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성리학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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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0-18 09:03 조회3,3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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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향(1243~1306) : 한국 성리학의 시조
고려 후기(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명의 압력 등으로 인한 대외적 모순과 농장의 확대와 불교 교단의 폐해, 민생의 피폐 등으로 인한 대내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하였던 신진 사대부는 불교에 대항하는 개혁 사상으로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 신진 사대부 : 고려 말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 세력. 신진 사대부는 고려 무신 정권 때부터 중앙에 진출하였지만, 13세기 말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다. 지방의 중소 지주인 향리의 자제들로,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수용하고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치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학문적 교양뿐만 아니라 정치적 실무 능력도 갖춘 학자적 관료로서, 친원적이고, 친불교적인 권문세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결국 고려 말에 이르러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 등장한 신흥 무인 세력과 결합하여 권문세족을 누르고 조선 왕조를 개국하였다.
성리학은 중국의 송에서 당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성립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이’(만물의 이치·원리·질서)와 현상적이고 가변적인 ‘기’(활동하는 힘. 또는 뻗어 나가는 기운)로써 우주의 생성 ․ 변화를 설명하는 이기론은 자연과 인간 ․ 사회를 설명하는 성리학 전체의 기본 이론이었다.
이러한 이기론을 바탕에 두고 인간의 심성을 설명한 인성론과 도덕적 실천 방법을 설명한 수양론이 체계화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곧 ‘이’라는 ‘성즉리’와 보편적 진리인 ‘이’는 지적인 탐구와 수양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거경궁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함으로써(재천리거인욕)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 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이 ‘예’였다. 여기에 여러 정치 ․ 사회 ․ 경제 정책들이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입각하여 구체화되었다.
이를 보면 성리학이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 사회의 모든 분야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종합적인 사상 체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처럼 중세 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 즉 지배 사상인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조선 초 지배 사상이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바뀐 것은 사상사적인 발전을 의미하며, 이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중세 사회의 재편에 조응(원인에 따라서 결과가 생김)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1274~1308) 때 안향이었는데 그는 원나라에 가 처음으로 「주자전서」를 보고 손수 그 책을 베끼고 또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성리학을 강구(좋은 대책과 방법을 연구함)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백이정이 원에 유학 가서 성리학을 배우고 성리서를 많이 구해 가지고 와 학계에 전파하였으며 이제현과 박충좌가 그에게서 배웠다. 이제현은 충선왕(1308~1313)이 원의 수도에 설립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남송의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으며 귀국한 뒤 이색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색은 공민왕(1351~1374) 때 성균대사성 등을 역임하며 성리학의 보급과 국학의 진흥에 기여하였으며 정몽주 ․ 권근 ․ 정도전 등의 문인을 길러 냈다. 정몽주는 ‘동방 이학(성리학)의 조(시조)’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원으로부터 고려 사회에 도입된 성리학은 주로 북방의 한인 유학자들이 남송의 성리학을 수용해 관학화한 것이었으나 성리학에 대한 수요가 중가하면서 남송의 주자 성리학 그 자체와 주자 ․ 육상산을 절충한 학문 등 다양한 사상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다양한 사상 조류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의 차이는 이색 ․ 정몽주 등의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 ․ 조준 등의 급진 개혁파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으며 전제(논밭에 관한 제도)개혁과 조선의 건국 등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각자가 처한 사회 경제적 기반과 사상적 차이가 당시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에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같은 중소 지주이지만 급진 개혁파에 비해 사회 경제적 기반이 나았던 온건 개혁파의 사상은 「춘추」를 중시하였으며 인간의 본성과 성리학 본연의 왕도(인덕을 근본으로 다스리는 도리)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 체제는 그대로 둔 채 제도 운영상의 문제점만 개혁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온건 개혁파에 비해 사회 경제적 기반이 약하고 신분상으로 하자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급진 개혁파의 사상은 「주례」를 중시하였으며 제도 개혁과 왕도 ․ 패도(도리에 어긋남)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때문에 고려 말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지배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나아가 역성혁명(왕조가 바뀌는 일)론에 입각해 왕조도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바로 이들(급진 개혁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 춘추 : 기원전 5세기 초에 공자가 엮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사서.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 노의 은공 원년(기원전 722)부터 애공 14년(기원전 481)까지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유학에서 오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하나로 여겨진다.
- 주례 : 주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후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직 제도의 기준이 되었다. 전한(기원전 206~기원후 8) 말에 이르러 경전에 포함되면서 예경에 속한다고 ‘주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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