숙련된 세 명의 장인이 담당한다. 갓대우(볼록하게 솟은 모자 부분)를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 대나무를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떠서 양태(차양형태의 둥근 부분)을 만드는 ‘양태장’, 그리고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는 ‘입자장’이다.

양태와 총모자 맞춰보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양태와 총모자 맞춰보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양태에 아교 칠하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양태에 아교 칠하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양태에 먹칠하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양태에 먹칠하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그중 입자장은 총모자와 양태를 모아 수백 번의 인두질, 아교칠, 먹칠, 옻칠을 반복하며 갓을 조립하고 완성시키는 장인이다. 입자장의 일을 간략히 정리하면 우선 총모자와 양태의 형태를 잡아주기 위해 대나무를 깎아 만든 철대를 두르고, 명주실이나 명주천을 입힌 다음, 인두로 지지고 아교를 칠해서 전체적으로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 이후 표면에 먹칠과 옻칠을 여러 번 해서 얇고 가볍지만 수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을 입힌다.

양태에 지밑과 철대의 크기 맞추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양태에 지밑과 철대의 크기 맞추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트집 잡기(인두로 지지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트집 잡기(인두로 지지기).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가장 중요한 것은 갓의 은은한 곡선미를 위해 인두로 양태의 트집을 잡는 일이다. 평평한 양태를 인두로 지지며 열을 가해 조금씩 휘게 하는 작업을 ‘트집 잡는다’고 하는데, 이때 관건은 적당한 온도다. 인두가 너무 뜨거우면 자칫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적게 휘어서 양태가 평면으로 뻗어도, 너무 많이 휘어서 오그라들어도 갓의 맵시는 망가진다. 그만큼 까다로운 작업이다. 조선시대에는 갓을 수선하면서 흠이 난 트집을 이용해 수선비를 비싸게 받기도 했는데, 별 일도 아닌 일에 조그마한 흠집을 잡아 불평할 때 쓰는 ‘트집 잡다’의 어원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만큼 입자장은 아교와 먹의 농도를 조절하고, 화로에서 적정한 온도로 인두를 달구고, 인두를 어떻게 잡았을 때 갓의 모양과 형태가 제대로 잡힐지 등을 모두 알아야 하는 중요한 역할로 오랜 시간 숙련된 솜씨와 탁월한 눈썰미가 필요하다.

이번 갓일 취재를 위해 만난 정춘모 선생은 국가무형유산 입자장 기능보유자로 현재 ‘통영갓’의 맥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 갓은 그 생산지에 따라 통영에서 제작된 것을 ‘통양’, 제주에서 생산된 것을 ‘제량’이라고 불렀다. 특히 갓의 최고 명산지로 유명했던 통영에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통제영 12공방이 있고, 그중 하나가 통영갓을 만드는 ‘입자방’이었다. 조선시대 말기만 해도 장날마다 갓이 500여 개씩 팔렸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갓 공방의 존재는 무색해졌고 갓 장인은 하나둘 사라졌다. 십대 때부터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 세 장인에게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은 정춘모 장인은 “우리 가족들이라도 명맥을 잇자”며 가족들에게 통영갓 만들기를 전수했다. 현재 정 장인의 아내 도국희씨는 양태장 이수자로, 아들 정한수씨는 입자장 조교로 일하고 있다.

장인 정춘모 “아내·아들과 통영갓 명맥”
정 장인은 “갓도 일반적인 흑립, 국상을 치를 때 쓰던 백립, 문신이나 무관들이 외국에 사신으로 나갈 때나 왕의 행차를 수행할 때 쓰던 붉은 색 주립이 있다”며 “최고는 통영 대(大) 진사립”이라고 했다. 지름 66㎝의 대(大)양태를 이용한 통영 대 진사립은 매우 얇은 죽사를 이용해 통영에서만 전해지는 기술로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든 양태를 사용한다. 갓 전체에 명주 천 대신 아주 고운 명주 실을 한 올 한 올 입혀서 만드는 것도 특징으로 반투명의 커다란 갓에서 나오는 검은 빛 광택은 선비들에게 격조 높은 화사함을 선사한다.

이렇게 만든 정 장인의 통영 대 진사립 작품은 1000만~2000만원대를 호가한다. 일반적인 통영갓도 수십~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데, 주요 고객은 판소리 장인들이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보유자 김일구 선생은 “무대에서 갓을 쓴다는 것은 예의를 갖춘 정장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며 “예전에는 갓을 쓰지 않고 맨 머리(상투만 튼)로 다니는 남자는 상놈으로 분류했다”고 했다.

요즘 고궁 주변이나 드라마 속 갓은 대부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몇 만원짜리 나일론 갓이다. 취재를 하며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만져보니 확실히 정성스럽게 만든 전통 갓의 고급스러움과 미감은 압도적이다. K컬처의 글로벌 확산을 마냥 좋아하기만 할 게 아니라, 전통 공예품의 가치와 미학을 제대로 아는 일에도 관심이 필요한 때다. 갓 만들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네이버 ‘국가유산진흥원의 무형유산 이야기-갓일’을 참조하시길.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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