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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힘세설] 사임당 그녀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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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현섭 작성일17-04-07 13:41 조회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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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그녀의 정원

 

날씨가 풀리면 사임당을 만나러 가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날씨도 날씨지만 사실 「사임당평전」을 주문해서 읽고 있었기에 마저 읽고 난 뒤로 미루고 있었다. 새 사돈이 강릉 토박이가 되어서 만나러 갔던 길에 실로 오랜만에 오죽헌에 들렸다. 정문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있고, 기념관이고 박물관이며 사당까지 오죽헌을 둘러싸고 새로 지어져서 예전에 오붓하게 자리 잡고 있던 뒷마당에 오죽烏竹이 있던 오죽헌의 아늑함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입구에는 커다란 글씨로 모자가 다 화폐인물이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었다. 사임당과 율곡은 모두 오죽헌에서 태어나서 강릉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이 자랑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마침 서울미술관에서 “사임당, 그녀의 정원”이라는 특별전을 하고 있어 집을 나섰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창의문을 지났다. 창의문은 4소문 중에 하나로 한양도성이 축성될 당시인 1396년에 건립되어 오늘날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일명 자하문이 라고도 하는데 이 길에서 곧장 나가면 세검정을 거치게 된다. 창의문을 지나 언덕길을 내려가다 보면 왼편쪽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이 나온다. 정갈한 기와집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자리하고 뒤로는 푸른 장송이 이리저리 휘어져 감싸듯이 서있어 풍취를 돋아주고 있다. 앞으로는 계곡물이 바위 사이로 흘러 멀리 인왕산의 능선과 함께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 석파정과 함께 서울미술관이 한 울타리로 자리하고 있다. 가끔 특별전을 자주 하는 관계로 한국에 올 때마다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었던 미술관이다. 작은 규모의 3층 건물이지만 한국 미술을 대표할 만한 화가들의 특별전을 종종 여는 곳이다.

나를 제일 매료하는 조선의 여류문인은 황진이이다. 황진이가 장미라면 사임당은 국화이고 백합이다. 두 여인의 격은 양반과 기생으로 갈리는데 황진이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여인이라면 사임당은 다소곳이 바라보고 싶은 여인이다.

그리고 황진이는 시인이고 사임당은 화가라고 해야 옳다. 두 여인 모두 전문 시인이거나 전문 화가는 아니었다. 옛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겸하여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사임당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이율곡이 워낙 뛰어난 학자로 이퇴계와 함께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쌍벽을 이루다 보니 아들 잘 키운 어머니로서만 칭송을 받게 되어 그녀가 가지고 있는 화가로서의 독창적인 역량이 감추어진 점이 없지 않다. 조선에 여류명인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근세에 들어와 우리 역사 속에서 사임당을 두고 ‘현모양처’로서 추앙되다보니 사실 개인적인 삶은 숨겨졌던 게 사실이다. 현모양처는 오늘날도 여자의 일생에서 놓칠 수 없는 주요한 삶의 가치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다만 구세대의 가부장적 권위아래 오직 순종만이 미덕인 여인의 역할을 강조할 때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임당의 삶에서 현모양처로서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평가의 기준이 달라져 왔고 지금은 그녀가 7남매를 기르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또 시집살이를 하면서 결코 한가한 여락으로 했던 것이 아닌 그림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성취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히 그녀가 그린 그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이고 세밀하고 화려한 필치를 발휘한 초충도草蟲圖에 있다고 하겠다. 오죽헌 앞마당에 심어져 있었을 법한 맨드라미, 가지, 오이, 포도, 수박, 국화, 대나무, 매화와 함께 반드시 곤충이나 동물을 함께 그렸다는 점이다.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조선화단에 여인의 섬세한 필치로 꽃과 풀과 벌레들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조선의 그림은 세밀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특징이다. 단순화하고 여백을 많이 가지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었다. 세밀함은 초상화에서 수염이나 눈동자의 표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사임당은 48년의 생애동안에 약300여점의 그림을 남겼다. 모두가 사임당이 그렸다고 믿기에는 너무 많은 량이다. 특히 그림마다 낙관을 찍지 않고 화자의 흔적이 없는 것이 많고 다만 당대나 후대에 유명인들이 그림과 함께 글을 남긴 것이 증표가 되고 있다.

수암 권상하(1641-1721)의 발문에 의하면 “사임당 신씨 부인의 그림은 필력이 살아 움직이고 모양을 그린 것이 똑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마치 이슬을 띤 것 같고 풀벌레는 날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오이와 수박은 보다 말고 저도 몰래 입에 침이 흐르니 참으로 천하에 제일가는 보배다.”라고 칭송하였다.

사임당은 아버지 신명화(1474-1522)와 어머니 용인 이씨(1480-1569) 사이의 딸만 다섯인 가운데 둘째이다. 어머니는 무남독녀이고 사임당의 외할머니 최씨와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그리고 사임당까지 3대가 오죽헌에서 친정살이를 했다.

사임당師任堂은 이름이 아니라 당호堂號인데 중국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의 이름자에서 따온 것으로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당대에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았고, 조선의 여성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다수의 작품을 남긴 예술가였다. 시, 서, 화 모두에 능한 삼절로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예술성과 성품을 지녀 군자의 경지에 이른 여성이었다.

율곡은 그의 어머니를 <선비행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는 성품이 호탕하여 세간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는데 자당이 윗분을 공양하고 아랫사람을 길렀는데 모든 일을 맘대로 한 적이 없고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고하였다. 그리고 홍씨의 앞에서는 희첩姬妾(여종)도 꾸짖는 일이 없고 말씀은 언제나 따뜻하고 안색은 언제나 온화했다.

 

<선비행장> 율곡

19세에 덕수 이씨 이원수와 결혼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오죽헌 친정집에 머물렀다. 결국 62세의 늙은 어머니를 고향집에 홀로 남겨두고 대관령을 넘을 때 멀리 오죽헌(북촌)을 바라보며 애끓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늙으신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사임당이 38세 되던 해인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당시 여섯 살인 어린 율곡을 데리고 서울 시댁으로 가는 도중에 대관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이다.

아들 하나 없이 다섯 딸이 모두 출가하고 남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 홀로 남은 어머니를 고향땅에 두고 떠나는 사임당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고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붓을 놓지 않았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심 또한 여일하였다.

사임당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 평촌에서 태어나서, 명종 6년(1551년) 48세의 나이로 서울 삼청동 집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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