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회암사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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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4-06 07:17 조회9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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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터 전경 : 고려 중기 12세기 때만 하더라도 승려 수가 3천여 명에 이르는 전국 최대 사찰의 하나였으며 조선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에 의해 사세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으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보우가 사사되면서 절도 폐사되었다.
문화재 복원안내판을 통해 본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 유적지의 모습
복원안내판 없이 바라본 양주 회암사 절터.
문화재 복원안내판을 통해 본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 유적지의 모습.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의정부를 지나 경원가도를 달리다 보면 동두천 못미처에 회정 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접어들어 8km쯤 들어가면 양주와 포천 땅을 가로질러 우뚝 서 있는 천보산이 나타난다. 연이은 바위 봉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빈 절터를 감싸고 있는 천보산 자락. 역사의 거친 회오리를 겪고 폐허 속에 침몰해버린 회암사 터가 있다. 향화(香火)가 꺼진 지 900여 년의 오랜 세월, 만여 평의 절터에는 땅에 박힌 채 거친 세파를 말없이 견뎌온 석재들만 고스란히 남아 그 옛날의 식어버린 온기를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회암사는 천마산 기슭의 서남쪽에 남향으로 앉아 3면이 숲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전방이 탁 트여 시원했을 것이다. 고려 말의 학자인 목은 이색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를 통해서 회암사에 대해 ‘아름답고 장엄하기가 동방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를 볼 때 당시 회암사는 장대 할 뿐만 아니라 불전(佛殿)이나 그 내부에 봉안된 불상 등도 다른 사찰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불교를 크게 일으켰던 3대 사찰이었으며, 지공 화상, 나옹선사, 무학대사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승들이 머물면서 명성을 드날리고 번창했던 회암사(檜岩寺).
왼쪽부터 지공, 나옹, 무학대사
사실 회암사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사찰인데,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는 1326년 고려에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63)이다. "회암사의 산수형세(山水形勢)가 인도의 나란타 사원과 같으므로 이곳에서 불법(佛法)을 일으키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했다.
지공의 제자인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이 1376년에 사찰을 262칸 규모로 중창했다. 승려 나옹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를 지은 분이다. 이후, 지금의 서울을 새 왕조 조선의 도읍지로 추천한 인물인 풍수지리의 대가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가 회암사에서 수행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승려들인 지공과 나옹, 무학대사의 뜻이 한 데 모여 회암사의 유명세는 더해졌다. 하지만 그리도 유명하고, 그리도 사세가 대단했어도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회암사는 1566년에서 1595년 사이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 사라진다. 이상한 것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주시가 1997년부터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일부 유물에서 불에 탄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회암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생활했던 경기도 양주 회암사도 테러 대상이 됐다. 1566년 불교 신자였던 명종이 이렇게 말했다. “듣자 하니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고 한다. 놀랍다. 진정한 유생이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당연히 뽑아버려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보호하고 아끼는 의도를 보이니 무슨 일인가.”(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
우려 대로였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5년 화포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던 군기시 관리가 선조에게 이리 보고했다. “회암사(檜巖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하략).”(1595년 6월 4일 ‘선조실록’) 그 30년 사이에 회암사가 방화된 것이다. 2001년 회암사지 발굴조사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폐사 시점의 건물지 대부분이 화재로 인해 폐기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회암사 1 : 시굴 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p238) 1821년 경기도 광주에 사는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회암사 터에 있던 무학대사 부도탑과 비석을 부수고 자기 아비 묘를 쓰면서 회암사 수난은 정점을 찍었다. (1821년 7월 23일 ‘순조실록’)
지공, 나옹, 무학대사 부도탑
회암사지에서 1㎞ 정도 더 올라가면 지공과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탑(浮屠塔)이 나온다. 부도탑은 승탑(僧塔)이라고도 하며 입적한 승려의 사리를 수습해 모신 곳이다. 가장 높은 곳에 나옹, 중간에 지공, 맨 아래에 무학대사의 부도탑이 순서대로 자리해 있다. 세월이 오래되기도 했지만, 부도탑 곳곳이 손상돼 있다. 자세히 보면, 일부러 훼손한 것 같이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이 훼손에도 명당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개입돼 있다.
지공과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탑이 조성된 곳이 천하의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1821년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한 유생이 부도탑과 비석을 훼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기 아버지의 산소를 썼다. 훼손의 정도가 매우 심각해서 지공의 비석 일부는 인근 시냇가에 버려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유생은 벌을 받았고, 7년 후 순조의 명에 따라 부도탑도 다시 세워졌지만, 무도한 훼손의 흔적은 탐욕의 현장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에서 들어온 지공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 불우조」에는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 길을 따라 넘겨주어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13세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廣智禪師)에 출가했다는 내력이 그의 비문에 적혀 있다. 아마도 그 뒤 지공대사가 공력을 다하여 재창건했던 것을 창건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고려 땅에 들어와 불법을 펴던 지공화상은 당시 인도 최고의 불교대학이 소속돼 있던 나란타사를 본떠 회암사를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공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산수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나란타절과 같다” 하고 절을 짓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로써 회암사는 창건 당시 대찰이 아니었을지라도 조만간 대찰의 면모를 갖출 계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공화상은 1363년 열반에 든다.
우왕 2년(1376) 지공화상 제자이며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화상이 중건 불사하게 된다. 나옹은 바로 이 회암사에서 불도를 이루지 않았던가. 회암사는 드디어 수많은 승려 대중이 머물고, 수천의 대중들이 운집할 수 있는 대찰이 된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열려는 순간 나옹은 갑작스러운 왕명을 받는다.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옹화상의 법력에 매료된 전국의 수많은 아녀자가 일손을 멈추고 길이 막힐 지경으로 모여들어 생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산문을 막고 회암사에 오르는 백성들을 돌려보냈으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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