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바보 온달(? ~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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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3-09 06:53 조회9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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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온달 열전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평원강) 때 사람이다. 얼굴은 울퉁불퉁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아름다웠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다 떨어진 옷과 신발로 시정을 오가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농담 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공주가 16살이 되어 상부의 고 씨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중략) 왕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라.” 공주가 금팔찌 수십 개를 차고 궁궐을 나와서 홀로 걸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으로 갔다.』
고구려 제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은 평원왕 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양원왕의 큰아들로 태어나 왕 13년(557)에 태자가 되고, 이태 뒤인 559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대로 중국의 진, 수, 북제, 북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이어 오던 중국 북조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북주의 무제가 요동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평강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에서 싸웠고, 또 590년에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의 통일은 고구려에 정치적ㆍ군사적 부담을 바로 안겨 주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586년, 거란 발부 출복 등이 이탈하여 수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본디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돌궐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두 세력 사이의 긴장 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런 위기감은 남쪽으로도 마찬가지였다. 한강 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고구려는 일단 관망의 자세를 취했지만, 언제 불똥이 고구려 쪽으로 튈지 몰랐다.
이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온달(溫達)이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앞서 소개한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溫達傳)을 통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실로 이후 온달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기록은 이 전기로부터 빌리지 않음이 없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고, 먼저 그의 모습을 그렸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그런데 내우외환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평강왕에게 또 하나 골칫거리가 있었다. 어린 딸이 곧잘 우는 것이었다. 어찌나 울었던지 왕은 농담 삼아,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구나.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 될 거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지.”라고 하였다. 왕은 울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었다. 왕이 상부 고(高) 씨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지요.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요. 인제 와서 말씀을 바꾸시는 건 무슨 까닭이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농담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며 정색했다. 울어서 골칫거리더니 이제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는 것 같아 왕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한두 번 타이르면 될 줄 알았는데, 공주의 심지는 곧았다.
공주는 끝내 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보검(寶劒) 수십 자루’를 팔뚝에 걸고 나왔다고 썼다. 큰 차이는 없겠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어머니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하자,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니, 귀한 사람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구려. 반드시 천하의 귀한 사람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속으로 간 지 오래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요.”라고, 어머니는 황당해하며 말했다.
<삼국사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우리 아들은 지극히 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하며, 우리 집은 누추하므로 귀인이 살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는 대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찧을 수 있으면 오히려 족하고, 한 자의 베라도 꿰맬 수 있으면 오히려 족하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한마음 한뜻이라면 부귀를 누려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곧 금팔찌를 팔아서 땅, 주택, 노비, 소, 말, 기물을 사들여 살림살이를 완전히 마련하였다.』
공주는 온달을 직접 만나기로 하였다.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던 온달에게 썩 나서자,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터,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친다. 온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어머니 또한, “내 자식은 비천해서 귀한 사람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살 수 없다오.”라며, 어제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공주는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며 설득한다.
공주의 회유는 겨우 성공하였다. 그제야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갖추어졌다. 말을 살 때는 공주가 온달에게,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고르세요. 그 가운데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 오세요.”라고 했다. 온달은 이르는 대로 말을 사 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온달 또한 더불어 건장한 장수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시장 상인이 파는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기르던 말이었는데 병들고 수척하여 내다 파는 말을 골라 사 오세요” 라고 하니 온달이 그대로 말을 사 왔다. 공주가 부지런히 말을 기르자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중략)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서서 달리고, 또한 사냥한 짐승이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온달의 이름이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의 전쟁이었다. 첫째는 북주의 무제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이고, 둘째는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치러 갔을 때이다. 온달은 평강왕이 직접 나선 전쟁의 선봉장으로 나섰으며, 신라와의 싸움에는 자진해서 나갔었다. 그렇다면 온달은 어떻게 발탁되었는가.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을 바쳤다. 그날이 되자 왕은 사냥을 나갔다.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달리고, 또한 잡은 짐승도 많아서 남들이 따르지 못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물었다. 온달이었다. 울보 공주가 궁을 나가 함께 살고 있다는 그였다. 왕은 놀랍고 기이하게 여기며 발탁하였다.
온달에게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곧 왔다. 북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한 바로 그 싸움에서였다. 평강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가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온달이 활약한 첫 싸움이었다.
공적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영접하고 벼슬을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 졌다. 평원왕 19년(578) 11월의 일이었다.
590년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였다. 온달은 왕에게 아뢰었다. 역사서에 적힌 그의 두 번째 활약상이 여기서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최후를 알리는 슬픈 사건이기도 하였다. 신라가 한강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의 군현으로 만들자, 군사를 준다면 제 땅을 도로 찾겠다고 다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의 맹세는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단성 곧 지금의 아차산 밑이 온달에게는 마지막 자리였다. 거기서 온달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양강 왕(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잘라내어 자기들의 군현을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원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언제나 부모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사오니, 바라건대 대왕은 저더러 어리석다 마시고 군대를 내주시면 한번 나아가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허락하였다. 온달은 “나는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 땅을 우리 땅으로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떠났다. 그러나 온달은 결국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그를 장사 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이 났으니, 아!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애통해하였다.』
<삼국사기>
『이때 후주(북주)의 무제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쳐들어오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배산 들판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이 되어 적 수십 명을 베어 죽이니, 모든 군사는 이러한 이긴 틈을 타서 달려들어 힘써 적을 무찔러 크게 승리하였다. 전공을 의논할 때 온달을 제일로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곧 나의 사위다.” 하고, 마침내는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들이고 벼슬을 주어 대형을 삼았다. 이로부터 총애함이 더욱 두터워지고, 그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6세기 중엽, 고구려는 북주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때 큰 활약을 하여 왕의 사위로 공식 인정받은 사람이 바로 온달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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