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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 [월간중앙 인물탐구] 베트남 울린 박항서 리더십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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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작성일19-01-28 09:47 조회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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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4강 이어 스즈키컵 우승으로 주가 상승
촌놈 특유의 진정성과 겸손함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가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1월 8일 2019 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D조 1차전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응우옌 콩 푸엉의 두 번째 골에 환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박항서 매직’은 2018년 내내 한국과 베트남을 강타했다. 베트남 축구는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대회 준우승, 9월 아시안게임 4강에 이어 연말에는 ‘동남아 월드컵’ 이라고 불리는 스즈키컵 우승을 차지했다. 모두 박항서(60)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이뤄낸 성과다. 올해 1월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도 선전했다.
 
K리그에서 외면당한 늙다리 지도자가 이뤄낸 인생역전, 한-베트남 교류 활성화, 박 감독과 베트남 대표팀을 둘러싼 훈훈한 에피소드 등 뉴스가 쏟아졌다.
 
 
하지만 ‘인간 박항서’를 찬찬히 조명한 기사는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난 연말, 박 감독의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내려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장 힘든 시기에 머물며 권토중래를 모색하던 곳. 거기에는 박항서를 가장 잘 아는 형님과 동생들이 있었다. 그들과 1박2일을 보내며 ‘인간 박항서’의 조각들을 맞춰봤다.
 
 

 

 
‘산청 파워’ 신화가 되다

 

2018년 12월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승리, 우승을 차지한 베트남 선수들이 박항서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산청 파워 박항서 매직! 신화가 되다 동남아 월드컵(스즈키컵) 우승’

 
경남 산청군 산청읍내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박 감독 우승을 축하하는 현수막 옆에 산청으로 전지훈련 온 팀들을 환영하는 현수막도 함께 붙어있다.
 
산청읍내에서 북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생초면이 나온다. 박 감독의 고향이다. 정규 축구장 2면과 풋살(미니축구) 구장을 갖춘 생초도시공원축구장이 눈에 들어왔다. 산청에서 중학교를 다니며 축구 스타의 꿈을 키우는 산청 FC 선수들이 훈련에 열심이다. 운동장 옆에 ‘늘비 물고기마을’ 사무실과 수련관이 있다.
 

2014년 7월 2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상주 상무 대 FC 서울의 경기에 앞서 박항서 상주 감독과 최용수 서울 감독이 인사하고 있다.

생초면 어서리 경호강변에 자리잡은 물고기마을은 도-농교류를 위해 만든 영농법인으로 민물고기 잡기, 어죽 만들기, 래프팅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지금은 전지훈련 온 축구팀 선수들의 숙소와 식당, 지원 사무실로 쓰고 있다. 이곳의 책임자인 배영복 사무장은 박 감독과 ‘사실상 형제’ 사이다. 박 감독은 배씨를 “복아”라고 부르고, 배씨는 박 감독을 “박돌이 행님”이라 받는다.
 
수련관 202호에는 ‘박항서 감독 직무실’이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간이침대 옆에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제목이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다. 프로축구 K리그 상주 상무 시절 썼던 모자, 여행가방, 프로축구연맹에서 받은 ‘이달의 감독상’ 상패도 눈에 띄었다.
 
배 사무장은 “행님이 프로팀에서 잘려 백수로 지낼 때 묵었던 곳”이라며 “상주 상무를 두 차례나 우승으로 이끌고, 1부 리그에 올려놓고도 잘렸으니 배신감과 상심이 오죽했겠어 예. 그때 행님이 여기서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일어섰다 아임니꺼”라고 소개했다.
 
물고기마을 사무실에는 박 감독의 핵심 측근들이 모여 있었다. 박 감독을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사람들이다. 민병훈 선생은 홍명보·손흥민의 모교인 서울 동북고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박 감독의 초·중학교 시절 옆집에 살면서 트레이너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민 선생은 “항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승부욕이 너무너무 강했고, 공부도 참 잘했어요. 중학교 때 전교 3등 안에 들었다니까요”라고 자랑했다. 그는 “축구 하는 것도 이리 패스 주는 척하면서 저리 팍 차 주고, 요즘 말로 하면 축구 지능이라 하나? 센스가 진짜 좋았지요”라고 회고했다.
 
