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한국의 서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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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7-16 12:41 조회1,9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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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에 등재된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사진)’이 충청권을 대표하는 유교 문화 교육·관광명소로 추진된다.
이런 공간은 한국 뿐 …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인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2019년 7월 6일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을 세계 유산 중 문화 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995년 처음으로 등재된 석굴암ㆍ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를 비롯해 14개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연번 |
등재 목록 |
등재 일 |
비고 |
1 |
석굴암 · 불국사 |
1995. 12. 09 |
문화 유산 |
2 |
해인사 장경판전 |
1995. 12. 09 |
|
3 |
종묘 |
1995. 12. 09 |
|
4 |
창덕궁 |
1997. 12. 06 |
|
5 |
화성 |
1997. 12. 06 |
|
6 |
경주 역사유적지구 |
2000. 12. 02 |
|
7 |
고창 · 화순 · 강화 고인돌 유적 |
2000. 12. 02 |
|
8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
2007. 07. 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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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조선 왕릉 |
2009. 06.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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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한국의 역사 마을 : 하회와 양동 |
2010. 07.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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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남한산성 |
2014. 06.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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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백제 역사유적지구 |
2015. 07. 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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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2018. 06. 30 | |
14 | 한국의 서원 9곳 | 2019. 07. 04 |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한국 문화유산. 문화유산 13곳과 자연유산 1곳이다.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1543년. 안향), 남계서원(경남 함양. 1552년. 정여창), 옥산서원(경북 경주. 1573년. 이언적), 도산서원(경북 안동. 1574년. 이황), 필암서원(전남 장성. 1590년. 김인후), 도동서원(대구 달성. 1605년. 김굉필),병산서원(경북 안동. 1613년. 류성룡), 무성서원(전북 정읍. 1615년. 최치원), 돈암서원(충남 논산. 1634년. 김장생) 등 총 9곳이다.
서원은 공립학교인 향교와 달리 지방 지식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로, 성리학 가치에 부합하는 지식인을 양성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 학자를 사표(학식, 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로 삼아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제사를 지냄)했다. 1543년(중종 38년) 5월 22일 <중종실록>에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안향의 옛 집터에 사우(사당)를 세워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이라 했다.” 고 한다. 이것이 ‘서원의 시작’ 이다.
주세붕이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집터에 서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중종실록>은“서원 좌우에 유생들이 거처하며 배우는 학교를 세웠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자를 받아 운영했고, 고을 백성 중에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했다”고 부연 설명했다. 서원은 향촌(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설립한 사설 학교로, 지역을 대표하는 선배 유학자의 이념을 배우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뿐만 아니라 터를 닦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리 300근으로 서울에서 유교 경전 뿐 아니라 정주(주, 송나라 유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와 주자를 일컬음)의 서적까지 죄다 구입해서 장서각(도서관)에 두었다.
7년 뒤인 1550년(명종 5년) 2월 11일 명종 임금은 역시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1501~1570)의 상주(임금에게 말씀을 아룀)에 따라‘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손수 짓고 편액(액자)과 서적, 노비까지 하사했다. ‘소수’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계승하여 닦는다는 뜻이다. 소수서원(백운동서원)처럼 ‘국가의 공인’을 받은 서원을, 임금이 액자를 내린 서원이라 해서 사액서원이라 한다.
서원은 주세붕이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명종실록>은 “주세붕은 주문공의 백록동 서원을 모방해서 서원을 만든 것”이라 했다. 주문공은 남송의 유학자 주자(1130~1200)를 지칭한다. 서원은 원래 중국 남당(937∼975) 연간의 인물인 이발이 은거했던 강서성 노산의 백록동이라는 곳에 학궁(백록서원)을 창건하고 스승과 생도를 가르친 데서 유래됐다. 그러나 북송 시대(960~1127)까지도 성행하지 않아 오직 4곳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남송(1127∼1279) 연간에 남강태수가 된 주자가 남송 효종(재위 1162~1189)의 사액을 받아 병란으로 폐허가 된 백록서원을 중수하고, 강학에 힘썼다. 주자는 이곳에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1017~1173)를 제사 지냈다.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은 바로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모방한 것이다.
물론 한국의 서원이 중국의 서원을 모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절차탁마(부지런히 학문이나 덕행을 닦음)하는 곳인 동시에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곳에 모셔진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다.
1550년(중종 5년) 퇴계 이황의 상소를 보면 ‘한국 서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황은 “은거하며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며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세상보다 한적한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에서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천하의 의리를 살피면서 덕과 인을 쌓고 익혔기 때문에 서원에서 공부하는 것”이라 했다. “국학(성균관 · 학당)이나 향교 등은 사람이 많은 곳에 있어서 법령에 구애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일(과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런 점에서 선비가 학문을 도모하고자 할 때와 어진 이를 구할 때도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입니다.”
서원이 입시(과거)준비나 하는 곳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서원에서는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고 이끌어가는 교두보(어떤 일을 하기 위한 발판)가 되었고, 지침을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이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4일 항일의병을 일으킨 곳이 바로 무성서원(전북 태인)이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에 대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평가하면서 꼽은 등재기준, 즉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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