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오리 이원익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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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6-29 16:01 조회1,3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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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영정
이원익은 1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해(1564년, 명종 19년) 성균관에서 수학했고 5년 뒤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1569년, 선조 2년).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장군을 죽이려는 하는 선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때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이가 영의정 겸 도체찰사 오리 이원익이다. 전쟁을 총지휘하는 도체찰사가 “전하께서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폐하지 못하옵니다.”라고 간한 것이다. 이틀의 국문 끝에 장군은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케 되었으니 청백리 오리 대감의 위대한 반대가 장군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 것이다.
오리 선생은 석 자 세 치, 지금으로 치면 1m 정도의 작은 체구를 지녔다. 오죽하면 효종이 1651년에 인조의 종묘(묘정)에 이원익을 함께 제사를 지낸다고 내린 교서인, <인조묘정배향교서>에 "신고불승의"라 표현했다. 의복마저도 버거운 몸으로, 어릴 적에 병치레가 잦았다.
거대한 전란을 겪은 국왕과 재상은 이때 중요한 정책을 도입했다. 그 뒤 대동법(大同法)의 모체가 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경기도에 시범 시행한 것이었다. 널리 알듯이 대동법은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에서 공납을 쌀로 걷는 제도였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논의되어 온 이 제도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해 시행시켰다. 앞서 황해도 도사, 안주목사로서 보여준 뛰어난 실무적 관료의 면모는 다시 한 번 빛났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광해군의 내치(內治)는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영의정은 그런 풍파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기 쉬운 자리였다. 즉위 직후 광해군이 형 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려고 하자 이원익은 23회나 사직했고, 결국 윤허를 받아 낙향했다(1609년, 광해군 1).
그러나 그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2년 뒤 국왕은 그를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다(1611년 9월). 그러나 이때도 국왕의 시책에 반대해 이듬해 4월에 체직(遞職- 벼슬이 갈림)되고 말았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사사되었고, 이듬해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원익은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했고,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여주에 은거하면서 광해군의 치세를 보냈다 (1619년, 광해군 11).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역경은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었다. 이원익은 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국왕과 세자를 수행했다. 환도한 뒤 국방을 총괄하는 훈련도감 제조에 임명되었지만, 그런 중책을 맡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사직을 주청해 금촌으로 낙향했고, 1632년(인조 10) 6월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잠깐 서울로 올라와 성복(成服)한 것을 빼고는 그곳에서 계속 지냈다.
이원익은 1634년 1월 29일 금촌에서 세상을 떠났고, 4월 그곳에 묻혔다. 영예와 고난이 교차한 87세의 긴 생애였다.
묘소 및 신도비. 부인 영일 정씨와의 합장묘다. 경기 광명시 소하동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원익의 능력과 명망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객관적인 증거는 광해군과 인조가 그를 자신의 첫 재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치세 초반 원로를 임명해 조정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륜과 인품이 겸비되지 않았다면 있기 어려운 인사가 분명할 것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주목되는 요소는, 앞서 말했듯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뛰어난 실무적 능력과 식견을 가진 신하였다는 것이다. 황해도 도사 시절의 군적 정비와 안주 목사 때의 농상(농사일과 누에치는 일) 진흥, 그리고 광해군 초반 대공수미법의 실시는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실례다.
또한 이원익은 신념과 원칙을 견지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는 이순신을 변함없이 옹호한 거의 유일한 대신이었다. 유성룡마저 이순신을 비판할 때도 이원익은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면서 그를 교체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선조 29년 10월 5일, 11월 7일).
인조반정 뒤 광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을 때도 이원익은 자신이 모셨던 주상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맞서 광해군의 목숨을 보호하기도 했다.
탁월한 실무적 식견과 강직한 원칙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원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몸가짐이 깨끗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치적이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관서(평안도)에 두 번 부임했는데 그곳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했다.…… 그는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으로 돌아갔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인조 12년 1월 29일)
이원익은 인조의 묘정(종묘)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에 제향되었다. 남인의 거두인 허목이 그의 손녀사위로 그 뒤 [오리집]을 간행하고 묘비명과 연보, 유사 등을 지어 업적을 기리는데 중요하게 공헌했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 『속오리집』, 『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가 있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충현서원에 제향되었다[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충현서원 터가 남아 있음]. 시호는 문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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