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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독거노인들만이 성도인 용인 산골 교회행사에 방문했다. 거꾸로 순서지를 들고 있는 주름진 손이 보인다. 글조차 배울 기회도 없었을, 그래서 오랜 세월 고된 노동으로 거칠어졌을 손, 살이 없이 검은 가죽만 남은 쭈글쭈글한 손에 내 시선이 멈칫한다. 그 손으로 없는 살림에 억척스레 길러 냈을 자식들로부터도 버려져 산골 독거 노인이 되어야 했던 그 삶이 처량하다. '인생의 끝', 죽어라 일해도 거둔 것이 없어 마음도 몸도 가난한 삶. 나는 그 삶을 연민하며 눈물짓는 후원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우리의 인생은 왜 …
승화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였다. 영어에 자신감도, 관심도 없어 보인다.동료교사 제프는 그 반에서 승화를 제일 부족한 학생으로 이야기한다. 승화는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전화를 하면 아버지가 투박하게 받으시는 것, 가끔을 꼬질꼬질하게 오는 것, 무엇보다도 엄마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는 것, 그렇게 마음 쓰이는 3학년 아가씨다. “선생님, 저 망했어요!” 며칠전 숙제 검사를 하는데 승화가 이야기한다. '왜 그러냐' 물으니,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는데 율동에서도 주…
어릴 적 엄마를 따라 ‘머리 하러’ 다녔던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화여대역은 빼놓지 않고 찾았다.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하지 못한 나에게 이화여대 주변은 신세계였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커다란 배낭에 책을 잔뜩 넣고 다니는 화장기 없는 캐나다 여대생들과는 다르게 화려한 옷차림을 한 한국의 여대생들을 보고 있자면 여긴 분명 다른 세상이었다. 멋스러운 디자인을 뽐내는 옷과 신발의 자태에 여자들은 현혹되었고, 자신에게 꼭 맞는 가장 아름다울 것을 찾기 위한 그녀들의 눈빛은 …
나는 할머니가 자꾸 신경 쓰였다. 가하 할머니는 매일 느지막이등교하신다. 가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도록 기다리시다가, 손자를 데리고 집에 가신다. 예전에는 학교 어딘가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 교실 바로 앞, 구멍 뚫린 우산꽂이 위에 불편하게 앉아 계신다. 여든쯤 되 보이는 노모를 밖에 둔다는 게 마음에 쓰였다. 할머님이 교실 앞에서 가하를 기다리기 시작한 그쯤부터, 나는 이 아이를 유심히 보았다. 가하 얼굴은 하얗게 질린듯한 색이다. 체구는 작지 않은데 얼굴색이 그런가 연약해 보인다. 동그란 하…
수화 통역사인 성범씨 부부를 따라 농인 바리스타 부부가 개업할 작은 카페를 방문했다. 일원동에 도착했을 때, 카페는 다음날 개업준비로 한창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성범씨는 자연스럽게 수어로 바리스타 부부와 대화한다. 수어를 모르는 나를 위해 성범씨는 입과 손으로 말하고, 수어를 말로 통역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려주었다. “우리가 캐나다에 갔을 때 함께 교회 다니던 분이에요.” 라며 나를 소개해주었을 때, 나는 수어로 ‘안녕하세요’ 정도는 배우고 갈 걸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들었다. 괜…
팔을 힘껏 내밀어 선을 긋는다. 너무 가까운 ‘거리’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나는 누구에게나 조금 떨어진 ‘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호기심 많고 표현이 직설적인 처음의 내 모습과 다른 그 ‘거리’로 인해 지금껏 쉽게 누군가를 떠나 보내기도, 누군가를 떠나기도 했다. 사실 종종 외로웠다. 하지만 이 '거리'가 있어야 안정감을 느꼈다. 차라리 외로움이 좋았다. 수년을 알고 지낸 사이로 ‘거리’를 인정해 주지만…
한국에 온 지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또 하나의 대형사고였다. 사실 나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한국은 내게 처음부터 그런 나라였으니까. 떠나기 전부터 다시 돌아와서까지 한국에서 대형사고는 흔했다. 1세대로부터 들었던 바로 비리와 비상식이 난무한다는 복잡한 나라, 아빠가 보는 한국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가끔 소식을 들었던, 그렇지만 몸으로 느껴본 적 없이 관념으로만 아는, 그런 한국에 살러 가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던 먼저 한국을 경험해 본 선배들이 있었다. 나는 언제든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면 되지 라는 …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아~ 진정 난 몰랐었네.” 어릴 적부터 아빠는 노래하는 자리에서 꼭 이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캐네디언 직원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도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아빠가 부르는 이 노래가 무슨 뜻이냐 묻는 직원들 때문에 그제야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나는 홀로 길 위에서면 종종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길 위에서면 나는 묻고…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것, 냉정한 관찰보다는 함께 하는 감성이 필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유언대로 1954년 예수를 믿고 고아원을 설립하셨다. 아빠가 네 살 되던 해였다.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고아처럼 살았다. 마음이 제일 착했던 셋째 아들 아빠에게 할아버지가 고아원을 맡기고 싶어 했을때, 아빠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결혼도 하기 전이었던 아빠는 미래의 당신 아이들을 고아들과 같이 키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삶이 어떤 모양인지 아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아빠의 …
2015년 정월 초하루는 너그럽게 눈 쌓인 덕유산을 오르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눈꽃 핀 산에서 새해 첫날을 걸으며 다짐하고 싶은 한 해였다, 하지만 전날 밤부터 찾아온 복통으로 인해 아쉽지만 산행을 포기했다. 2016년 새해가 되면 겨울 산에 함께 가자는 글벗의 권유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덕유산을 오르려 했던 계획이 무산된 첫날의 2015년부터 그 일년의 시간 전부가. 누구에게도 깊이 나눌 순 없었지만 2015년은 녹록하지 않았다. 과거의 희미해진 아팠던 날은 현재의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와 선명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