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을불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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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1-15 09:09 조회3,9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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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대총. 서기 342
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킨 모용선비(고대 북아시아의 유목 민족 중 하나인 선비족의 일파이다. 4세기 이후 중국의 오호 십육국 시대 때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의 여러 나라들을 건국했다.)는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을 훔쳐간다. 거대한 무덤 가운데가 크게 파헤쳐져 있다. 모용선비에게 미천왕은 두려운 존재였다. <출처 : 김용만>
미천왕(300~331)이 293년에 아버지가 반역 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하여 고용살이, 소금 장사 등으로 전전하였다고 한다. 이 자료에서 당시 사회 분화를 통해 나타난 서민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미천왕의 이름은 을불이니 서천왕(270~292)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처음에 봉상왕(292~300)이 아우 돌고가 딴 마음을 품은 것으로 의심하여 죽이니 그의 아들 을불이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도망하였다. 처음에는 수실촌에 사는 부자, 음모의 집으로 가서 머슴을 살았는데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심한 고역을 시켰다. 그 집 옆에 있는 늪에서 개구리가 울었는데 음모는 을불을 시켜 밤이면 돌멩이를 던져 개구리 소리를 금하게 하고 낮이면 종일 나무를 해 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므로 을불은 고생을 견디다 못해 1년 만에 그 집을 떠나서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이때부터 을불은 소금 장수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을불이 배를 타고 압록강변에 있는 사수촌의 한 노파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노파는 숙박비 대신 소금을 달라고 했고, 을불은 소금 한 말을 주었다. 하지만 욕심쟁이 노파는 을불에게 소금을 더 달라고 계속 졸랐다. “젊은이, 하룻밤 재워 주는 값으로 소금 한 말은 너무 적네. 소금 좀 더 주소.” “할머니, 하룻밤 숙박비로 소금 한 말은 많으면 많았지 적은 양이 아닙니다. 저도 소금을 팔아야 먹고사니, 더 이상은 줄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소금 좀 더 줘.” “할머니, 더 이상은 줄 수 없어요. 저도 먹고살아야 한다니까요.”
을불과 노파는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였지만, 을불은 끝까지 소금을 더 주지 않았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노파는 밤중에 몰래 을불의 소금 속에 자신의 신발을 넣어 놓고 시치미를 딱 떼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을불이 소금 지게를 지고 떠나려 하자, 노파는 자기의 신발이 없어졌다며 을불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야, 이 도둑놈아! 기껏 재워 줬더니, 남의 신발을 훔쳐 가냐? 어서 내 신발 내놓아라!” 을불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노파는 을불을 망신 주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은 뒤, 소금 속에서 신발을 꺼내어 을불을 옴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흉계에 을불이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심지어 노파는 압록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볼기를 때려 내쫓았다. 이 사건으로 을불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게 되어 소금 팔기가 한층 힘들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사가 엉망이 되었다. 이때 백성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아우성을 치는데도 봉상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백성들을 궁궐을 짓는 데 동원해서 괴롭혔다.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권했다. “대왕이시여, 요즘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서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닙니다. 굶주린 백성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짓는다는 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옵니다. 공사를 중지하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봉상왕은 국상의 말을 듣지 않았다.
“궁궐이 장엄하지 못하면 이웃 나라들이 고구려를 깔볼 뿐이오. 지금 국상이 나를 꾸짖는 것은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오. 그렇게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소? 국상은 백성들을 위해서 죽고 싶소? 다시는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하지 마시오.” 창조리는 봉상왕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봉상왕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추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봉상왕을 대신할 마땅한 왕족이 없었다.
을불이 적임자였으나, 그의 행방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창조리는 믿을 수 있는 부하 조불과 숙우를 지방으로 보내 을불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창조리의 비밀 명령을 받은 조불과 숙우는 을불을 찾아 전국을 돌아 다녔다. 그러나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살고 있는 을불을 찾기란 해변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불과 숙우가 비류하 물가에 이르러서 나룻배를 탔는데, 청년 하나가 뱃전에 앉아 있었다. 행색이 남루하여 거지같았지만, 기품이 있어보였다. 혹시나 하고 두 사람은 그에게 을불이 아니냐고 물었다. 을불은 자기를 죽이러 온 사람들인 줄 알고 자기 신분을 더욱 숨겼다. “저는 소금 팔러 다니는 이름도 없는 사람입니다. 을불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숙우는 아무래도 소금 장수가 을불인 것 같아서 을불을 찾는 이유를 대며 끈질지게 매달렸다. “지금 임금은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저희들을 의심하지 말고 을불님임을 밝혀 주십시오.” 을불은 조불과 숙우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제야 자신이 을불임을 밝혔다. 그러고는 그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창조리 집에 몸을 숨겼어요. 창조리는 을불을 왕위에 올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봉상왕을 몰아낼 기회만 엿보았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봉상왕이 참가하는 사냥대회가 열리자, 창조리는 봉상왕이 없는 자리에서 대신들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임금을 몰아내고 왕의 조카인 을불님을 왕위에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소.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갈댓잎을 모자 위에 꽂아 주시오.” 많은 대신들이 봉상왕의 행패에 마음이 떠난 상태여서 갈댓잎을 모자위에 꽂았다. 이를 본 창조리는 봉상왕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소금 장수였던 을불을 고구려의 15대 임금으로 추대했다. 「삼국사기」 미천왕 조
* 창조리 : 오늘날의 국무총리를 지낸 관리. 악덕을 일삼던 봉상왕에게 백성을 위한 바른 정치를 권했으나, 그가 묵살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소금 장수 을불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 봉상왕 : 미천왕의 큰아버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미천왕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동생인 돌고를 살해했다. 그러나 신하들에게 쫓겨나 왕위를 돌고의 아들인 을불에게 내줘야 했다.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 중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한4군이 설치된 이후,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했던 중국 세력은 부여와 고구려의 성장으로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이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미천왕은 311년에 한반도에서 요동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현재 중국 요령성 단동 지역)을 점령했다. 서안평은 3세기 중반에 동천왕이 점령하려고 했었으나 실패했던 지역이다. 이곳을 미천왕이 차지함으로써 평안도와 황해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은 본국인 중국과의 교통로가 끊어져서 섬처럼 고립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여 고구려 영역을 한반도 북부까지 확장하였다.
-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는 서북쪽의 전연과 남쪽의 백제의 침략을 받으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 미천왕 시대의 고구려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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