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조선 전기의 문학과 예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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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0-28 04:39 조회2,1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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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배치
창덕궁 배치도 : A 돈화문 · 진선문 권역(돈화문, 진선문), B 인정전 권역(전정/전내), C 선정전 권역(주변/전내), D 희정당 · 대조전 권역(희정당내/대조전내/후원), E 낙선재 권역(내부/후원), F 부용정 권역(외부공간), G 연경당·애련정 권역(외부 공간), H 옥류천 권역(외부 공간)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정궁인 경복궁을 보좌하는 별궁으로 창건되었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정문과 정전이 남북 직선 축 상에 나란히 놓여 질서 정연한 대칭적인 건물 배치를 하지 않았다. 뒤쪽 낮은 언덕을 따라 건물을 펼치는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궁궐 서남쪽 모퉁이에 정문(A)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금천교를 지나면 동북쪽에 정전(B)에 이른다. 정전 바로 뒤쪽이 아니라 동북쪽 뒤편으로 내전(D)이 있고, 언덕 안쪽에 지형 조건을 살려 후원을 만들었다.
◉ 서원
* 도산서원 배치도 : 도산서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은 사당 및 강당과 재이다. 상덕사는 제사지내는 사당이고, 전교당은 공부를 하는 강당이고, 재(홍의재, 박악재)는 원생과 진사 등이 숙식하는 곳이다. 이 밖에 장판각에서는 문집이나 서적을 펴냈고, 명실(서광명실, 동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이다. 전사청은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이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원은 문묘나 향교와 비슷하게 남북 축을 따라 동서로 마주보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건물은 쓰임새에 따라 지형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적절히 공간 구성을 하였다. 서원 건축 양식은 양반 주택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선현이 쓰던 별장이나 집을 서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사당 및 강당과 재이다. 대체로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당당, 사당 등을 세웠다. 사당은 따로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세우며, 부근에 제기고를 두었다. 강당 앞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서고와 장판고 등을 곁에 두었다. 서원 관리와 식사 준비를 담당하는 고사는 강당 구역과 떨어져 한편에 두었다.
대부분 건물은 검소한 선비 정신에 따라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으로 지었다. 담장을 쌓았지만 그다지 높지 않았고 일부러 터놓기도 하였다. 자연과 조화를 깨지 않으면서 담장 밖 자연도 정원처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서원 안에는 산수유, 느티나무, 은행, 작약, 살구, 모과, 진달래, 개나리, 난초, 모란, 매화, 단풍 등을 심었다. 서원 바깥에는 소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 푸르름과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 해인사 장경판고 – 한국의 불가사의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남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16년에 걸쳐 완성한 대장경.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는데, 경판의 수가 8만 1258판에 이르며, 현재 합천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음). 나무판에 글을 새긴 대장경이 768년이 지난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경판을 보관하는 경판전인 [장경각] 건축법에 있다. 정부는 한 때 새로운 건물을 지어 팔만대장경을 옮기려 했었다. 그러나 새 건물에서 경판의 손상 조짐이 나타나자 옛 건물로 다시 옮겨야 했다
장경판전 수다라장 앞창
장경판전 수다라장 뒤창
장경각은 산자락의 골바람이 들어오는 절묘한 위치에 들어섰다. 벽면에는 위아래로 2개의 이중창이 나 있는데 앞면 창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으며 뒷면 창은 아래가 좁고 위가 넓다. 이는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 들어온 뒤 가능한 골고루 퍼진 다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또 판전 내부의 흙바닥에는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숯,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깔아두었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게 설치한 마구리에도 공기가 위아래로 통할 수 있도록 공간을 띄우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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