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어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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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4-06 21:41 조회1,7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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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김홍도)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나혜석의 ‘이혼고백서’ 중에서>
<성종실록>에 따르면 어우동은 조선시대 성종 때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이다. 그녀의 이름은 어을우동(於乙宇同)으로 표기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어우동’이라고 읽고 있다. 박어우동(朴於宇同, 1430년(?)~1480년)은 조선 전기의 왕족의 아내이자, 시인, 서예가, 작가, 기생, 무희였다. 본래는 양반가 출신 여성으로 남편에게 이혼당한 후 기녀가 되었으며, 조선 성종 때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연루된 성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시와 서화에 능하여 시문과 작품을 남겼으나 문란한 여성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각되거나 파괴되었다.
<성종실록>
해가 가면서 어우동의 남성 편력은 더해갔고 어우동은 성문란 행태가 발각되어, 어우동의 연애 스캔들이 한성부내에 소문이 돌면서 진상을 요구하는 공론이 형성되었다. 김종직과 그가 이끄는 사림파 출신 사간원, 사헌부의 언관들과 훈구파에 의해 집중공격, 탄핵을 받고, 마침내 의금부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조사가 거듭될수록 조정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밖에 어우동의 집에 한번이라도 출입한 경력이 있는 선비와 성균관유생들, 부녀자들까지 모두 체포되어 의금부와 한성부, 형조 등에서 국문을 당했다. 사사로이 시문을 주고받고, 그의 가야금, 거문고, 그림 재주를 보고 출입했던 이들 조차 체포되어 간통범이라는 의심을 받고 지탄을 받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박강창, 홍찬 등이 어을우동을 간통하고도 굳이 숨기고서 자복하지 않고, 어을우동이 어유소(이조판서), 노공필(대사헌), 김세적(부호군), 김칭, 정숙지, 김휘, 지거비를 간통하고도 은휘하고서 승복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벌을 가하고, 어유소 등을 아울러 국문하소서.” 하니, 박강창, 홍찬, 어을우동 등은 형을 가하고,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은 아직 추문하지 말고, 김칭, 정숙지, 김휘는 먼저 추문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성종실록>
“유찬이 또 아뢰기를, “지거비의 주인 밀성군은 태강수와 당숙질 사이인데, 지거비가 협박하여 그 처인 어을우동을 간음하였으니, 죄악이 매우 중합니다. 그런데도 도형을 속바치도록 명하셨으니, 어떻게 악을 징계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실록>
어우동의 간통 상대로는 실록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만 17명이었다. 당시 간통죄에 의한 처벌은 대명률에 의거하여 곤장으로 70 ~ 100대를 치도록 되어있다. 물론 돈을 내면 곤장조차 맞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결국 성종(재위 1469∼1494)은 극형을 주장한 신하들의 편을 들어 아무리 종친이라 해도 일벌백계(一罰百戒)를 위해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여, 결국 어우동은 왕실의 종친이기도 한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하여, 이혼한 뒤였는데도 왕족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간통죄로 처형(교수형)되었다. 곤장형이 아닌 사형을 내린 것부터 엄청난 과잉처벌이었다.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대명률》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한 것’에 비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늦가을 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우동의 사형이 결정되던 성종 11년 10월 18일 마지막 논의에서 영의정 정창손은 ‘인주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好生]으로써 덕을 삼아 율 밖의 형벌을 써서는 안 된다’며 다시 한 번 사형불가를 주장했으나 도승지 김계창은 ‘종실의 처로서 종친과 간통하고, 또 지거비는 일찍이 종의 남편이었는데도 간통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며 사형을 주장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성종은 이렇게 정리했다.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 여자들이 음행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되는 바가 없을 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르게 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어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전(사형)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
“사신은, “김계창은 임금의 뜻을 헤아려 깨닫고 힘써 영합하기만 하였다. 소위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한다.’는 것이 어찌 율 밖의 형벌을 말함이겠는가? 감히 이 말을 속여서 인용하여 중전을 쓰도록 권하였으니, 이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기었다”라고 논평하였다“
박강창을 비롯한 17명의 남자들에게는 대부분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 심지어 관직이 있던 남자들의 경우 복직까지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우동 사건은 조선 조정을 수년 동안이나 들끓게 한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로 남았다.
‘어우동 사건’은 성종 11년(1480년) 6월 13일 방산수 이난의 간통사건으로 『실록』에 처음 등장한 후, “음행을 자행하여 풍속을 문란하게 한 부녀”를 율법에 의해 다스릴지 극형을 내릴지를 논한 내용이 16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조정 내에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열두 명의 대신 중 여덟 명이 극형을 반대하고 네 명이 찬성했음에도 성종의 강한 의지에 따라 어우동만 교형에 처해지고 사건과 관련된 남자들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으며 종결되었다. 이는 2년 후 폐비 윤씨가 실덕(失德)을 이유로 사사되는 사건과 함께, 성리학의 나라를 세우려는 성종대의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민간에까지 회자됨으로써 『용재총화(?齋叢話)』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에 실려 ‘어우동’이라는 이름이 대중에 각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우동은 추포된 후 3개월 만에 죽음으로 최후를 맞고, 마침내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서 이름이 삭제됐다. 정사품의 ‘혜인(惠人)’이라는 봉작을 버리고 스스로 지은 이름 ‘현비(玄非)’로 새 삶을 선택했던 그녀는 “누구의 딸도 아내도 어미도 아닌, 순정한 여성”으로 살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여인의 절박한 외침을 읽을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고개를 흔들 만큼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인물로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하는 어우동이지만, 그간의 시각을 극복하고 한 사람으로서 그녀가 살아낸 삶의 궤적을 추적해 보고자 했다. 신분과 지위로 포장되지 않은 인간의 맨얼굴의 어우동을 통해, 독자들은 사회적 한계가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1480년 어우동의 처형과 1482년 폐비 윤씨의 죽음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처형된 시점이 비슷하고, 두 사람을 처형시킨 인물은 모두 성종이었다. 15세기 후반 성종 시대는 성리학의 이념을 국가와 사회 곳곳에 전파시켜 나가려는 때였다. 이러한 시대에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왕실에서는 윤씨가, 민간에서는 어우동이 그 주인공이었다. 어우동과 폐비 윤씨는 성리학의 이념이 본격적으로 구현되면서 남성 중심 사회로 나아가는 15세기 조선 사회의 시대적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나혜석의 소설 ‘경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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