경남일보 취재부 국장인 원경복 씨가 말을 받았다. “행님 집안이 산청에서는 알아주는 명문가라요. 부친은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경찰에 몸담았고, 어머니가 진짜 여걸이라예. 명문 진주여고 1회 졸업생인데, 약국을 하면서 4남1녀를 전부 서울에 유학시켜서 다들 잘됐다 아입니꺼. 항서 행님은 막내이고 운동을 해서 어머니가 끔찍이 위했지요. 서울서 내려오면 몸에 좋다는 건 뭐든지 해 먹이고, 한약도 달여 먹이고….”
 
박 감독의 모친 백순정 여사는 올해 97세다. 노환에다 치매 증세로 산청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다. 원 국장은 “스즈키컵 결승전 때 TV를 같이 보면서 ‘어무이, 저기 누굽니꺼’ 하니까 한참 화면을 쳐다보다가 ‘항서네’ 하면서 씩 웃으시데요” 라고 말했다.
 
민 선생이 ‘박항서’에 대해 잘못 입력된 선입견을 지적했다. “항서 별명이 ‘밧데리’(배터리)고 워낙 열심히 뛰어서 ‘체력·근성만 좋은 선수’라고 생각들 하는데 전혀 아입니더. ‘컴퓨터 링커’ 조광래만큼 기술도 좋고 두뇌 회전도 빠르지예. 워낙 체력과 지구력이 좋고 상대를 갖다 부수는 스타일이라서 거칠게 보일 뿐이지.”
 
다음은 박항서를 ‘B급 지도자’라고 하는 데 대한 반론이다. “항서는 1978년 아시아 청소년선수권에서 북한을 꺾고 우승할 때 주장을 맡았고, 프로에서도 늘 주전이었어요. 고재욱(럭키금성), 김호(수원 삼성), 히딩크(2002 월드컵 대표팀) 등 당대 최고 감독들 밑에서 코치로 혹독한 단련을 받으면서 내공을 키웠지요.” “수원 삼성 코치 때는 휴일에도 방에서 유럽 축구만 보는 ‘숙소 귀신’ 김호 감독 눈치 보느라 외출·외박도 제대로 못 했고, 2002 월드컵 때는 히딩크한테 영어 못한다며 온갖 구박을 받았다”는 게 민 선생의 전언이다.
 
민 선생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아입니까. 버림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 참아내고. 축구인으로 스즈키컵 보니까 수(手)가 있더라고요. 결승 1차전 말레이시아 원정에서 1.5군 넣는 거 좀 보소. 베트남 총리가 와 있고 베트남 전 국민이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는데 보통 강심장이 그럴 수 있겠어요. 아껴놓은 선수(응우옌 안둑)가 결승 2차전에서 결승골 넣었잖아요”라며 박 감독의 배짱과 용병술을 칭찬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박 감독 생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물고기마을 사무실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닿는 곳이었다. 박 감독의 바로 위 형인 삼서 씨 가족이 사는데 대문은 열려 있지만 아무도 없었다. 일(一)자형에 방 세 개와 부엌 하나만 달랑 있는,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었다. 유니폼이든 축구공이든 박 감독을 기념할 만한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박항서 기 받자’ 전국에서 유망주 몰려들어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호흡을 맞췄던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코치.

배 사무장에게 “베트남 관광객들이 꽤 온다던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으면 실망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면서 대문 앞에서 사진 찍고 돌아갑니더. 뭔가 기념할 만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다시 물고기마을로 돌아와 생가 얘기를 꺼내자 모두 목소리를 높였다. 원 국장은 “2002 월드컵 4강 신화 때 난리가 났잖아요. 그때 이곳 운동장 이름을 박항서구장으로 바꾸자고 했는데 몇몇 사람이 반대했어요. 그러니까 항서 행님이 ‘됐다. 치아뿌라’ 해서 없던 일이 됐지요. 지금이야 누가 반대하겠어요. 생가 복원도 하고, 옆에 기념관도 만들고, 이곳 운동장도 박항서체육공원으로 바꾸려고 군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고 말했다.
 
