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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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8-17 22:56 조회2,3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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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 관계의 기본 방향
조선 시대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은 사대교린이다. 사대교린은 중국에 대해서는 성(誠. 지극정성)으로써 사대외교를, 일본과 여진은 신(信. 믿음)으로써 교린 외교를 펴나간다는 것이다.
당시 명은 정치, 군사 대국이었고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었다. 조선 왕조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의 종주국이었을 뿐 아니라 과학 기술을 비롯한 문화적 선진국이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는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대 외교는 명분 적으로 다소 굴욕적인 면을 감수하더라도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외교 정책이었다.
반면 일본, 여진, 류큐(오끼나와), 남만(동남아시아) 등에 대해서 교린 정책을 폈다.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가 조선의 적극적인 외교였다면 교린 정책은 소극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교린 정책은 왜구나 여진의 침입을 막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으며 외교와 통상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 대명 외교
『태조 7년 8월 임자, 대사헌 성석용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무신들에게 <진도(진지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익히도록 명령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절제사를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게을리 합니다. (줄임) 5품 이하 관원은 태형을 집행하여 뒷사람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개국공신, 왕실, 원종공신(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 칭호)들은 죄를 물을 수 없다. 대신 아래 사람들을 태형 50대씩 쳐라. 외방 여러 진의 절제사 가운데 <진도>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쳐라.”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날마다 임금을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급하게 <진도>를 익히게 한 것이다.』
<태조실록>
『세종 11년 12월 을유, 계품사 공녕군 인이 칙서를 받들고 북경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으로 나아가 칙서를 맞이하였다. 칙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표를 보고 모두 알았노라. 금 · 은이 본국에서 나지 않는다고 하니 지금부터 진헌하는 물품은 토산물로써 성의를 다하여라.”』
<세종실록>
200여 년간 계속된 대명 외교는 큰 충돌 없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태조 때 요동 정벌 추진 등으로 한때 대립하였지만 태종 때부터 관계가 호전되었다. 조선은 명에 대해 1년에 여러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고, 명도 사신을 보냈다. 대명 외교는 선진 문물 수입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적지 않은 문제점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해마다 바친 황금 150냥, 백은 700냥은 금, 은 산출이 많지 않는 조선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금, 은은 조선 왕조의 끈질긴 요구로 세종 때 말과 베로써 대신하게 되었다.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금·은 광산을 폐쇄하여 광산업 발달을 더디게 한 측면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명 외교는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 사신의 임무는?
정기 사행 | 비정기 사행 – 필요에 따라 수시로 파견 | ||
하정사 | 신년 인사 | 주문사 | 각종 보고, 해명할 일이 있을 때 |
계품사 | |||
성절사 | 황제 생일 | 주청사 | 특별한 요청을 하기 위한 사신 |
사은사 | 중국에 감사한 일이 있을 때 | ||
천추사 | 황태자 생일 | 진하사 | 황제 등극, 황태자 책봉 축하 |
진위사 | 황제, 황후의 상사에 조문 |
영은문 :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 대여진 관계
『(태조 4년 12월 계묘) 동북면은 처음으로 왕업을 일으킨 땅이다.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 추장들이 먼 데서 와서 태조를 섬겼다.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태조 집)에 들어와서 가까이 모시었다. 정벌을 나갈 때에는 어디나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다. (줄임) 임금이 된 뒤에 적당히 만호와 천호 벼슬을 주고 … , 짐승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를 익히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역과 부세를 편호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이들이 추장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하였다. 공주에서 북쪽으로 갑산에 이르기까지 읍을 설치하고 진을 두었다. 백성으로 여기고 군사로 훈련시켰으며 학교를 세워서 경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문무의 정치가 모두 잘 되어 천 리 땅이 다 우리 판도로 들어오게 되어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강 밖은 풍속이 달랐지만 구주에 이르기까지 풍문으로 듣고 의를 사모해서 많은 사람들이 친히 내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제들을 보내 볼모로 삼기도 하고 벼슬 받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우리 땅으로 옮겨오고 토산물을 바치는 자들이 길에 잇닿았다.』
<태조실록>
『태종 6년 5월 기해 동북면 도순문사 박신이 아뢰었다. “경성, 경원 지방에 여진족이 출입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면 떼 지어 몰려들 우려가 있고, 일절 끊고 금하면 야인이 소금과 쇠를 얻지 못하여서 노략질을 할 것입니다. 두 고을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무역을 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다만 쇠는 무쇠만 사고팔게 하였다.』
<태종실록>
『경원도호부 (줄임) 본래 고려 땅이었는데 중간에 호인(여진족)에게 점거되었다. 태조 7년에 처음으로 부를 공주에 설치하고 경원이라 하였다. 태종 9년에 경원부를 소다로로 옮기고 목책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태종 10년에 알타이 추장 동맹가첩목아가 야인을 끌고 침입해 와서 부사 한흥보 등을 살해하였다. 백성들을 옮겨 경성군에 소속시키고 그 땅은 비워 두었었다. (줄임) 세종 16년 옛 땅을 되찾기로 하였다. 소다로의 땅이 넓고 기름지며 적들이 오가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옛 터전 북쪽인 회질가에 성을 설치하였다. 남도 백성을 이주시켜 채우고 부를 옮기고 판관과 토관을 두었다. 그 뒤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세종실록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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