박항서 신드롬은 지리산 자락 조용한 농촌에 놀라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배 사무장은 “주민들 표정에서 긍지가 느껴집니다. 축구팀 전지훈련과 대회가 활성화되면서 경기도 살아나고요. 동네 오뎅바와 치킨집, 목욕탕이 꽉 찹니다”라고 말했다. 새해 1월 산청으로 전지훈련 온 팀은 76개, 사람 수는 1400명에 이른다.
 
산청 FC 양병은 감독은 국제심판 출신이다. 그는 “감독님 뜨고 나서 전국에서 유망주들이 우리 클럽 들어오려고 문의 가 많이 옵니다. 오늘도 두 명이 전학 왔어요. 감독님은 한국에 들어오면 꼭 시간 내서 우리 애들 통닭도 사 주시고 합니다. 산청에 베트남 아이들 170명이 사는데 그 친구들한테는 박 감독님이 영웅이지요”라고 말했다.
 
양 감독은 “아이들 눈빛에서 ‘박항서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요. 전에는 프로 산하 유스팀과 붙으면 형편 없이 깨졌는데 요즘은 체격과 체력에서 좀 떨어질 뿐이지요. 우리 아이들 중 몇은 전국 최강인 포철중 선수 이상 가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어요”라고 했다.
 
 

 

 
우승하고도 번번이 쫓겨나

 

현역 시절의 박항서. 럭키금성 박항서가 포항제철 수비를 뚫고 발리슛을 하고 있다.

저녁을 먹으러 동의보감촌으로 이동했다. 산청은 예부터 몸에 좋은 약초가 많이 나는 고장이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동의보감촌은 한방자연휴양림·기체험장·한의학박물관·한옥스테이 등을 갖춘 종합한방테마파크다. 일행은 “박 감독 체력이 좋은 건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몸에 좋은 약초를 많이 먹어서 그렇지 않겠냐”고 했다. 배 사무장은 “행님은 개구쟁이면서도 의협심도 있었어요”라고 거들었다.
 
민 선생이 재미난 얘기를 들려줬다. “내가 고3 때 서울서 축구부 친구들이 내려와 이곳 여고생들과 단체 미팅을 했어요. 수박·참외를 통에 넣고 강변으로 가는데 중학생인 항서도 같이 가겠다며 졸졸 따라와요. ‘니가 올 데가 아이다’ 하고 쫓아보냈지요. 나중에 강물에 담가 둔 수박·참외 통에 가봤더니 거기 누가 똥을 싸 놨어요. 항서는 지금도 절대 지가 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허허허.” 
 
식당에 둘러앉아 소주잔이 돌자 또다시 박항서 스토리가 이어졌다. 그가 거쳐온 다양한 이력, 그 속에 깃든 짙은 그림자에 대한 회고였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스포트라이트는 23명 선수들과 히딩크 감독에게 쏟아졌다. 수석코치 박항서에게 갈 몫은 별로 없었다. 그해 9월 남북통일축구에서 감독 박항서를 제치고 히딩크가 벤치에 앉았다. 10월 부산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지자 대한축구협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잘랐다. K리그 포항 스틸러스에서는 후배인 최순호 감독을 보좌했다. 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서포터스의 퇴진 운동에 시달리던 때였다.
 
2005년 고향팀 경남 FC의 창단 감독이 된 박항서는 팀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동향 선배인 조광래 감독에게 밀려났다. 전남 드래곤즈 감독 때는 ‘이천수 항명 파동’이라는 험한 꼴을 보면서도 제자를 감쌌다.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힘든 군 팀인 상주 상무를 맡아 2부에서 1부로 승격시키고도 지휘봉을 넘겨야 했다.
 
백수가 된 박항서에게 2016년은 고뇌와 모색의 시기였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낚시터를 자주 찾았다. 배 사무장의 회고다. “행님에게 낚시는 생각을 집중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었지요. 잡은 고기도 다 풀어줬어요. 밤늦게 동네 선술집에서 소주 한잔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했지요.”
 
2017년 안상수 당시 창원시장이 박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원시청이 내셔널리그(3부 리그) 팀이라 박 감독의 명성엔 걸맞지 않겠지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편하게 팀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박 감독은 성심껏 팀을 지도해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에이전트인 이동준 대표를 만났고, 베트남행이라는 로또를 쥐게 된다.
 
태권도 선수 출신인 이 대표는 미래에셋증권에 입사해 일하면서 동남아 축구시장의 가능성을 봤다. 젊은 패기로 부닥치며 베트남·태국·홍콩 등에 인맥을 쌓은 이 대표는 베트남 축구협회가 국가대표 감독을 찾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일면식도 없는 감독님을 만나고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대표팀부터 프로 1·2·3부 리그까지 고루 경험한 이력, 최강이 아닌 팀을 조련해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낸 점 등을 잘 포장했고, 300대 1의 경쟁을 뚫을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아들뻘인 이 대표에게 지금도 경어를 쓴다.
 
일행은 이 대표의 능력과 겸손한 품성을 높이 평가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게 아름다운 윈-윈이 됐다고 했다. 양 감독은 “감독님은 워낙 다혈질이라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하다가 퇴장도 많이 당했어요. 지도자 하면서 쌓은 내공이 응축됐다. 베트남에서 폭발한 것 같아요. 감독님은 최고가 아니라 뭔가 부족한 선수들을 고쳐가면서 만들어 가잖아요. 선수들이 ‘이 감독을 따라가면 된다’는 믿음이 오니까 미친 듯이 뛰는 게 보이더라고요. 진심이 통한 거죠”라고 말했다.
 
 

 

 
힘들어 울면서도 마크맨은 안 놓친 악바리

 

박항서 감독의 고향인 경남 산청군 읍내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 / 사진:정영재

산청 아재들과 헤어져 서울로 올라왔다. 한문배 전 한양대 감독을 만났다. 그는 박 감독의 한양대 3년 선배이고, 럭키금성(현 FC 서울)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다. 한 감독은 “내가 4학년, 항서가 1학년 때 전국대회 8강에서 고려대와 붙었어요. 고대는 김강남·성남 쌍둥이를 앞세워 전국을 휩쓸던 때였죠. 항서한테 ‘너는 강남이만 맡아라’고 주문했는데, 항서가 힘들어서 울면서도 강남이를 놓치지 않았어요. 그날 우리가 이기고 우승까지 했지요”라며 “머리가 살짝 벗겨진 항서가 지칠 줄 모르고 뛰는 걸 보고 내가 ‘야, 너는 밧데리다 밧데리’ 라고 별명을 붙여줬어요”라며 웃었다.
 
한 감독은 “항서가 불뚝 성질이 있고 말이 좀 투박하잖아요. 만약 베트남 선수들이 한국말을 알아듣는다면 지금처럼 멋진 팀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라고 농담을 던진 뒤 “많은 시련을 거치면서 다듬어진 박 감독의 리더십이 베트남에서 빛나는 걸 보며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월간중앙은 지난해 1월, 하노이에서 박 감독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감독님을 B급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묻자 그는 “B급이잖아. 하하하”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나도 흙길만 걸은 건 아니죠. 화려하지 않지만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국내 프로 축구는 젊은 지도자를 선호하면서 내게 더 이상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죠. 그런 내게 기회를 준 베트남이 너무나 고마워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박항서는 B급인가? 맞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잘 삐친다. 세련된 화술도, 세상을 요리조리 헤쳐나갈 처세술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겐 촌놈의 뚝심과 진정성이 있다. 그에게 선 사람 냄새가 난다. 힘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래서 박항서는 ‘B급의 얼굴을 한 특 A급’이다.
 
 
- 정영재 스포츠 전문기자·스포츠경영학 박사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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